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질문을 하던 사람으로 살았는데, 근래 대체로 질문을 받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예기치 못한 질문에도 종종 마주하게 되었는데, 대표적인 것은 의학드라마를 어떻게 생각하냐는 것이다. 나는 의학드라마를 포함한 각종 드라마는 일생 안 보고 산 사람이다. 하지만 질문을 하면 적절한 답을 하는 것도 질문을 하는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겠는가. 그래서 올해 초 시간을 내서 ‘태양의 후예’를 눈과 두 손 두 발에 힘주고 딱 ‘두 편’ 본 것은 참으로 좋은 선택이었다.
최근에는 낭만닥터 김사부에 대한 이야기를 묻는데 또 도저히 할 말이 없는 것이다. 심지어 몇 개 언론에선 내게 ‘진짜 낭만닥터 남궁인’이라는 누명을 씌우기까지 했는데, 이 치밀한 상상력에다가 가타부타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인생을 투자해 낭만닥터 김사부 정주행을 시작했다.
‘의사의 일’을 있는 그대로 영상물로 재현하면 그것은 다큐멘터리가 될 것이다. 반대로 의사의 일에 발만 걸치고 자기 얘기를 하면 그건 태양의 후예같은 판타지 극이 될 것이다. 결국 드라마는 다큐멘터리가 아니므로, 낭만닥터 김사부는 의사의 일을 기반으로 현실에서 일어나기 어려울 법한 일을 각색해서 사람들의 관계와 사건으로 드라마를 풀어나가야 한다. 그렇다면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을 법한 인물’을 등장시켜 극을 이끌어 나가는 것이 우선일 것이다.
극중에서 이 현실 의료계에서 존재하지 않는 인물은 압도적으로 유연석이 맡고 있다. 유연석이 분한 의사가 우리나라에 존재할 확률은, 우리나라에 어떤 의사가 6년 동안 의대와 1년간 인턴을 마치고 4년 동안 흉부외과 수련을 하고, 3년간 군의관에 다녀와 또 4년 동안 신경외과 수련을 하고, 여기서 더 4년 동안 일반외과 수련을 마치고 어느 의국에서 일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수술 성공률 97퍼센트인 전설의 써전이 되었는데, 병원장의 흉계에 휘말려 동료들과 주먹질하다가 정도를 포기하면서 이름을 바꾸고 잠적해 변방에 슈퍼 닥터로 근무하면서 카지노 회장이랑 수술 기구로 밀당을 하고 주방 아저씨들이랑 친하게 지내다가 주방이 폭발해 자기 몸을 던져서 불까지 끄는데 하필 그 사람이 한석규랑 닮았을 확률보다 적다. 왜냐하면 유연석은 선배에게 막말하기 때문이다.
일단 주인공 셋 중에서 가장 의사 같아 보이는 점도 있고, 레지던트 4년 차 때 외과 스텝이랑 사귀면서 청혼을 받는데 갑자기 하루 뽀뽀한 인턴 때문에 마음이 흔들려서 청혼을 미루다가 교통사고가 나는데, 알고 보니 외과 스텝은 간호사랑 바람났고, 근데 또 하필 그 외과 스텝이 지연성 뇌출혈로 멀쩡하다가 한방에 쓰러져 죽은 이래로 난데없이 산속을 헤매다가 잠적해 흉부외과 수련을 돌담병원 응급실(?)에서 받다가 막바지에 그 인턴이 뿅 하고 나타나고 자기는 스키조처럼 죽은 외과 스텝의 환청을 들으면서 손목을 긋다가 김사부에게 무릎을 꿇으며 하필 가장 인기 없는 흉부외과학을 가르쳐달라고 조르는 나름대로 비현실적인 캐릭터이지만, 연기가 워낙 안정적이라서 이 날뛰는 캐릭터를 제법 합당하게 잘 소화한다.
진지할 때는 진지하게, 의사일 때는 의사답게, 귀여워 보여야 할 때는 귀엽게, 닭살 돋는 대사를 소화할 때는 거부감 없이 새침하게, 어느 지점에서 자신이 시청자들에게 보여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다. 영리한 배우다.
남궁인 응급의학과 의사 · ‘만약은 없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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