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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급실에서] 의사가 본 낭만닥터, ‘김사부는 없다’

인생을 투자해 ‘낭만닥터 김사부’ 정주행…의학적 고증을 제대로 거친 판타지

2016.12.19(Mon) 10:26:30

평생 질문을 하던 사람으로 살았는데, 근래 대체로 질문을 받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예기치 못한 질문에도 종종 마주하게 되었는데, 대표적인 것은 의학드라마를 어떻게 생각하냐는 것이다. 나는 의학드라마를 포함한 각종 드라마는 일생 안 보고 산 사람이다. 하지만 질문을 하면 적절한 답을 하는 것도 질문을 하는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겠는가. 그래서 올해 초 시간을 내서 ‘​태양의 후예’​를 눈과 두 손 두 발에 힘주고 딱 ‘두 편’ 본 것은 참으로 좋은 선택이었다.

 


최근에는 낭만닥터 김사부에 대한 이야기를 묻는데 또 도저히 할 말이 없는 것이다. 심지어 몇 개 언론에선 내게 ‘​진짜 낭만닥터 남궁인’​이라는 누명을 씌우기까지 했는데, 이 치밀한 상상력에다가 가타부타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인생을 투자해 낭만닥터 김사부 정주행을 시작했다. 

 
제법 인내심을 발휘해 드라마를 보던 중, 6편에서 7편으로 넘어가려는 찰나에 나는 내 인생을 이대로 학대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화면을 꺼 버렸다. 그러고 나니 드라마에 대해 하고픈 말은 그리 많지 않지만, 무엇인가 남겨야 인생을 보상받을 것 같아서 글을 적는다.
 
일단 의사가 보았을 때 의학적인 배경이 허무맹랑하냐, 아니면 어느 정도의 신빙성이 있느냐가 가장 궁금한 것일 테다. 이건 분명히 이야기할 수 있다. 낭만닥터 김사부의 ‘내부’에는 분명히 의사인 ‘내부자’가 있다. 그것도 과를 망라해서 적어도 서너 명은 상주하면서 대본과 현장 작업을 하는 것으로 사료된다. 극 중에서 응급실 환자가 들어왔을 때, 무슨 무슨 처치를 해야 하겠다고 속으로 생각하면 주인공들은 대부분 그렇게 한다.
 
간혹 일부러 그릇된 처치를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때는 낭만닥터로 나오는 한석규가 잘 잡아 준다. 그 외에 응급실에서 각과를 콜하는 시스템, 진상 환자와 드문드문 오는 불합리한 환자, 수술방에서 마취과 의사와 서전의 역할 분담까지, 극중이라는 상황을 감안하면 고증에 의해 제법 잘 재현이 되어 있다. 아마 그간 방영된 의학드라마에 관련된 날선 비판이 적극적으로 반영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응급실에서 환자를 처치하는 동선이나 역할까지도 내부자의 손길로 잘 재현이 되어 있는데, 그 외에도 수술방이 재현된 부분은 꽤 흥미롭다. 수술방에서만 쓰는 은어와 도구 이름까지 배우들이 잘 읊는 것도 좋은데, 기구를 건네고 받는 손길과 그 도구를 사용하는 방법까지 실제 의사들이 지도하고 연습한 티가 역력하다. 나는 의사지만, 수술방에 들어가지는 않으므로 나라도 저런 연기를 하려면 연습이 꽤나 많이 필요할 것임을 감안하면, 배우들이 그 과정에서 많은 노력을 했음이 보인다. 역시 배우라는 직업은 대단하다.
 
