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예술인 고용보험이 ‘예술인 없는’ 고용보험이 될 것이라던 우려가 점점 현실이 되고 있습니다. 수급 요건은 까다롭고 막상 받는 실업급여 금액도 적어요. 정작 필요한 사람에게는 닿지 않아 그림의 떡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배우, 연주자, 작가도 실업급여(구직급여)를 받을 수 있도록 한 예술인 고용보험이 시행된 지 3년을 앞두고 있지만 여전히 현실과 괴리가 크다는 지적이 나온다. 예술인 고용보험은 고용안전망 사각지대에 놓인 예술인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마련됐다. 수익이 불규칙하고 실업 상태가 거듭되기 일쑤인 예술인들이 실업급여를 탈 수 있도록 한 제도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혼선이 계속되고 있다. 영화, 음악, 출판 등 분야별 산업 환경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다는 비판이 나오면서 실효성에 대한 의문도 커지고 있다.
실용음악 작곡가 20대 A 씨는 한때 예술인도 받을 수 있다는 실업급여를 알아봤지만 음악 활동으로만 월 50만 원 이상 소득이 있어야 하는 조건을 보고 기대를 접었다. 가끔씩 공연 반주자로 서거나 개인레슨을 하지만 정기적이지 않은 용돈벌이에 가깝다. A 씨는 “저작권료 수익은 한 달에 기껏해야 몇만 원이다. 현재는 아르바이트처럼 한 회사에서 계약직으로 일하고 있는데 매일 직장인처럼 생활해야 하니 오히려 음악 활동에 집중하기 어렵다”며 “공연에 반주자로 불러주는 가수들도 형편이 크게 다르지 않아 매번 계약서를 요구할 수도 없는 일”이라고 토로했다.
예술인 고용보험은 2020년 12월 출범했다. 코로나19 확산으로 공연, 연극 등 각종 문화행사가 멈춰서면서 예술인들의 소득이 끊기는 상황이 속출했지만 고용보험 적용 대상이 아닌 예술인들은 실업급여를 받지 못했다. 이와 관련한 논의가 이어졌고 2020년 5월 예술인에게도 고용보험을 적용하는 고용보험법 개정안이 통과되며 첫발을 뗐다. 이후 일러스트레이터부터 조명 스태프와 웹툰 작가까지 포괄하는 예술인 고용보험은 기존 계획보다 6개월 빠르게 시행됐다. 일반근로자 고용보험처럼 필수 가입 형태로, 예술인과 사업주가 반씩 고용보험료를 부담하도록 했다.
#‘월 소득 50만 원 이상’ 기준에 정작 필요한 사람은 못 받아
하지만 “허점이 많다”는 도입 초기의 혼란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제도 시행 3년이 다 돼가지만 정작 무명 가수와 배우, 작가 등은 실업급여를 받기 어려운 실상이 드러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우선 예술인들의 전반적인 소득이 상당히 낮은 데다, 개인 간 현금 거래가 많아 실제 소득을 파악하기 힘들다는 맹점이 현실화됐다. 문화체육관광부 ‘2021 예술인 실태조사’에 따르면 “예술 활동 수입이 없다”고 답한 예술인이 43%에 달한다. 팬데믹 여파로 급증한 수치지만 직전 조사(2018년)에서도 관련 수입이 없거나(28.8%), 연 수입이 500만 원(27.4%)에 그친 예술인이 절반을 넘었던 것을 고려하면 요건 자체가 장벽이 되고 있는 셈이다. A 씨의 경우도 문화예술 용역 계약으로 얻는 월평균 수입이 50만 원 미만이라 고용보험 적용 대상에서 제외된 사례다.
요건을 충족해 보험가입이 되더라도 수급 단계에서 가로막히는 경우도 많다. 실직한 예술인이 실업급여로 불리는 구직급여를 받기 위해서는 2년(24개월) 동안 총 9개월 이상 보험료를 납부한 상태에서 소득이 감소하거나 비자발적인 이유로 이직해야 하며, 휴직·실업 중 적극적으로 재취업 노력을 하면 120일~270일간 구직급여를 받을 수 있다. 기여 기간 측면에서는 실직 전 18개월 중 3개월을 납부해야 하는 직장인들과 차이가 있다.
