[비즈한국] 화장품 업계에서 가장 공격적으로 동물실험 배제 원칙을 고수해온 영국의 코스메틱 브랜드 러쉬(LUSH). 이들의 ‘비동물 철학’은 완제품을 넘어 원료 수급 단계부터 철저하게 관철되기로 유명하다. 전 세계 모든 공급업체로부터 동물실험 반대 진술서를 매년 갱신받는 공급망 관리 기준은 업계에서 손꼽힐 정도로 깐깐하다.
실제로 국내외 파트너사들과 협의하는 과정에서 동물실험이나 원료 배제 기준을 충족하지 못해 계약이 무산되기도 했다. 업계에서는 러쉬의 타협 없는 원칙 고수가 진정성을 증명해, 가치 소비를 중시하는 소비자들의 강력한 팬덤을 이끌어내는 핵심 원동력이 되고 있다고 본다.

우미령 러쉬코리아 대표는 “단기적인 사업 이익 관점에서는 뼈아픈 결정들이었지만 이 원칙만큼은 한 번도 타협한 적이 없다”면서 “우리가 왜 이 캠페인을 하는지 끊임없이 설득하는 과정에서 비록 계약은 성사되지 못할지언정 실무자들까지 러쉬의 진정한 팬이 되는 놀라운 경험을 해왔다”고 밝혔다.
러쉬는 내부 직원들도 주입식 교육이 아니라 현장에서 사회적 변화를 직접 만들어가는 경험을 공유하며 브랜드에 대한 자부심 항목에서 5점 만점에 4.2점이라는 최고점을 기록할 만큼 단단한 조직문화를 구축하고 있다.
러쉬코리아는 국내 화장품 시장에서 동물실험이 전면 퇴출되는 데도 기여했다. 지난 2012년부터 3년간 전국 매장과 외부 행사에서 화장품 동물실험 금지법 통과를 촉구하는 서명운동을 펼쳤고, 2013년부터 동물실험반대 엑스포를 개최하는 등 여론을 주도했다. 그 결과 2015년 동물실험을 통해 개발된 화장품의 유통 및 판매를 원칙적으로 금지하는 화장품법 개정안 통과를 이끌어냈다. 이 법은 2017년부터 시행됐다.
이 경험은 러쉬코리아가 한국 휴메인 월드 포 애니멀즈와 함께 2021년부터 2023년까지 약 6만 6000명의 시민 서명을 모아 국회에 제출해 제약바이오의료기기 등에서도 동물대체시험법이 제정되도록 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그 연장선으로 2027년 8월 서울 코엑스에서 러쉬코리아와 한국바이오의약품협회(KoBIA), 식품의약품안전처와 공동 주관하는 ‘제14차 세계동물대체시험학회(WC14)’가 열린다. 생명과학 및 대체시험 분야 세계 최대 권위의 국제 학술대회로 2007년 일본 이후 아시아에서 20년 만에 열리는 행사인 만큼 미래 동물대체시험 연구와 정책을 논의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우 대표는 “아시아에서 20년 만에 열리는 이 자리를 통해, 우수한 국산 대체시험 기술이 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 표준을 선도하는 이정표를 세우기를 희망한다”고 강조했다.

