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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가의 소울푸드
‘후르츠 칵테일’ 한혜연 작가의 ‘그 딸기빙수’

현실에서 소재 찾는 ‘내 얘기’ 같은 만화…‘순한 맛과 빨간 맛’ 장르 오가며 창작 “다음 작품은 미스터리”

[비즈한국] “거기가 여기예요.”

스무 해도 더 전쯤 단편집 ‘후루츠 칵테일’을 읽은 뒤로 한여름 명동성당을 지날 때면 딸기빙수 파는 분식집을 찾아 골목마다 들여다보곤 했다. 주영과 미리가 성당 지나 후미진 골목길의 딸기빙수 가게를 찾아가는 만화의 마지막 장면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은 탓이었다. 단것도 찬 것도 즐기지 않지만, 작가가 지어낸 공간인지 지금은 사라진 공간인지 알 수도 없지만 근처를 지나갈 때면 막연히 ‘그곳’을 찾게 되었다.

숙명여대 근처 와플 가게에서 한혜연 작가를 만났을 때, 성당 뒷골목의 그 집을 도무지 찾을 수 없었노라고, 처음부터 없었던 보물섬인지, 어느 순간 사라진 보물선인지 알고 싶다고 물었다. “거기가 여기”라는 작가의 나직한 말에 이 이야기가 그의 만화 같다고 생각했다. 이제 곧 주영과 마리가 땀을 훔치며 문을 열고 들어올 것만 같았다. 앞에 놓인 딸기빙수가 크리스마스트리처럼 빛났다.

한혜연 작가의 ‘후르츠 칵테일’에 나오는 바로 그 딸기빙수. 실제 한혜연 작가가 즐겨 찾는 가게의 메뉴다. 사진=필자 제공

“이번 달도 끝났다”

작가는 숙대 앞과 인연이 적지 않다. 작가가 다닌 고등학교도, 야간자율학습 시간에 몰래 나와 만화를 보던 곳도, 한 시절 자취하던 곳도, 문을 연 이듬해인 1990년도부터 다녔다는 이 와플 가게도 모두 숙대 근처다. 지금은 이천에 머무는 작가가 서울에 들를 때면 수제비와 팥죽으로 유명한 삼청동과 더불어 빼먹지 않고 꼭 찾는 동네다.

와플이 아직 낯설게 여겨지던 시절, 작가는 이 가게에서 와플을 처음 접했다. 이제는 전보다 훨씬 다양한 와플이 메뉴에 있지만 작가는 한결같이 ‘classic’이라고 적힌 ‘버터&잼’ 와플을 고집한다. 반죽을 갓 구워 안쪽에 버터와 사과잼을 펴 바른 한국화된 와플은 촉촉한 식감과 그 풍미가 인상적이었다.

작가가 첫손에 꼽는 딸기빙수 또한 이 집의 대표 메뉴다. 물 얼음을 곱게 갈고 그 위에 설탕에 절인 딸기와 시럽, 연유, 소프트아이스크림을 더한 빙수는 시중의 빙수보다 덜 달고 더 시원한 맛이 있었다.

한혜연 작가가 1990년부터 즐겨 찾는 와플 가게의 와플과 딸기빙수. 한창 활동하던 2000년대 초반에는 한 달 마감을 무사히 마치고 나면 딸기빙수를 먹었다고 한다. 사진=필자 제공

사철 내내 빙수를 파는 지금과 달리 삼십여 년 전에는 여름에만 빙수를 팔았다. 냉장고를 갖추지 못한 자취 살림이지만, 아이스커피를 좋아하던 작가는 이 집에서 매번 딸기빙수를 포장했다고 한다. 그때마다 주인장은 파란색 일제 제빙기로 얼음을 갈아 빙수를 만들고, 남은 얼음을 따로 담아주었는데 작가는 그 얼음으로 아이스커피를 만들어 여름을 났다.

출판만화 작가로 한창 활동하던 2000년대 초반, 매달 40쪽씩 두 건, 총 80쪽 원고를 마감하는 날이면 출판사를 직접 찾아가 원고를 넘기고 이곳에 왔다고 한다. 작품 구상이 안 돼 마감 이틀 전까지 내내 손 놓고 있다가 부리나케 작업해 마감을 맞춘 적도 있다고 하니 그때의 딸기빙수는 무사히 마친 한 달의 자축이었다.

고단한 창작 생활의 반려였던 딸기빙수가 창작의 소재가 된 적도 있다. 어느 자리에서 만난, 자신과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 이 가게의 딸기빙수를 좋아한다고 했을 때 느꼈던 친근감이 글머리에 언급한 ‘후루츠 칵테일’의 주영과 미리로 이어졌다.

