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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쓸비법
계약은 지켜야 하지만, 바꿀 길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법원은 사정변경을 이유로 한 계약 내용 변경에 인색…해제·해지도 예외적으로 인정

[비즈한국] 기업들은 때론 돈만 가지고는 설명하기 어려운 결정을 한다. 그 속에 숨어 있는 법이나 제도를 알면 그 내막을 더욱 자세히 이해할 수 있다. ‘알아두면 쓸모 있는 비즈니스 법률(알쓸비법)’은 비즈니스 흐름의 이해를 돕는 실마리를 소개한다.

계약을 맺은 후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해 내용을 바꿔야 할 때가 있지만, 법적으로 이를 바꾸기는 쉽지 않다. 사진=생성형 AI 

계약을 맺을 당시에는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져 계약 조건이 한쪽의 목을 조이는 경우가 있다. 금리가 급등하거나, 규제가 바뀌거나, 원자재 가격이 두 배로 뛰는 경우다. 이럴 때 계약 내용을 바꿔달라고 법원에 호소할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쉽지 않다. 우리 법원은 사정변경을 이유로 계약 내용을 사후에 바꾸는 데 매우 인색하다.

길이 없는 것은 아니다. 공정거래법상 거래상 지위 남용 금지 조항에 근거한 분쟁조정이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 대법원은 사정변경의 원칙 자체는 인정한다. 계약의 기초가 된 사정이 현저히 바뀌었고, 계약 당시 이를 예견할 수 없었으며, 계약을 그대로 유지하면 당사자 이해에 중대한 불균형이 생기거나 계약 목적을 달성할 수 없는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계약을 해제·해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대법원 2007. 3. 29. 선고 2004다31302 판결 등). 

그러나 문턱이 높다. 경제 상황 변동으로 손해가 생겼더라도 합리적인 사람이 예견할 수 있었다면 사정변경이 아니고, 계속적 계약이라도 경제적 상황 변화로 불이익이 생겼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 대법원의 입장이다(대법원 2017. 6. 8. 선고 2016다249557 판결). 더구나 판례가 인정하는 효과는 해제·해지다. 계약을 유지하면서 조건만 고쳐달라는 요구가 수용되기는 더 어렵다.

신의성실의 원칙이나 권리남용 금지를 내세우는 주장도 마찬가지다. 법원은 결론이 재판부의 주관이나 재량에 좌우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꺼린다. 명확한 계약 문언을 두고 “신의칙에 반하니 달리 해석해달라”는 주장이 받아들여지는 경우는 드물다. 그래서 변호사들은 상대방 서면에 신의칙이나 권리남용 주장이 등장하면 “더 내세울 논리가 없구나”, “사실상 사건을 놓았구나” 등으로 받아들이곤 한다. 솔직한 실무의 분위기다.

올해 3월 재판소원 제도가 시행되면서 달리 볼 여지가 생긴 것은 사실이다. 확정된 법원 재판도 헌법재판소의 판단을 받을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헌법재판소가 개별 민사 분쟁의 계약 해석까지 들여다보는 일은 극히 예외적이다. 법원의 기조가 달라지리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문제는 구체적 타당성이다. 계약 당시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변화로 한쪽이 도산 직전에 몰렸는데도 “계약은 지켜져야 한다”는 원칙만 되풀이하는 것이 늘 옳은 결론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재량이나 자의적 판단에 기대지 않고 합리적인 기준으로 계약 조건을 바로잡을 방법은 무엇일까.

방법 중 하나는 공정거래법상 거래상 지위 남용 금지 조항(제45조 제1항 제6호)에 근거한 분쟁조정 신청이다. 한국공정거래조정원 공정거래분쟁조정협의회는 불공정거래행위를 둘러싼 분쟁을 조정하고, 조정이 성립하면 조정 조서를 작성한다. 막연한 ‘형평’이 아니라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상대방에게 불이익을 주었는가’라는 법률상 판단 위에서 계약 조건의 조정을 논의할 수 있다는 점이 핵심이다.

