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기업들은 때론 돈만 가지고는 설명하기 어려운 결정을 한다. 그 속에 숨어 있는 법이나 제도를 알면 그 내막을 더욱 자세히 이해할 수 있다. ‘알아두면 쓸모 있는 비즈니스 법률(알쓸비법)’은 비즈니스 흐름의 이해를 돕는 실마리를 소개한다.

연예계에서는 전속계약의 효력을 다투는 분쟁이 자주 발생한다. 아티스트가 소속사에 전속계약 해지를 통보하고 법원에 전속계약 효력정지 가처분을 신청하는 것이다. 그러나 가처분은 인용되는 사례가 많지 않다. 가처분은 단기간 내 소명을 완료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쉽지 않기 때문이다. 전속계약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 사건도 어렵긴 마찬가지다. 그런데 최근 상황이 달라졌다. 법원이 정산 의무 불이행을 ‘신뢰 상실’에 의한 전속계약 해지 사유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균열이 발생한 지점은 “적자이므로 수익금을 분배할 것이 없고, 정산 자료를 제공할 필요도 없다”는 기획사 주장이 배척됐다는 점이다. 기획사는 일반적으로 활동 수입보다 지출이 컸으니 배분할 정산금 자체가 없고, 그러니 정산 자료를 제공할 이유도 없다고 주장해 왔다.
이것이 문제가 된 사례로 인천지방법원 부천지원 2022. 5. 20. 선고 2021가합101054, 2021가합104763 판결이 있다. 여성 그룹 멤버 4명이 지속적으로 정산서를 요구했으나 기획사는 수익이 발생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자료 제공을 거절했다. 정산금이 없으니 정산 자료 제공 의무도 없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법원은 기획사 주장을 배척했다. 전속계약이 장기간 계속적 계약이고 고도의 신뢰 관계를 전제로 한다는 점, 정산 자료가 수익 분배의 적정성을 확인하는 핵심 자료라는 점, 연예인이 이를 받지 못하면 매출·비용·공제액과 손익분기점 도달 여부를 확인할 방법이 아예 없다는 점을 들었다. 그리고 실제 지급할 금액이 없더라도 수입·지출 내역과 정산 결과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제공해야 한다고 판시했다. 기획사는 정산금의 존재 여부와 관계없이 매월 정산 의무와 정산 자료 제공 의무를 부담한다는 것이다.
기획사는 뒤늦게 일부 지출 자료를 준비해 제시했다고 다퉜으나 법인 계좌, 개인 계좌, 영수증을 함께 제공했다는 객관적 증거가 없었다. 법원은 충분한 자료를 제공하지 않았다고 보고 연예인들의 계약 해지가 적법하다고 판단했다. 정산금 미지급이 아니라, 정산의 근거를 보여주지 않은 행위 자체가 해지 사유가 된 것이다.
최근 개정 법령도 법원의 판결과 궤를 같이한다. 2022년 한 가수가 18년간 몸담은 소속사로부터 음원 사용료를 제대로 정산받지 못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정산 규정을 손봐야 한다는 요구가 커졌다. 국회는 2024년 9월 대중문화예술산업발전법 개정안을 통과시켰고, 이를 구체화한 시행령 제2조의3이 2025년 4월 23일부터 시행되고 있다.
대중문화예술산업발전법 제14조는 기획사에 소속 연예인별로 기획 업무의 대가와 비용을 분리해 계상·관리하고 회계장부를 작성·비치하도록 정하고 있다. 연예인이 요구할 때는 관련 회계 내역과 지급해야 할 보수에 관한 사항을 지체 없이 제공해야 한다. 그리고 제3자로부터 용역 대가를 받은 경우 원칙적으로 수령일로부터 45일 이내에 계약상 보수를 지급해야 한다.

여기에 더해진 것이 정기 제공 의무다(시행령 제2조의3). 연예인의 요구가 없어도 연 1회 이상, 해당 연예인과 관련된 회계 내역, 그 연예인의 용역 대가로 기획사가 제3자로부터 수령한 금액, 지급해야 하는 보수, 그 보수의 지급 시기를 문서로 제공해야 한다. 제공 방법도 서면 교부(전자문서 포함) 또는 우편·전자우편으로 특정됐다. 사무실로 불러 서류를 열람만 시키고 사본은 주지 않던 방식이 봉쇄된 것이다.
작은 변화 같지만 이로 인해 기울어진 운동장은 어느 정도 바로잡혔다. 종전에는 연예인이 먼저 요구해야 했고, 요구는 곧 소속사와의 대립을 뜻했다. 활동을 이어가야 하는 연예인이 그 부담을 감수하기는 어렵다. 요구가 없어도 제공하도록 바뀌면 연예인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사정은 더 이상 기획사의 방패가 되지 않는다.
그 결과 기획사의 책임이 훨씬 무거워졌다. △회계 분리 △장부 비치 △연 1회 이상 문서 제공 △45일 내 지급이라는 법령상 의무를 부담하고, 또한 전속계약 위반에 따른 민사 책임을 부담하게 됐다. 실무적 리스크는 후자가 더 큰데, 자료를 주지 않은 사실만으로 성장 중인 아티스트를 통째로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대신 소속 연예인이 보호받는 범위가 넓어졌다. 종전에 연예인이 가진 무기는 사실상 계약서 한 장뿐이었고 정산 조항은 대개 추상적이었다. 지금은 법령에 제공 항목과 주기, 방법을 정해 뒀고, 판례로 내용의 수준을 보완했다. 정산 구조를 확인할 권리가 협상의 대상에서 법적 권리로 옮겨 온 셈이다. 협상력의 비대칭이 오랫동안 고착됐던 분야라는 점을 생각하면 분명한 진전이다.
다만 다소 걱정되는 점이 있다. 앞서 나열한 법령 및 계약상 의무는 대형 기획사에 이미 갖춰진 인프라이거나, 없더라도 예산으로 해결되는 문제다. 회계팀이 있고 정산 담당자가 있으며 외부 회계법인이 붙어 있다. 새 의무가 생기면 프로세스에 한 줄을 더하면 된다.
문제는 아티스트 서너 팀을 데리고 대표가 매니저 역할까지 겸하는 회사다. 아티스트별로 장부를 분리하고 정산서를 만들어 연 1회 발송하고 그 기록을 남기려면 사실상 사람을 새로 두거나 외부 용역을 써야 한다. 매출 규모를 생각하면 가벼운 고정비가 아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어떻게 될까. 컴플라이언스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회사와 그렇지 못한 회사 사이의 격차가 벌어질 것이다. 아티스트 입장에서도 정산이 투명한 곳을 택하는 것이 합리적이므로, 신인 영입 경쟁에서 대형사가 한 번 더 유리해진다.
산업의 활력이 어디에서 나왔는지를 생각하면 우려는 어느 정도 근거가 있다. 지금의 K팝 산업은 소수의 대형사만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무모해 보이는 기획으로 시작한 작은 회사들이 시장의 저변을 넓혔다. 보호의 수준을 높이는 일이 보호받을 연예인이 속할 회사의 수를 줄인다면, 그것도 역설이다.
그렇더라도 기획사가 할 일은 분명하다. 규제가 강화된 뒤에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아티스트별로 장부를 분리하고 정산서 양식을 만드는 것이다. 늘 그렇듯 미리 준비하는 데 드는 비용은 그것을 하지 못해 치르는 소송비용에 비하면 언제나 더 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