일상에 뿌리를 둔 상상력

한혜연 작가가 지난 30여 년 동안 발표한 작품들은 다양한 장르로 분류되지만, 사실주의라는 하나의 토대로 수렴된다. 스스로 작가로서 상상력이 부족하다고 말하는 그는 도서관에서 신문, 수사 노트류의 책들을 탐독하며 만화의 소재를 찾았다. 바이런과 마크 트웨인이 말한 “허구보다 기이한 진실”에서 작가는 자신의 주제 의식으로 나아갈 동력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

여중·여고·여대를 졸업하고 바로 작가가 된 자신의 짧은 사회 경험은 직장 생활을 하는 친구들의 푸념을 밤새워 들으며 채웠다. 구조에 가려진 인간의 삶에 대한 작가의 탐색이 그 밤에 이루어졌다. 작가의 작품은 현실 일상에서 작가 자신이 겪고 접하고 공감한 것들로부터 나아갔기 때문에, 독자들은 낯선 주제에도 낯가림 없이 몰입할 수 있었다. 청강문화산업대학교에 재직 중인 그가 학생들에게 일상의 작은 것, 가장 가까운 관계로부터 시작하는 창작법을 권하는 것 또한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한혜연 작가의 작품은 현실 일상에서 본인이 겪고 접하고 공감한 것들로부터 나아간다. 사진=필자 제공

실제로 작가를 ‘크리스마스 만화가’로 불리게 만든 ‘그녀들의 크리스마스’, ‘어른들의 크리스마스’의 단편들에 대해서 작가는 다른 인터뷰에서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먹으며 고양이들과 뒹굴고 만화를 보는 게 제일 행복하다는 감정의 연장선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처럼 한혜연 작가의 작품들은 장르적 규정이나 지향에 대해 명확하게 설정하고 그리는 것은 아니지만, 매개물을 통해 그동안 세밀하게 관찰하며 기억에 적재해둔 감정들을 꺼내어 엮어낸다.

그냥 만화가

작가는 자신의 손에 잡히는 이야기들을 포착해 키 너머의 세상을 그려냈다. 어떤 시구처럼 한 알 모래에서 세계를 보고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보고자 했다. 따라서 그가 여성으로서 자신과 가깝고 친숙한 소재들에 착안하였어도 눈에 띄는 몇 가지 특징들만 가지고 그의 작품에 ‘여성 만화’, ‘페미니즘 만화’, ‘젠더·퀴어’의 레테르를 붙이는 것은 풍부한 감상의 가능성을 제약하는 성급한 시도일 수 있다. 실제로 작가는 작업을 할 때 주제나 장르를 의식하지 않았고, 출판사로부터 그와 같은 주문을 받은 적 또한 없었다고 한다. 작가 스스로도 ‘여성·페미니즘 만화의 대표적 작가’라는 세간의 규정과 달리 자신을 “그냥 만화가”라고 담백하게 정리한다.

물론 작가의 만화에서 가려진 존재, 충분히 발화되지 못한 주제에 대한 관찰이 심도 있게 시도되고 그것들이 서사로서 이야기된다는 점에서 그의 작품들을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독해할 수 있다. 여성주의 담론의 중심인 이화여자대학교에서 공부한 그의 지적 경험과 성별 구분에 구애받지 않았던 1980~90년대 아마추어 만화동아리의 경험으로부터 그의 만화가 갖는 개성과 지향점 등을 유추할 수도 있다. 그가 칸과 칸 사이에 남긴 홈통(칸새)적 의미에 대해 깊이 있게 분석해야 할 필요가 있다.

‘빵 굽는 고양이’, ‘세화, 가는 길’ 그리고 그다음

‘2024년 오늘의 우리만화’에 선정된 그의 최근작 ‘세화, 가는 길’은 사찰 음식을 소재로 삼는다. 만화는 절의 공양간을 중심으로 세파에 지친 여러 부류 사람의 삶과 치유를 그리는데, 작품에 세심하게 묘사된 부분들에서 알 수 있듯이 작가는 출판사로부터 작품을 제안받고 2년여에 걸쳐 사찰 음식과 불교문화를 공부하며 준비했다. 대부분의 작가가 연재에 돌입하면 배달 음식으로 연명하며 식음에 소홀해지게 되는 게 보통인데, 이 작품을 연재할 때는 다양한 사찰 음식을 직접 만들며 오히려 건강하게 식생활을 챙겼다고 한다.

순한 맛과 빨간 맛을 오가는 한혜연 작가의 다음 작품은 기독교 종말론을 소재로 한 빨간 맛 미스터리가 될 것 같다. 사진=필자 제공

이 작품의 전작인 ‘빵 굽는 고양이’를 준비하면서 제빵사 자격증을 취득하기도 했고, 그 이전에도 딸기빙수를 비롯해 다양한 음식을 작품에 소재로 활용했다. 음식에 특별한 관심이 있는지 작가에게 물었더니 “음식은 일상을 이야기하기에 가장 좋은 소재”라는 답이 돌아왔다.

