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정부가 ‘피지컬 AI’를 차세대 국가 전략산업으로 육성하는 논의에 속도를 내는 가운데, 향후 5년이 글로벌 주도권을 가를 골든타임이 될 것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AI 모델의 성능 경쟁을 넘어 제조 현장의 데이터와 로봇, AI 반도체까지 연결하는 산업 생태계 구축을 위한 총력전이 필요하다는 주문이다.

모델·데이터·제조 갖춘 ‘풀스택’ 역량 필요
배충식 한국과학기술원(KAIST) 신임 총장은 지난 25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K-피지컬AI 기술 자립으로 여는 대한민국 산업 생태계 대전환’ 세미나에서 “지금부터 5년이 매우 중요하다”며 “아직 현실화되지 않았고 생산성 향상도 크게 표면화되지 않은, 말 그대로 아직 주인이 없는 시간”이라고 말했다.
피지컬 AI는 AI가 화면 속 가상공간에 머무르지 않고 로봇·자율주행차·생산설비 등을 통해 현실 세계를 인식하고 판단한 뒤 직접 행동하는 기술을 말한다. 주변 상황을 감지하는 ‘인지’, 행동 방식을 결정하는 ‘판단·계획’, 실제 움직임을 구현하는 로봇 하드웨어와 제어기술, 이를 고도화하는 데이터 학습이 하나의 순환 구조로 연결된다.
배 총장은 “지금까지 단순화된 명령으로 이뤄졌던 기계 작업이 앞으로는 비정형적이고 예측하기 어려운 돌발 상황에 대응해야 한다”며 “기술 패권은 이미 승자 독식의 시대이고 AI 시대에는 이 현상이 훨씬 더 심해질 수 있다”고 전망했다.
한국이 피지컬 AI 분야에서 우위를 확보하려면 AI 모델뿐 아니라 제조업과 시뮬레이션 도구, 데이터까지 갖춘 ‘풀스택’ 역량이 필요하다는 시각이다. 배 총장은 “모델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제조업이 있어야 하며, 시뮬레이션 툴과 데이터도 있어야 한다”며 “현재는 일부 빅테크 기업만 이런 역량을 갖추고 있지만 제조 강국이라는 한국의 강점을 살려 피지컬 AI에서 1등 자리를 선점해야 한다”고 봤다.
규제 방식의 전환도 과제로 꼽았다. 배 총장은 “포지티브 규제가 있는 상태에서는 풀 수 있는 방법이 없다”며 “우선 규제 샌드박스를 통해 문제를 풀어나가고 장기적으로는 네거티브 규제를 만드는 것이 해법”이라고도 설명했다.
월드모델에서 로봇까지…‘현장 AI’ 구현 과제
피지컬 AI의 기술 구조가 아직 초기 단계라는 점은 국내 기업에 기회이자 과제로 꼽힌다. 대규모언어모델(LLM)은 모델 규모와 데이터, 컴퓨팅 자원을 늘릴수록 성능이 개선되는 이른바 ‘스케일링 법칙’이 자리 잡았지만, 피지컬 AI는 현실 세계의 복잡성 때문에 같은 방식이 통하지 않는다. 로봇이 실제 환경에서 학습할 데이터가 부족하고 최적의 모델 구조도 아직 정립되지 않았다.
최홍섭 마음AI 기술총괄 대표는 이를 해결할 기술로 ‘월드 액션 모델(WAM)’을 제시했다. 월드 액션 모델은 로봇이 현재 상황을 인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앞으로 일어날 변화를 예측해 필요한 행동까지 생성하는 AI 모델이다. 최 대표는 “글로벌 빅테크가 개발한 월드 모델도 아직 부정확한 동작 등 부족한 점이 많다”며 “오히려 월드 모델은 우리가 지금 뛰어들 만한 영역이라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특히 일상생활 데이터와 달리 제조 현장의 데이터는 국내 산업 기반을 활용해 더 빠르게 확보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최 대표는 “제조 현장의 데이터는 한국이 더 잘 모을 수 있다”며 “이번 정부 지원 과제를 통해 앞으로 일어날 일을 상상하고 행동까지 만들어내는 월드 액션 모델을 개발하려 한다”고 밝혔다.
이 모델을 실제 산업 현장에 적용하려면 AI 연산을 담당할 반도체와 이를 움직일 로봇 기술도 함께 필요하다. 정영범 퓨리오사AI 상무는 “자체 NPU 서버로 월드 모델을 구동해 서버 수준에서 성능을 검증하고, 향후 제조 현장과 로봇에 필요한 엣지용 AI 반도체까지 공급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NPU는 AI 연산에 특화된 반도체로, 로봇처럼 전력과 발열 제약이 큰 기기에서 AI를 구동하는 핵심 부품으로 꼽힌다.
박종훈 뉴로메카 대표는 AI 모델 경쟁만으로는 산업 현장에서 요구되는 작업 정확도를 확보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박 대표는 “피지컬 AI를 구현한 로봇의 정밀도는 필요한 학습 데이터의 양을 크게 줄이는 역할도 한다”며 “AI 모델뿐 아니라 이를 실제 움직임으로 구현하는 로봇 하드웨어와 제어 기술도 함께 고도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부도 데이터 확보와 대규모 연구개발 지원에 나선다는 방침이다. 송창종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디바이스AX혁신팀장은 “빅테크들은 자본력을 바탕으로 다양한 시도를 하며 실패 경험을 축적하지만 국내 개별 기업이 이를 감당하기는 쉽지 않다”며 “생태계 단위에서 실패 위험을 분산하고 다양한 시도를 지원하는 R&D 체계로 가겠다”고 말했다.
정부는 범부처 데이터 획득·관리 체계를 구축하고 실제 현장에서 얻기 어려운 실패와 복구 과정의 데이터는 월드 모델을 활용한 합성데이터로 보완할 계획이다. 송 팀장은 “내년부터 대규모 연구개발 지원을 통해 최대한 다양한 시도를 지원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박태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정보통신산업정책관은 “제조업뿐 아니라 돌봄, 농업, 국방 등 다양한 분야에서 피지컬AI가 확산될 것”이라며 “기획재정부, 산업통상자원부, 중소벤처기업부 등 각 부처가 피지컬AI 관련 정책을 올해 반영하고 있는 만큼, 각 기업의 역량을 높일 수 있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