―아래에는 스포일러가 있지만, 결정적이지 않습니다―
 

‘의사의 일’을 있는 그대로 영상물로 재현하면 그것은 다큐멘터리가 될 것이다. 반대로 의사의 일에 발만 걸치고 자기 얘기를 하면 그건 태양의 후예같은 판타지 극이 될 것이다. 결국 드라마는 다큐멘터리가 아니므로, 낭만닥터 김사부는 의사의 일을 기반으로 현실에서 일어나기 어려울 법한 일을 각색해서 사람들의 관계와 사건으로 드라마를 풀어나가야 한다. 그렇다면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을 법한 인물’을 등장시켜 극을 이끌어 나가는 것이 우선일 것이다.​

 

‘낭만닥터 김사부’에서 현실 의료계와 가장 먼 인물로 보이는 유연석.


극중에서 이 현실 의료계에서 존재하지 않는 인물은 압도적으로 유연석이 맡고 있다. 유연석이 분한 의사가 우리나라에 존재할 확률은, 우리나라에 어떤 의사가 6년 동안 의대와 1년간 인턴을 마치고 4년 동안 흉부외과 수련을 하고, 3년간 군의관에 다녀와 또 4년 동안 신경외과 수련을 하고, 여기서 더 4년 동안 일반외과 수련을 마치고 어느 의국에서 일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수술 성공률 97퍼센트인 전설의 써전이 되었는데, 병원장의 흉계에 휘말려 동료들과 주먹질하다가 정도를 포기하면서 이름을 바꾸고 잠적해 변방에 슈퍼 닥터로 근무하면서 카지노 회장이랑 수술 기구로 밀당을 하고 주방 아저씨들이랑 친하게 지내다가 주방이 폭발해 자기 몸을 던져서 불까지 끄는데 하필 그 사람이 한석규랑 닮았을 확률보다 적다. 왜냐하면 유연석은 선배에게 막말하기 때문이다.
 
흙수저였기 때문에 성공하려고 한다는 동기를 부여한 것까지는 좋고, 1등을 놓치지 않는 보드 수석인 것까지도 좋다. 그렇게 스텝에만 목매는 훌륭한 외과 보드가 선배의 지시에 도끼눈을 뜨고 반항하며 꼰대 운운하고, 자기도 잘 모르면서 큰소리나 치고, 게다가 하임리히도 모르고 화상은 본 적도 없다니, 얘는 의사 사회에서 이미 실격이다. 아니, 실격이라기보단 있을 수 없는 캐릭터다.
 
덧붙여 커피를 못 타는 인턴은 봤어도, 안 타는 인턴은 못 봤다. 물론, “저는 사람을 살리러 왔습니다”라고 말하는 인턴도 못 봤다. 내 눈에는 워낙 비현실적인 캐릭터인 데다가, 그리 안정적이지 않은 연기 때문에 유연석이 나오는 장면에서 이 친구가 도끼눈을 뜨면 또 무슨 이상한 짓을 할까 나도 모르게 나 또한 도끼눈을 뜨게 된다. 분명 이 친구가 사랑꾼일 것을 너도 알고 나도 알고 있으니 더더욱 그렇다. 그 와중에 연애는 적당히 해야지.
 
하여간 유연석이라는 비현실적인 캐릭터 때문에 이 극은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드라마가 된 것일 테지만, 이 극의 중심에 서 있는 캐릭터가 설득력이 전혀 느껴지지 않음은 조금 아쉽다. 더불어 극의 재미와 성립을 위해서겠지만, ‘의학적인 고증’을 넘어 병원 내부 갈등이 과장되어 있는 점도 눈에 띈다.
 
전형적인 SM상 여자 아이돌의 시조급인 서현진의 연기는 인상적이다(나는 M.I.L.K. 중에서 하얀 빵모자를 쓰고 나와서 컴투미~라고 외치던 서현진의 팬이었는데, 이 뮤비가 자그마치 2001년에 나온 것임을 감안하면, 내 유구한 아이돌 덕질의 역사를 비추는 것 같아서 부끄럽다). 
 

