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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업 조용한 지배자
① 조선강국 한국이 넘지 못하는 '메이커스 리스트'의 벽

선박 발주 때부터 ‘부품 리스트’ 확정, 중소 신규 기업엔 ‘거대 장벽’… 산업부, 세계 최초 ‘해상실증 전용선’ 띄워

편집자 주
한국은 오랜 기간 ‘세계적 조선강국’ 타이틀을 지켜왔다. 그러나 배 안에 들어가는 핵심 기자재로 눈을 돌리면 얘기가 달라진다. LNG 화물창, 동적위치제어 시스템, 평형수 처리장치 등 선박의 성능과 안전을 좌우하는 분야마다 소수의 해외 기업이 원천기술을 독점하며 사실상 지배자로 군림하고 있다. 이 ‘조용한 지배자’들의 실체와 로열티 제로를 향한 한국 조선산업의 도전을 짚어본다.
HD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 전경. 한국은 조선강국이지만 배 안에 들어가는 기자재들은 주요 글로벌 기업들이 대부분 독점적 지위를 가지고 있다. 사진=HD현대중공업 제공

[비즈한국] 선박을 발주할 때 선주와 조선소가 맺는 건조계약서에는 ‘메이커스 리스트(Maker’s List)’라는 부속 문서가 따라붙는다. 엔진, 프로펠러, 발전기, 크레인, 밸브, 펌프, 항해장비 등 배의 성능과 안전을 좌우하는 주요 기자재별로 선주가 미리 승인한 제조사 목록을 못박아둔 것이다. 

실제 국내 대형 조선사들이 해외 공시자료에 제출한 건조계약서를 보면 부품 선정권이 이미 발주 시점에 리스트로 고정된 경우가 많다. 리스트에 오른 기자재를 조선소가 임의로 바꾸려면 선주의 별도 승인이 필요하다. 즉 어떤 회사의 부품을 쓸지는 용접이 시작되기도 전에 계약으로 확정되는 셈이다.

리스트 등재 여부는 곧 시장 진입권과 같아서, 한 번 등재된 기업은 오랜 기간 안정적 물량을 확보하지만 등재되지 못한 기업은 아무리 품질이 좋아도 견적서조차 내밀기 어려운 구조다.

검증된 부품이 곧 리스크 관리

선주들이 이렇게까지 보수적인 요구를 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부품 결함이 곧바로 거액의 손실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정기용선 계약에는 ‘오프하이어(off-hire)’ 조항이 있어, 기계 고장으로 배가 정상 가동되지 못하면 그 즉시 용선료 지급이 끊긴다. 여기에 수리비, 대체선 투입, 화물 클레임까지 겹치면 손실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글로벌 보험사 알리안츠 커머셜이 지난달 낸 ‘2026 해상안전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전 세계 선박사고 2818건 가운데 절반이 넘는 1505건이 기계 손상·고장에서 비롯됐다. 이는 2위인 선박 충돌(260건)의 6배에 육박하는 규모다. 최근 10년간 누적으로 봐도 기계 고장은 전체 사고의 45%를 차지해 충돌·좌초·화재폭발을 모두 압도하는 압도적 1위 원인으로 꼽힌다.

보험업계에서도 이런 흐름이 감지된다. 노르웨이 해상보험협회(Cefor) 통계를 보면 선체·기계 관련 보험 클레임 비용은 팬데믹 이전보다 30%대 높은 수준이고, 국제해상보험연맹(IUMI)은 향후 5년간 관련 비용이 추가로 오를 것으로 내다본다. 결국 선주 입장에서 ‘조금 비싸도 실적이 검증된 부품’을 고르는 것은 비용이 아니라 리스크 관리이며, 이는 곧 용선료·보험료·중고선 매각가로까지 이어지는 문제다.

실적이 실적을 낳는 구조…해외 기업이 쌓은 ‘이중 장벽’

문제는 이 구조가 신규 업체에는 ‘뚫기 힘든 이중 장벽’으로 작동한다는 점이다. 새 기자재가 시장에 나오려면 먼저 선급의 형식승인을 받아야 하는데, 설계 검토와 시제품 시험, 공장 심사를 거쳐 통상 3~6개월이 걸린다. 그런데 승인을 받았다고 끝이 아니다. 진짜 벽은 그 다음이다. 실제로 배에 실려 문제 없이 운항한 실적, 이른바 ‘트랙 레코드’가 없으면 선주는 여전히 손을 내밀지 않는다.

지난 3월 산업통상부와 한국조선해양기자재연구원(KOMERI)는 세계 최초의 ‘기자재 해상실증 전용선’인 ‘KOMERI 1호’를 진수했다. 국내 기자재 기업들이 제품 개발과 육상 시험을 완료하고도 실제 운항 선박에 탑재된 실적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글로벌 선주들의 선택을 받기 어려운 구조적 어려움를 극복하기 위해서다. 1만 7000DWT급 벌크선인 이 배는 국산 기자재를 탑재하고 실제 항로에 투입돼 ‘운항실적’을 쌓아주는 국가 차원의 실증 플랫폼이다.

산업연구원(KIET)도 ‘조선산업 패러다임 전환의 핵심, 기자재 국산화와 상용화 전략’ 보고서에서 “조선기자재는 선박 탑재 결정에 선주의 영향력이 절대적이며, 실적을 쌓아 신뢰성을 높여야만 메이커스 리스트에 들어갈 수 있다”고 진단했다.

이 구조가 유독 힘겨운 쪽은 규모가 작은 중소기업들이다. 산업연구원은 보고서에서 국내 조선기자재사 상당수가 영세해 연구개발 투자부터 인증·검사, 생산, 마케팅, A/S에 이르는 생애주기 전 단계에서 어려움을 겪는다고 지적한다.

반면 해외 선도 기자재사들은 인수합병과 전략적 파트너십, 글로벌 기업과의 합작을 통해 단계별 약점을 메우며 시장 지배력을 굳혀왔다고 분석했다. 형식승인 하나를 받는 데도 큰 비용과 수개월이 드는데, 그 이후 실적을 쌓기까지 또 다른 시간과 자금이 필요하다 보니, 자본이 부족한 중소 기자재사는 애초에 도전할 엄두를 내기 어렵다. 결국 메이커스 리스트라는 벽은 기술력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 기술력을 실적으로 증명할 때까지 버틸 수 있는 자본력의 문제이기도 한 셈이다.

원천기술 없이는 로열티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실적 없이는 그 원천기술의 벽을 넘을 수 없다. 우리나라는 전 세계 최고 수준의 배를 만든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지만, 그 배에 들어가는 주요 기자재는 글로벌 기업들이 조용히 지배하고 있다.

조선업 조용한 지배자
  • ① 조선강국 한국이 넘지 못하는 '메이커스 리스트'의 벽
    ① 조선강국 한국이 넘지 못하는 '메이커스 리스트'의 벽
김민호 기자

중화학공업·에너지 분야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지속가능한 사회와 삶에 관심이 많습니다.

goldmino@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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