고용보험 가입을 피하기 위해 최근에는 ‘49만 원 페이’ 같은 꼼수 계약도 기승을 부리고 있다. 하지만 지인 소개 등을 통해 알음알음 일감을 구하는 업계 특성상 “보험 가입은 힘들다”는 사용자의 사정을 무시하기 어렵다. 25년 차 음악가이기도 한 이씬정석 문화예술노동연대 대표는 “돈을 더 많이 받을 수 있는 상황에서도 49만 원 아래로 계약을 맺도록 요구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페이가 60만 원이면 이번 달에 40만 원을 먼저 주고 나머지는 다음 달에 미뤄서 지급하는 식으로 회피한다”며 “수급 요건도 까다로워 해촉증명서 등 갖가지 서류를 만들어가도 소득 없이 돌아오는 경우가 다반사”라고 설명했다.
#영화·드라마 현장선 ‘4대 보험’ 밀어내기 부작용도
예술인 고용보험을 바라보는 영화와 드라마 업계의 시각에 온도 차이도 있다. 최근 영화 제작사들이 OTT 드라마 제작에 뛰어드는데, 예술인 고용보험이 4대 보험의 ‘면피용’이 됐다는 말이 나온다. 같은 인력을 쓰면서도 방송 드라마나 OTT 콘텐츠 제작 상황이 영화보다 열악한 점을 이용해 드라마 제작 시에는 예술인 고용보험을 적용한다는 것. 제작 환경이 언뜻 비슷해 보여도 근로기준법이 통용되지 않는 드라마 제작 현장과 2015년 이후 표준근로계약서를 쓰는 문화가 비교적 자리 잡은 영화 산업 사이에 간극이 있다는 게 업계의 설명이다.
영화 산업을 넘어 드라마 분야에서도 표준근로계약서 문화가 정착하고 촬영현장이 개선되기를 기대하던 관련 예술인들은 실망감을 감추지 않았다.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 관계자는 “건강, 산재, 고용, 연금 등을 보장하는 4대 보험은 20~30대 영화 현장 노동자들의 안전장치였다. 예술인 고용보험이라도 있어야 하는 분야가 있는 반면, 기존의 4대 보험이 더 유리한 예술 산업군도 있는데 이런 현실은 무시된 게 아쉽다”고 말했다.
관련법이 다루는 예술인의 범위 역시 제한적이다. 예술인 고용보험의 대상은 ‘문화예술인’이 아닌 ‘예술인’인데 책 편집·디자인·일러스트 등을 맡는 외주 노동자나 보도 분야 방송작가는 여기서 제외된다. 안명희 출판노조협의회 의장은 “영화나 공연을 만드는 사람은 예술인으로 포함하면서 책을 만드는 과정에선 출판 작가만 예술인으로 인정하고 나머지 인력은 복지 제도에서 배제한 것”이라며 “구체적인 해석을 요구해도 문체부나 예술인복지재단, 근로복지공단 등 관계 기관 모두 명확한답을 내놓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관련 행정 업무를 맡은 기관 내부에서도 난감한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는 전언이다. “계약 형태와 직종이 너무 다양하다 보니 새로운 직종이 등장하면 그때마다 보험 적용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거나 “프리랜서 고용으로 인한 소득인지 사업 소득인지 사업장의 소득을 구분하는 것부터도 어려운 경우가 있다”는 말도 나온다. 현재 예술인 고용보험 가입 증빙 절차 중 하나인 예술활동증명은 한국예술인복지재단에서 담당하고, 고용보험의 가입, 납부, 급여 지급 등은 근로복지공단에서 처리한다.
현재까지 예술인 고용보험에 가입한 예술인은 19만 명이다. 예술계는 제도가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 구체적인 통계를 공개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안 의장은 “어느 분야에서 얼마나 가입하고 급여를 받았는지 세부 정보를 공개하는 게 예술인 고용보험의 사각지대를 줄일 수 있는 출발점”이라고 말했다. 이씬정석 대표는 “시행 3년이면 정책적으로 보완해가야 하는 시기”라며 “지금까지는 제도를 운영하는 행정 당국에서 혼선이 이어지고 있다. 예술 활동을 하는데도 고용보험에 가입되지 못하는 이유를 명확히 정리해 제도 개선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강은경 기자
gong@bizhankook.com[핫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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