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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쓸비법
‘일단 협조’는 옛말…행정조사 관행이 흔들린다

휴대전화 열람·진술 녹음·자료 제출 범위 등 현장조사 기준 명확화 필요…기업도 조사 단계부터 소송 대비

[비즈한국] 기업들은 때론 돈만 가지고는 설명하기 어려운 결정을 한다. 그 속에 숨어 있는 법이나 제도를 알면 그 내막을 더욱 자세히 이해할 수 있다. ‘알아두면 쓸모 있는 비즈니스 법률(알쓸비법)’은 비즈니스 흐름의 이해를 돕는 실마리를 소개한다.

행정조사는 조사 대상자의 협조를 전제로 하지만 최근 그 관행이 달라지고 있다. 사진=생성형 AI

행정조사의 범위와 한계는 변호사가 공개적으로 거론하기 쉽지 않은 주제다. 조사 현장에서 절차에 이의를 제기해도 받아들여지는 경우는 드물다. 오히려 분위기만 경직되고, 그 부담이 고스란히 의뢰인에게 돌아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서기 때문이다.

이론상 행정조사는 조사 대상자의 협조를 전제로 하는 임의조사다. 그러나 형사 수사처럼 진술거부권을 미리 고지하는 절차는 없다. 영장에 기재된 범위에 엄격히 묶이는 강제수사와 달리, 조사 공문에 기재되는 조사 목적과 범위도 상당히 포괄적인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목적에 의한 제한이 현장에서 실질적인 기준으로 작동하기 어렵다.

현실의 조사 현장은 이론과 거리가 있다. 조사받는 기업이 자료 제출을 거절하기란 쉽지 않다. 거절이 조사 강도의 상승이나 추가 조사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현장에서 흔히 제기되는 이의 사유는 법 위반 혐의와의 무관성, 영업비밀, 개인정보 정도다. 하지만 어느 것도 현장에서 큰 실익을 거두기는 어렵다. 혐의와의 관련성은 조사 공문을 보완해 다시 교부하면 해소된다. 영업비밀이나 개인정보는 그 자리에서 판단하기 어렵다. 결국 일단 자료를 제출하고 나중에 다투거나, 일부를 가린 채 제출하는 선에서 정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그동안 조사 현장이 비교적 원만하게 운영된 데는 이유가 있다. 행정조사의 본질이 피조사자의 협조에 있는 만큼, 조사 과정에서는 조율과 협의가 계속된다. 기업이 일정 수준의 협조를 하면 조사 대상과 범위를 합리적으로 조정하고, 제재도 예측 가능한 범위에서 이뤄진다는 일종의 신뢰가 있었다. 협조와 예측 가능성이 서로 맞물려 돌아가던 구조였던 셈이다.

문제는 이 균형이 흔들리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공정거래위원회의 처분은 과거보다 제재 수위가 상당히 높아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조사·심의 과정에서 협조에 따른 감경의 폭도 예전 같지 않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기업 입장에서 협조의 대가가 불분명해지고 처분이 결국 행정소송으로 이어질 것 같다면, 불리할 수 있는 자료를 적극적으로 제출할 유인은 줄어든다. 변호사로서도 의뢰인에게 협조를 권할 명분을 찾기 어려워진다.

이러한 변화는 이미 법원의 판단 대상이 되고 있다. 공정위는 올해 H 그룹 계열사 간 브랜드(상표권) 사용료와 관련한 부당 내부거래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현장 조사를 실시했다. H 그룹 측은 이 과정에서 조사관이 영장 없이 직원의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를 열람하고, 동의 없이 진술을 녹음하는 등 위법한 방식의 조사가 있었다고 주장하며 자료 제출 명령의 취소소송과 집행정지를 신청했다. 서울고등법원은 지난 9월 집행정지 신청을 인용해 자료 제출 명령의 효력을 일정 기간 정지했다. 기업이 공정위의 자료 제출 명령 자체를 다투는 소송을 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현장에서 행정조사에 대한 협조와 제재 예측 가능성의 균형이 깨지면서 법원 판단에도 이 같은 변화가 반영하고 있다. 사진=생성형 AI

반대의 결론이 나온 사건도 있다. 공정위는 C 사가 할인 비용을 납품업체에 전가했다는 의혹 등 대규모유통업법 위반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현장 조사에 나섰다. 그러나 C 사가 사전통지가 없었다는 이유로 조사에 응하지 않으면서 조사는 무산됐고, 공정위는 현장에서 철수했다.