이렇듯 한혜연의 작품에서 음식은 그 자체가 목적이라기보다는 인물의 일상을 표현하기 위한 매개이며, 인물의 배경과 관계성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기묘한 생물학’의 ‘한성유전’ 편에서는 명절 준비를 여자에게 다 맡겨놓고 정작 음식에는 손도 못 대게 하던 남자들이 누가 넣었는지 모를 독극물로 몰살당한다. 코믹 무크지 ‘밥(BOB)’에도 실렸던 ‘먹이연쇄’ 편의 장면들에 대해 작가는 “밥을 비비는 1분 동안 다른 생명의 시체들을 먹어 치우고 그 생명이 살아있을 때 저장해둔 에너지를 흡수하는 행위에 대해 생각”(작가 후기 중)하며 그렸다고 밝혔다.

다음 작품에 대해 질문하니 작가는 오랜만에-역시나 그의 장기인- ‘빨간 맛’ 미스터리 소재를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기독교 종말론이 소재라고 귀띔하는데, 불교(사찰 음식) 소재의 순한 맛 ‘세화, 가는 길’과 사뭇 다를 그의 작품이 벌써 기대된다.

한혜연 작가는
1969년생으로, 1993년 대원문화사의 ‘터치’ 신인 공모에서 단편 ‘마네킨’으로 데뷔했다. 이후 ‘신 사미인곡’(1995), ‘이브&아담’(1995), ‘M.노엘’(1999), ‘금지된 사랑’(1999), ‘하트 투 하트’(1997), ‘ILLUSION’(1997), ‘아마존–아름다운 마지막 존재’(2000), ‘후르츠 칵테일’(2000), ‘그녀들의 크리스마스’(2002), ‘자오선을 지나다’(2004), ‘애총’(2009), ‘기묘한 생물학’(2010), ‘혜성 같은 소년’(2010), ‘어른들의 크리스마스’(2011), ‘빵 굽는 고양이’(2010) 등을 통해 멜로와 개그, 미스터리 등을 넘나드는 작품을 선보였다.

생물학 전공을 한껏 살린 ‘기묘한 생물학’도 그렇고, 독특한 소재들을 다루지만 어떤 장르, 어떤 소재를 다루든 현실감 있으면서도 담백한 인간관계 묘사를 우선하는 것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작품들은 크게 ‘빨간 맛’과 ‘순한 맛’으로 나눌 수 있다. ‘기묘한 생물학’이나 일제강점기를 휩쓸었던 사이비 종교 백백교 사건을 모티브로 삼은 ‘애총’이 대표적인 ‘빨간 맛’이라면, 크리스마스 단편들이나 웹툰으로 연재한 ‘세화, 가는 길’(2023), ‘빵 굽는 고양이’는 ‘순한 맛’으로 분류할 수 있겠다.

작가는 인터뷰 말미에 근래에 미역의 효능 작가의 ‘아 지갑 놓고 나왔다’와 ‘닭은 의외로 위대하다’를 보며 만화의 ‘궁극’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림이 정교하지 않고, 이야기가 많지 않아도 독자에게 마치 “텔레파시처럼” 메시지를 분명하게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며, 미우라 켄타로의 ‘베르세르크’처럼 그림을 극한의 수준으로 끌어올리지 않아도 만화로서의 전달을 명확하게 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데 감탄했다고 한다. 어쩌면 한혜연 작가는 담백한 그림, 일상적인 대화, 구구절절한 설명 없이 관계와 감정을 전달하는 본인의 창작 방식과 그 작품들이 닮았다고 여겼을지도 모르겠다.

마감이 만화를 그리게 한다는, 천상 연재만화 작가인 그는 2011년부터는 청강문화산업대학교 만화콘텐츠스쿨에 재직하며, 학생들에게 작가로서의 경험과 노하우를 전달하고 있다.
서찬휘 만화칼럼니스트

필자 서찬휘는 만화 칼럼니스트로 만화와 그 주변 문화들의 흐름과 연결고리를 역사적 맥락에서 탐색하고 정리해왔다. 1998년부터 만화 정보 커뮤니티 ‘만화인’을 운영했고 한겨레신문, 일요신문, 인천일보, 국방일보 등 여러 매체에 글을 썼다.

iam@seochanhwe.com
송하원 대안만화 전문서점 홈통 공동대표

필자 송하원은 공공문화개발센터 유알아트 대표로 대안만화 전문서점 ‘홈통’을 운영하고 있다. 문화기획자이자 만화 연구자이며 성공회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겸임교수, 금천문화재단 이사 등을 맡고 있다. 두 사람은 ‘만화가의 소울푸드’에서 한국 대표 만화가들이 사랑하는 음식을 통해 작가의 삶과 작품세계를 함께 들여다보고자 한다.

solchan1986@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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