일단 주인공 셋 중에서 가장 의사 같아 보이는 점도 있고, 레지던트 4년 차 때 외과 스텝이랑 사귀면서 청혼을 받는데 갑자기 하루 뽀뽀한 인턴 때문에 마음이 흔들려서 청혼을 미루다가 교통사고가 나는데, 알고 보니 외과 스텝은 간호사랑 바람났고, 근데 또 하필 그 외과 스텝이 지연성 뇌출혈로 멀쩡하다가 한방에 쓰러져 죽은 이래로 난데없이 산속을 헤매다가 잠적해 흉부외과 수련을 돌담병원 응급실(?)에서 받다가 막바지에 그 인턴이 뿅 하고 나타나고 자기는 스키조처럼 죽은 외과 스텝의 환청을 들으면서 손목을 긋다가 김사부에게 무릎을 꿇으며 하필 가장 인기 없는 흉부외과학을 가르쳐달라고 조르는 나름대로 비현실적인 캐릭터이지만, 연기가 워낙 안정적이라서 이 날뛰는 캐릭터를 제법 합당하게 잘 소화한다.​

 

‘낭만닥터 김사부’에서 안정적 연기를 펼치는 서현진.


진지할 때는 진지하게, 의사일 때는 의사답게, 귀여워 보여야 할 때는 귀엽게, 닭살 돋는 대사를 소화할 때는 거부감 없이 새침하게, 어느 지점에서 자신이 시청자들에게 보여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다. 영리한 배우다.
 
한석규의 캐릭터는 대놓고 비현실적인 먼치킨(지나치게 완벽한 캐릭터)이다. 이는 동서고금을 통틀어 먼치킨인 캐릭터가 독자나 시청자에게 쾌감을 주는 원리 때문일 테다. 덕분에 우리나라 드라마에는 재벌 2세나 미래에서 온 초능력자나 싸움 짱짱맨이나 도깨비 같은 것들이 나와야 한다. 그래서 한석규는 12년 수련을 받아야 하는 뻘짓의 트리플 보드를 땄고, 싸움도 잘 하며, 환자 앞에선 정의롭다. 막상 처치하는 거나 말하는 걸 보면 압도적이라는 느낌은 안 들지만, 옆에서 호들갑 떠는 유연석 때문에 더 오그라든다.
 
이 먼치킨의 ‘진정한 의사류’의 숭고한 대사 또한 그렇다. 덧붙여 한석규를 볼 때마다 한석규를 따라 하는 정성호가 연상되는데, 정성호가 얼마나 잘 따라 했는지 한석규가 정성호를 따라 하고 있다는 느낌까지 준다. 역시 배우가 코미디언에게 이미지를 장악당하는 것은 배우에게 안 좋은 영향을 준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일정 부분에서 재생을 중지한 것은 이 극의 결말이 너무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결국 낭만닥터는 낭만적으로 자기 일을 계속 해나갈 것이고, 서현진은 자신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사랑을 쟁취할 것이며, 유연석은 일편단심으로 마음 바치던 여자도 얻고 흙수저를 극복하며 훌륭한 가르침을 받아 거대병원의 숭고한 의사가 될 것이고, 별 목적 없어 보이는 거대병원 병원장의 음모는 분쇄될 것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인생은 이렇게 흘러가지 않지만, 드라마에서의 인생이 이렇게 흘러가지 않을 경우 시청자들은 분개할 것이므로, 극은 필경 이 결말을 만들어가는 변주가 될 것이다.

내 앞에 진짜 굴곡진 인생이 놓여 있는데, 꼭 극중의 정해진 인생이 굴곡을 거쳐 이렇게 일정한 종국으로 흘러가는 모양을 두 눈으로 확인해야 할 필요는 느껴지지 않았다. ‘의사의 일’을 기반으로 인생을 모방한 시청률 20%의 드라마는 이렇게 한계가 있다. 이 극은 ‘의학적 고증’을 제법 충실히 거친, 역시 또 하나의 판타지 물로 기록될 것이다.

남궁인 응급의학과 의사 · ‘만약은 없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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