쟁점은 행정조사기본법 제17조의 사전통지 의무였다. 이 조항은 원칙적으로 조사 개시 7일 전까지 서면으로 통지하도록 하되, 증거인멸 등으로 조사 목적을 달성할 수 없는 경우를 예외로 둔다. C 사는 대규모유통업법이 행정조사기본법의 적용 제외 대상이 아닌 만큼 사전통지 의무를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사 공문의 혐의 기재가 지나치게 포괄적이라는 문제도 제기했다. 

반면 공정위는 대규모유통업법이 공정거래법상 조사 절차를 준용하고 있어 사전통지 의무를 적용하지 않는다는 입장이었다. 서울고등법원은 9월 하순 집행정지 신청을 기각했다. 조사 효력을 멈출 경우 공공복리에 미칠 영향이 더 크다는 판단이었다. C 사는 이에 불복해 재항고했고, 조사 절차의 적법성은 본안 소송에서 따로 다툴 예정이다.

두 사건의 결론은 엇갈렸다. 그러나 공통점은 분명하다. 그동안 관행의 영역에 머물러 있던 조사 절차가 법원의 판단을 받는 쟁점으로 올라섰다는 것이다. 물론 공정위의 입장도 이해할 만하다. 공정위는 현장 조사가 피조사자의 동의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서 형사상 압수수색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강조한다. 공정거래 관련 법률이 경제적 약자의 권익을 지키는 장치라는 점도 강조해 왔다. 조사 개시 여부를 사업자 대응에 좌우해서는 곤란하다는 우려 역시 경청할 만하다. 조사가 실효성을 잃으면 그 피해는 결국 거래상 약자에게 돌아가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는 짚을 필요가 있다. 제재의 무게가 커질수록 그 제재에 이르는 과정의 정당성에 대한 요구도 함께 커진다는 점이다. 과징금이 수십억 원에서 수백억 원에 이르고 협조의 대가가 예측하기 어려워진다면, 기업은 조사 단계에서부터 하나하나 근거를 묻고 소송을 염두에 둔 대응을 할 수밖에 없다. 필자가 만나 본 기업 관계자 중에는 이러한 흐름이 오히려 우리 공정거래법과 행정절차 법제를 한 단계 발전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의 갈등은 제도를 정비할 좋은 기회일 수 있다. 조사 공문에 기재되는 조사 목적과 혐의를 지금보다 구체화하는 일이 그 출발점이 될 수 있다. 휴대전화 등 개인 디지털 기기의 열람·제출에 관한 기준을 명확히 정하는 것, 사전통지 예외 사유의 판단 기준을 정리하는 것, 조사 협조에 대한 인센티브를 예측 가능하게 설계하는 것도 함께 검토할 만하다. 이런 기준이 마련된다면 조사의 실효성과 피조사자의 방어권은 충돌하는 가치가 아니라 함께 지켜질 수 있는 가치가 된다. 기업 역시 조사 대응을 그때그때의 협상이 아닌 준비된 절차로 인식하고, 평소 자료 관리와 대응 체계를 갖춰 둘 필요가 있다.

비공식적인 협의 속에서 조사의 대상과 범위가 정해지던 과거의 관행과, 조사의 단계마다 근거를 묻고 법원의 판단을 구하는 지금의 모습 중 어느 쪽이 더 바람직한지는 단정하기 어렵다. 분명한 것은 하나다. 행정제재의 수위가 높아지고 있다는 소식이 이어지는 한, 기업은 과거와 달리 철저한 준비를 바탕으로 절차부터 다투려 할 것이라는 점이다. 이제는 그 다툼이 소모전이 되지 않도록 규칙을 함께 정비할 때다.

정양훈 법무법인 바른 파트너 변호사

필자 정양훈은 법무법인 바른 공정거래그룹의 구성원 변호사이다. 공정거래위원회 사건과 컴플라이언스, 하도급·가맹·대리점 등 유통분야 사건을 전문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대한법률구조공단, 서울고등검찰청(국가소송팀) 등을 거쳐 바른에 합류하였으며, 강연과 기고를 통해 공정거래 분야의 이슈와 실무를 알기 쉽게 전달하는데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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