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공공기관의 AI 학습용 데이터 구축 사업 과정에서 이정표가 될 만한 저작권 침해 판결이 내려졌다. 국립국어원의 ‘모두의 말뭉치’ 사업에 저작물을 무단 활용당한 저작권자들이 용역사인 웅진과 웅진북센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1·2심 모두 승소한 것.
법원은 전자책을 출판·유통할 권리가 있다고 해서 이를 AI 학습 데이터로 복제·가공할 권리까지 인정되는 것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이를 두고 공공 목적의 데이터 구축 사업이라도 저작권자의 이용허락 없이 저작물을 사용할 수 없고, ‘공정이용’만으로는 이를 정당화하기 어렵다는 점을 재확인한 판결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저작권 논란 끝 손배 책임 인정
서울중앙지방법원 8-3민사부는 출판사 ‘커뮤니케이션북스’ 출간 도서의 저작권자 78명이 웅진과 웅진북센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 항소심에서 지난달 24일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원고들이 청구한 총액 약 550만 원 가운데 약 344만 원의 배상을 인정했다. 앞서 지난해 2월 1심이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선고하자 웅진 측이 항소했으나 항소심도 원심 판단을 유지했다.
이번 소송은 2022년 9월 불거진 ‘국립국어원 말뭉치 사태’에서 비롯됐다. 당시 웅진은 국립국어원과 30억 6000만 원 규모의 ‘문어 말뭉치 원문 자료 수집 사업’ 용역계약을 체결했다. 이후 계열사인 웅진북센에 약 17억 3800만 원 규모의 저작물 공급·정리 용역을 맡겼고, 웅진북센은 2010년에 인수한 전자책 업체 ‘북토피아’의 콘텐츠를 기반으로 원문 자료를 구축·납품하는 역할을 맡았다.
말뭉치(corpus)는 책과 신문기사, 대화문 등을 컴퓨터가 분석할 수 있도록 구축한 언어 데이터베이스다. 국립국어원은 국어 연구와 사전 편찬 등을 위해 이 사업을 추진해왔는데, 최근에는 생성형 AI와 거대언어모델(LLM)의 핵심 학습 데이터로도 활용하고 있다.

말뭉치 사태는 출판계의 집단 반발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출판계는 당시 약 1만 6000종의 전자책이 저작권자 허락 없이 사업에 활용됐다며 저작권 침해를 주장했다. 이후 대한출판문화협회와 국립국어원, 웅진북센은 관련 합의를 체결했지만, 이번 소송은 당시 합의와 별도로 개별 저작권자들이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사건이다.
“AI 데이터 구축도 저작권 원칙 적용”…공정이용 주장도 배척
항소심 재판부는 웅진북센이 북토피아로부터 저작물의 복제·공중송신에 관한 권리까지 포괄적으로 넘겨받았다고 보기 어렵다며 웅진 측의 ‘포괄적 권리 승계’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통상 출판사가 저자와 맺는 계약은 원작 그대로를 출판하거나 전자책으로 제공할 권리에 그칠 뿐, 이를 복제·가공해 별도 상품으로 제공할 권리까지 포함한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취지다.
공정이용 주장에 대해서도 재판부는 “피고들이 주장하는 사정만으로는 사건 저작물의 이용이 저작권법상 공정한 이용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국립국어원의 말뭉치 사업이 공익적 목적으로 시행된 것은 맞지만, 웅진 측이 수행한 용역 계약은 영리적 목적이라는 점, 계약상 ‘저작권자와의 권리 확인 및 이용허락 계약을 체결하고 용역대금의 80% 이상을 저작권 처리비로 집행해야 한다’는 조건이 명시돼 있었지만 원고들의 이용허락을 받지 않은 채 저작물을 가공했다는 점 등이 근거로 제시됐다.
손해액은 전자책 정가의 70%에 인쇄 부수 5부, 저작물별 원고 지분율을 곱하는 방식으로 산정됐다.
이번 판결은 공공기관이 추진하는 AI·언어 데이터 구축 사업에도 일반적인 저작권 원칙이 그대로 적용된다는 점을 확인했다. 재판부는 AI 개발을 위한 데이터베이스 구축 수요가 늘면서 저작물 이용허락 시장이 이미 형성돼 있다는 점도 짚었다. AI 개발이라는 공익적 목적만으로 저작권자의 정당한 이익을 제한하기는 어렵다는 점을 분명히 한 셈이다.
말뭉치 사태 이후 대한출판문화협회와 국립국어원, 웅진북센은 2023년 저작물 이용 기간 단축과 추가 사용료 지급, 운영위원회 구성 등을 골자로 한 합의문을 체결한 바 있다. 합의에 따라 저작물 이용 기간을 단축하고, 이후 이용은 출판사의 선택과 별도 계약에 따르도록 제도를 손질하는 내용이다.
웅진이 상고하지 않기로 하면서 이번 소송은 항소심 판단으로 마무리될 것으로 보인다. 웅진 관계자는 “법원 판단을 존중하며 상고 계획은 없다”고 밝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