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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 후 소설 쓰던 엔지니어, 히가시노 게이고가 남긴 1억 권의 기적

‘이과’ 특유 논리력으로 추리소설 외연 넓혀…작품 106권서 ‘인간의 선택’ 보여줘

[비즈한국] 일본을 대표하는 추리소설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가 지난 7월 23일 새벽 대장암으로 별세했다. 향년 68세. 일본 출판사 고단샤는 7월 27일 히가시노의 별세 사실을 공식 발표했다. 장례는 가족장으로 치러졌으며 추후 별도의 추모 행사를 열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히가시노는 2026년 8월 5일 출간 예정인 마지막 장편 ‘영원의 기억’을 포함해 단독 저서가 106권에 이른다. 일본 내 누적 발행부수는 약 1억 900만 부이며 작품은 세계 41개 국가·지역에서 출간됐다. 치밀한 트릭과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을 결합해 추리소설의 외연을 넓혔다는 평가를 받는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작품 속에서 범인을 찾아내는 것보다 진실이 드러난 뒤에도 계속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을 끝까지 바라봤다. 그가 남긴 가장 오래된 미스터리는 결국 인간이었고, 독자들은 오래도록 그의 문장 속에서 그 답을 찾게 될 것이다. 사진=생성형AI

자동차 전장 부품 설계하다 소설가로…

히가시노는 1958년 2월 4일 일본 오사카시 이쿠노구에서 태어났다. 오사카부립대에 진학해 전기공학을 전공한 뒤 자동차 부품회사 일본전장(현 덴소)에 입사해 엔지니어로 일했다. 회사에서는 회로와 전장 부품을 설계했고 퇴근 후 소설을 썼다. 공학도의 논리적인 사고방식은 훗날 그의 치밀한 트릭과 빈틈없는 구성의 바탕이 됐다.

그는 1983년 ‘인형들의 집’을 에도가와 란포상에 출품해 2차 심사를 통과했고 이듬해에는 ‘마구’가 최종 후보에 올랐다. 세 번째 소설 ‘방과 후’가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방과 후’는 히가시노가 대학 시절 양궁부 주장으로 활동한 경험을 바탕으로 쓴 책이다. 여자고등학교 양궁부를 배경으로 밀폐된 학교 공간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다룬 이 작품은 1985년 제31회 에도가와 란포상을 받았다.

약 1년 동안 직장과 집필을 병행한 그는 1986년 회사를 그만두고 도쿄로 옮겨 전업 작가의 길에 들어섰다. 이후 1998년 ‘비밀’로 일본추리작가협회상을 받으며 대중적인 인지도를 얻기 시작했다.

이듬해 출간된 ‘백야행’은 그의 작품 세계를 바꾼 전환점이었다. 어린 시절의 살인사건으로 얽힌 두 인물을 중심에 두면서도 이들의 내면을 직접 설명하지 않고 형사와 주변 인물의 시선을 통해 긴 시간을 추적하는 방식을 택했다. 작품은 범죄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긴 시간을 보여주면서 기존 추리소설의 공식을 넘어섰다는 평가를 받았다.

히가시노는 이 시기부터 이른바 ‘사회파 미스터리’에 더욱 무게를 실었다. 본격 추리소설이 수수께끼를 푸는 과정 자체에 집중한다면, 사회파 추리소설은 범죄를 낳은 사회와 인간의 동기를 함께 들여다본다. 그는 현실적 문제를 추리소설 안으로 끌어들여 장르의 폭을 넓혀 갔다.

다섯 번 탈락한 나오키상, ‘용의자 X의 헌신’으로 마침내 수상

히가시노는 데뷔 이후 꾸준히 작품을 발표했지만 일본 문단을 대표하는 문학상인 나오키상과는 좀처럼 인연을 맺지 못했다. ‘비밀’, ‘백야행’, ‘짝사랑’, ‘편지’, ‘환야’ 등이 잇따라 후보에 올랐지만 번번이 수상이 불발됐다.

‘용의자X’의 헌신은 그에게 일본 소설가의 최고 영예인 나오키상을 안겨주었다. 사진 교보문고 홈페이지

오랜 도전 끝에 그가 마침내 나오키상을 안겨준 작품은 ‘용의자 X의 헌신’이었다. 천재 수학자 이시가미가 사랑하는 여성을 지키기 위해 완벽한 알리바이를 설계하고 대학 동창인 물리학자 유가와가 그 진실을 추적하는 이야기다. 치밀한 추리와 인간의 희생, 사랑을 결합한 이 작품은 히가시노의 대표작으로 자리 잡았다.