계약 내용을 바꾸는 것은 어렵지만 공정거래법상 거래상 지위 남용 금지 조항 등을 이용하면 상황에 따라 계약 조건의 조정이 가능하다. 사진=생성형 AI

한 사례를 소개한다. 한 시행사가 부동산 개발 사업으로 상가 건물을 신축했고, 대형마트가 핵심 임차인으로 입점했다. 그런데 정치권의 규제로 상가 규모를 축소하면서 사업성에 문제가 생겼다. 설상가상으로 계약 당시보다 금리가 크게 올라 기존 임대차 조건만으로는 건물을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이 됐다. 게다가 임대료 지급 조건은 임차인의 운영 방식에 따라 임대료 지급 여부를 좌우할 수 있도록 설계돼 있었다.

임대인은 대형마트가 거래상 지위를 이용해 임대료를 불리하게 정했다며 분쟁조정을 신청했다. 대형마트는 신청인 주장의 인정 여부와는 별개로 원만히 합의할 뜻을 밝혔다. 이 결과가 가능했던 이유는 분명하다. 건물주가 무너지면 임차인인 대형마트도 영업 기반을 잃는다. 또 입점 당시 임대차 조건이 여러 정치적 고려 속에 다소 파격적으로 정해졌다는 점도 부인하기 어려웠다.

소송이었다면 ‘사정변경’과 ‘신의칙’이라는 좁은 문을 두드려야 했을 사안이 공정거래법의 틀 안에서는 합리적 조정의 대상이 된 것이다. 흔히 ‘갑’으로 여겨지는 건물주가 임차인을 상대로 거래상 지위 남용을 주장했다는 점도 특이한 대목이다. 거래상 지위는 계약서상 명칭이 아니라 실질적인 협상력으로 판단한다.

물론 한계도 분명하다. 첫째, 민사 사안과 공정거래법 사안을 가르는 기준의 문제다. 거래상 지위 남용이 되려면 상대방이 거래상 우월적 지위에 있어야 하고, 거래를 시작하거나 이어가는 단계에서 다른 거래처로 바꿀 가능성이 없어야 하며, 이미 투입한 자본을 회수하지 못해 거래에 묶이는 락인(lock-in) 효과가 인정돼야 한다. 이런 요건을 갖추지 못하면 단순한 민사 분쟁에 불과하고 공정거래법의 적용 대상이 아니다. 둘째, 절차상 한계다. 분쟁조정에는 강제력이 없다. 상대방이 처음부터 조정을 거부하면 절차를 이어갈 방법이 없고, 그때는 민사소송이나 공정거래위원회 신고 같은 다른 수단을 찾아야 한다.

그럼에도 이 방법을 권하는 이유는 선례가 있고, 사례가 쌓이면서 논리적 방법론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같은 논리 구조는 다른 분야에서도 볼 수 있다. 건설산업기본법 제22조 제5항은 계약 체결 이후 경제 상황 변동에 따른 계약금액 변경을 상당한 이유 없이 인정하지 않는 등 도급계약 내용이 당사자 일방에게 현저하게 불공정한 경우 그 부분을 무효로 정한다.

부산고등법원은 이 조항을 근거로 “어떠한 경우에도 공사대금을 올릴 수 없다”는 물가변동 배제 특약을 무효로 판단했고, 대법원은 2024년 이 판결을 심리불속행 기각으로 확정했다(부산고법 2023. 11. 29. 선고 2023나50434 판결, 대법원 2024. 4. 4. 선고 2023다313913 판결). 막연한 사정변경 대신 구체적인 법률 조항을 지렛대로 삼았다는 점에서 같은 흐름이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다. 계약서 문구가 발목을 잡는다고 곧바로 포기할 일은 아니다. 신의칙이라는 막연한 호소 대신 사안에 맞는 구체적 법률 조항을 찾아 논리를 세우면 길이 보이는 경우가 많다. 이론과 판례, 법령이 쏟아지는 지금이야말로 그 길을 찾기 좋은 때다.

정양훈 법무법인 바른 파트너 변호사

필자 정양훈은 법무법인 바른 공정거래그룹의 구성원 변호사이다. 공정거래위원회 사건과 컴플라이언스, 하도급·가맹·대리점 등 유통분야 사건을 전문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대한법률구조공단, 서울고등검찰청(국가소송팀) 등을 거쳐 바른에 합류하였으며, 강연과 기고를 통해 공정거래 분야의 이슈와 실무를 알기 쉽게 전달하는데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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