생쥐에겐 없는 생리 현상…‘장기 칩’ 대안 발굴하는 러쉬 프라이즈
러쉬는 동물실험 자체를 비판하고 문제 제기에만 머무르지 않고 실질적인 대안을 발굴하기 위해 직접 생태계 구축에 나섰다. 대표적인 사례는 영국 비영리 단체 ‘윤리적 소비자 연구소’와 공동 주최하는 ‘러쉬 프라이즈’다. 2012년 시작돼 전 세계 동물대체시험 과학자와 활동가를 지원하고 있다.
올해 5월 영국 런던에서 열린 ‘2026 러쉬 프라이즈’에서는 하버드대학교 비스연구소 조레 이자디파 박사팀이 수상했다. 이자디파 박사팀은 여성 건강 연구에 활용될 인간 자궁경부 및 질 칩을 개발 중이다.
그동안 월경이나 폐경을 경험하지 않는 생쥐 모델을 기반으로 인간 여성 건강을 연구하기에는 인체의 복잡한 생리적 특성을 정확히 모사하는 데 한계가 있었는데 오히려 동물대체시험법이 여성 질환 치료의 게임 체인저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증명해낸 것이다.
“관행적 동물실험 맹신 금물…미국 유럽처럼 규제 유연해져야”
우 대표는 이처럼 혁신적인 대안이 등장하는 만큼 보수적 입장을 취하는 제약·바이오 업계를 향해 보다 개방적 시각으로 바라볼 것을 제안했다. 동물대체시험법이 피할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인 만큼 이에 대응하지 못하면 오히려 시장에서 경쟁력 확보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한국이 시급히 벤치마킹해야 할 제도로 미국과 유럽연합(EU)의 유연한 규제 환경을 꼽았다.
그는 “미국과 EU처럼 비동물접근법(NAMs)을 공식적인 안전성 평가 자료로 유연하게 인정하고 수용하는 규제 당국의 개방적인 태도가 필수적”이라며 “아무리 훌륭한 첨단 기술이 개발되더라도, 이를 제도권 안에서 신속하게 평가하고 활용할 수 있는 규제 샌드박스와 유연한 법적 체계가 없다면 기술은 사장되기 마련”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인간과 동물 사이에는 분명한 종간 차이가 존재하며, 오랫동안 관행적으로 이어진 동물실험이 가장 신뢰할 수 있는 표준이라는 고정관념을 깨야 한다”면서 “코닥 필름이 디지털 시대를 맞아 몰락했듯, 업이나 생태계를 바꾸지 않으면 결국 생존할 수 없게 돼 철저히 준비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그러면서 “오히려 동물대체시험법은 인간 세포와 최첨단 공학 기술을 결합함으로써 인간에게 가장 정확하고 예측력 높은 결과를 도출하는 인간 중심의 과학으로 전환을 가속할 것”이라고 역설했다.

‘윤리적 AI’ 도입 고민…모바일 앱·매장 연계해 대중적 사회 의제로
최근 뷰티 및 제약 업계의 화두인 AI(인공지능) 활용에 대해서도 러쉬만의 확고한 철학을 내비쳤다. 기술의 진보를 수용하면서도 윤리적 테두리 안에서 이를 활용하겠다는 전략이다.
우 대표는 “무분별하게 자원을 낭비하거나 창작자의 권리를 침해하는 빅테크의 독주에는 경계의 목소리를 높이지만, 인간의 전문성을 보조하고 환경적 영향을 최소화하는 ‘윤리적 AI(AI the Lush Way)’ 인프라 구축은 깊이 고민하고 있다”며 “컴퓨터 시뮬레이션 및 데이터 기반의 AI 대체시험 기술 역시 우리가 주목하는 핵심 분야”라고 밝혔다.
향후 러쉬코리아는 동물대체시험법이 일부 전문가들만의 학술적 논의에 머무르지 않고 대중이 일상에서 체감하는 뜨거운 사회적 의제로 자리 잡도록 캠페인의 패러다임을 넓힐 계획이다. 우 대표는 “산업계, 연구기관과 파트너십을 더욱 공고히 할 뿐만 아니라 새롭게 고도화된 러쉬코리아 모바일 앱과 전국 오프라인 매장을 플랫폼 삼아 시민이 일상 속에서 즐겁고 자연스럽게 동참할 수 있는 대대적인 참여형 프로젝트를 선보일 것”이라고 포부를 드러냈다.
동물실험이라는 오랜 관행에서 벗어나는 것은 기업 입장에서 더 이상 규제나 비용이 아니다. 오히려 동물실험 축소라는 거대한 시대적 파도 앞에서, 인간 중심의 첨단 과학으로 선제적으로 전환하는 것이 미래 시장의 팬덤을 선점하는 확실한 투자임을 러쉬의 사례가 증명하고 있다. 기술적·제도적 과도기를 건너고 있는 K-바이오 생태계가 러쉬의 뚝심 있는 액티비즘(행동주의)을 다시 한번 깊이 곱씹어 봐야 할 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