이 작품으로 히가시노는 나오키상과 본격미스터리대상을 비롯해 ‘주간문춘 미스터리 베스트10’,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본격 미스터리 베스트10’ 등 주요 미스터리 랭킹에서 모두 1위를 차지했다. 영어판은 2012년 미국 미스터리작가협회(MWA)가 주관하는 에드거상 최우수 장편소설 후보에 올랐고, 2019년에는 ‘신참자’가 영국추리작가협회(CWA) 인터내셔널 대거상 후보로 선정됐다. 히가시노는 미국 에드거상과 영국 대거상 후보에 모두 오른 첫 일본 작가로 기록됐다.

이후 그는 2009년부터 2013년까지 일본추리작가협회 이사장을 지냈고, 2014년부터는 나오키상 심사위원으로 활동했다. 2023년에는 일본 문학과 출판문화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제71회 기쿠치칸상을 받았으며 일본 정부로부터 자수포장을 수훈했다.

“범인은 누구인가”보다 “사람은 왜 그런 선택을 할까”에 관심

히가시노의 작품은 한 장르로 규정하기 어렵다. ‘갈릴레오 시리즈’는 과학적 사고를 바탕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본격 추리의 매력을 보여줬고 ‘가가 교이치로 시리즈’는 사건 이면의 가족과 공동체를 깊이 파고들었다. ‘백야행’과 ‘환야’는 인간의 욕망과 계층 이동, 일본 사회의 그늘을 그려낸 사회파 범죄소설로 평가받는다.

2012년 발표한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은 그의 독자층을 추리소설 밖으로 크게 넓혔다. 이 소설은 폐업한 잡화점에 숨어든 세 청년이 과거에서 온 고민 상담 편지에 답장을 보내며 서로 다른 시대의 사람들이 연결되는 이야기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에는 명탐정도 중심이 되는 살인사건도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흩어져 있던 인물과 사건이 마지막에 하나로 이어지는 미스터리의 구조를 따르면서도 결국 사람을 치유하는 이야기로 나아간다. 이 작품은 일본에서 중앙공론문예상을 받았고, 일본과 중국에서 영화로 제작됐다. 한국에서도 오랫동안 베스트셀러를 기록하며 히가시노를 범죄소설 작가로만 알던 독자들에게 또 다른 작품 세계를 보여줬다.

2026년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된 ‘녹나무의 파수꾼’ 역시 같은 흐름에 있다. 그는 생전 “사람을 죽이는 이야기만 쓰다 보면 사람을 살리는 이야기를 쓰고 싶어진다”는 취지로 말한 바 있다. 말년으로 갈수록 그의 작품은 사건 해결보다 상처 입은 사람이 타인과 연결되고 다시 살아가는 과정에 더 큰 비중을 뒀다.

덕분에 독자마다 가장 사랑하는 작품도 달랐다. 추리의 묘미를 좋아하는 독자는 ‘용의자 X의 헌신’을, 사회를 비추는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독자는 ‘백야행’과 ‘편지’를, 따뜻한 위로를 찾는 독자는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대표작으로 꼽았다. 다양한 독자층이 그의 책을 읽게 함으로써 히가시노는 추리소설을 일부 마니아 장르에서 대중 모두가 읽는 이야기로 확장했다.

“많이 쓰기 위해 쓴 것이 아니라 계속 쓰지 않으면 작가로 살아남을 수 없었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100번째 저서 출간 당시 이런 말로 데뷔 시절을 회고했다. 100권이 넘는 작품은 기록을 위한 숫자가 아니라 생계를 위해, 그리고 작가로 남기 위해 쉼 없이 원고를 써 내려간 시간의 결과였다. 

교보문고(왼쪽)과 알라딘(오른쪽)에 마련된 히가시노 게이고 추모 공간. 사진=각사 홈페이지 캡처

한국 독자들도 사랑한 작가…서점가엔 추모 물결

히가시노 게이고가 떠난 뒤 출판계와 독자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그를 추억하고 있다. 일본 주요 서점들은 히가시노의 대표작을 모은 추모 코너를 마련했고, 작품을 다시 찾는 독자들의 발길도 이어졌다.

국내에서도 그의 작품을 기리는 움직임이 이어졌다. 알라딘은 ‘히가시노 게이고 작가님을 추모합니다’ 특별전을 열고 독자들이 작별 인사를 남길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다. 교보문고 역시 추모 기획전을 통해 대표작을 소개하며 그의 작품 세계를 되새겼다. 얼마 전 출간된 그의 소설은 단박에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40년 동안 히가시노가 독자들에게 던진 질문은 단순히 ‘범인은 누구인가’가 아니었다. 사람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죄와 용서는 가능한지, 상처를 안고도 다시 살아갈 수 있는지를 끊임없이 물었다. 그의 새로운 작품은 더 이상 만날 수 없지만 그 질문들은 106권의 책 속에 남아 여전히 독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윤채현 기자

중소·벤처기업과 플랫폼, 콘텐츠 산업을 취재하고 있습니다. 쉽고 재미있게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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