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미국 팹리스(반도체 설계 전문) 기업 브로드컴이 삼성전자에 핵심 부품 공급을 끊어 3년간 매년 7억 6000만 달러(약 1조 1000억 원)어치를 구매하도록 한 행위에 대해 대법원이 공정거래법 위반 판단을 확정했다. 대체하기 어려운 핵심 부품의 공급망 의존도를 협상력으로 이용해 고객사의 구매 선택권을 제한하고 경쟁사 제품 채택을 막은 행위에 제동을 걸었다는 평가다.
부품 재고 2~4주뿐인데 공급 중단 압박
지난달 27일 대법원 1부(주심 천대엽 대법관)는 브로드컴 미국 본사와 국내 법인 등 4개사가 공정거래위원회를 상대로 낸 시정명령 및 과징금 납부명령 취소 소송에서 대법관 전원 일치 의견으로 상고를 모두 기각했다. 이에 따라 공정위가 부과한 과징금 186억 6400만 원과 시정명령이 확정됐다. 브로드컴은 공정위 제재 직후인 2023년 11월 행정소송에 나섰지만 2심에 이어 대법원에서도 패소했다.

이번 사건에서 문제가 된 부품은 스마트폰의 무선 주파수 신호를 처리하는 무선 주파수 프런트엔드(RFFE)와 와이파이·블루투스 연결을 담당하는 커넥티비티 부품이다.
당시 삼성전자는 스마트 기기에 들어가는 관련 부품 구매액의 90% 가까이(2019년 기준)를 브로드컴에 의존했다. 삼성전자가 보유한 관련 부품 재고는 통상 2~4주분에 불과했는데 새로 주문하더라도 공급까지 12주 이상 걸릴 수 있었고 제품 설계와 인증을 마친 부품을 다른 업체 제품으로 교체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특히 당시 갤럭시 S20 출시를 앞둔 삼성전자로서는 부품 공급이 끊길 경우 신제품 생산과 완제품 생산라인 가동에 차질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브로드컴은 2019년 삼성전자가 경쟁사 부품을 일부 채택하자 장기구매계약(LTA) 체결을 추진했다. 이후 2020년 2월 14일부터 삼성전자의 구매주문 승인을 중단했고, 같은 해 3월 5일에는 선적과 생산, 일부 기술지원까지 멈췄다.
삼성전자가 3월 13일 플래그십 스마트폰에 브로드컴 부품만 쓰겠다고 약속한 뒤에도 브로드컴은 공급을 재개하지 않고 폴더블폰까지 대상에 넣으라고 요구한 것으로 파악됐다. 이에 삼성전자는 막 출시한 갤럭시S20 등의 생산 차질을 우려해 3월 27일 계약에 서명했다.
계약에 따라 삼성전자는 2021년부터 3년간 매년 브로드컴 부품을 최소 7억 6000만 달러어치 구매해야 했다. 여기에는 약정 물량에 미달하면 차액을 배상하는 조건도 포함됐다. 삼성전자는 계약을 이행하기 위해 경쟁사 부품 채택 계획을 접고 다음 해 물량까지 미리 사들였다. 계약이 2021년 8월 조기 종료되기까지 약정 이행을 위해 사들인 부품은 7억 8000만 달러 규모에 이른다.

공정위가 확보한 내부자료에는 브로드컴 측이 공급 중단 조치를 ‘핵폭탄’에 비유하거나 “우리 전략은 기업윤리에 반한다”, ‘협박’ 같은 표현으로 스스로 문제를 인식한 정황도 담겼다. 브로드컴은 장기계약 체결 당일 구매주문 승인과 선적, 기술지원 등의 제한 조치를 해제했다.
삼성이 더 큰데?…“교체 어려운 부품 공급 중단, 거래상 지위 남용”
대법원은 브로드컴이 “부품의 공급을 임의로 중단하는 매우 이례적인 수단”으로 삼성전자에 장기계약 체결을 강제했다는 원심 판단에 법리 오해가 없다고 봤다. 최소구매와 차액배상 조건이 삼성전자의 부품 선택권을 제한하고 경쟁사 제품 채택 계획을 취소·축소하거나 다음 해 물량을 미리 구매하도록 한 점도 판단 근거가 됐다. 거래상 지위 남용에 해당하는 ‘불이익 제공’이 인정되려면 상대방에게 다소 불리한 조건을 제시했다는 사실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전제도 확인했다.
브로드컴은 계약이 자발적·호혜적으로 체결됐고, 사업 규모가 훨씬 큰 삼성전자를 상대로 우월적 지위에 설 수 없었다고 주장했지만, 법원은 부품을 바꾸는 데 상당한 시간과 막대한 비용이 드는 점을 들어 브로드컴의 거래상 지위를 인정했다. 구입 강제 등과 동일시할 수 있을 정도로 거래상 지위를 부당하게 이용해 불리한 조건을 설정하고, 정상적인 거래관행에 비춰 공정한 거래를 저해할 우려가 있어야 한다는 취지다.
더 저렴한 경쟁사 부품 대신 브로드컴 제품을 사느라 삼성전자가 추가로 부담한 비용 최소 1억 6000만 달러도 불이익으로 인정됐다.

삼성전자가 계약에 따라 실제 구매한 RFFE·커넥티비티 부품 매출을 과징금 산정의 관련매출액에 포함한 원심 판단도 정당하다는 판단이다. 공정위는 여기에 부과율 상한인 2%를 적용했다.
미국 소송은 ‘조용한 합의’로 끝나…유럽서도 ‘배타 계약’ 도마
공정위는 경쟁사 퀄컴의 신고로 2020년 6월 조사에 착수했다. 브로드컴이 신청한 동의의결 절차가 진행됐으나, 2023년 6월 공정위는 200억 원 규모 상생기금 등을 담은 최종안을 피해 구제가 미흡하다며 동의의결안을 기각하고, 같은 해 9월 브로드컴에 시정명령과 과징금을 부과했다. 동의의결은 기업이 내놓는 일종의 자진 시정 방안으로, 공정위가 이를 받아들이면 위법 여부를 확정하지 않고 사건을 종결하는 제도다.
삼성전자가 미국에서 별도로 제기한 민사소송은 합의로 마무리됐다. 삼성전자는 2024년 7월 캘리포니아 북부지방법원에 브로드컴의 부품 공급 제한이 반독점법 위반에 해당한다며 소송을 제기했으나, 같은 해 11월 자진 취하했다. 양 사는 모든 소송을 해결했다는 공동 입장을 밝혔지만 구체적인 합의 조건은 공개되지 않았다.
브로드컴의 계약 관행을 둘러싼 논란은 다른 부품시장으로도 번졌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와 미국 연방거래위원회(FTC)는 2020~2021년 셋톱박스·광대역기기용 반도체 시장에서 각각 경쟁사 제품 채택을 제한하는 브로드컴의 배타적 계약 관행을 문제 삼아 시정 약정과 동의명령을 확정한 바 있다.
국내에서도 공정위는 2025년 9월 셋톱박스 제조사에 자사 시스템반도체(SoC)만 사용하도록 요구한 별도 사건에서 동의의결안을 확정했다. 브로드컴은 130억 원 규모의 상생기금을 지원하고, 경쟁사와 거래하려는 제조사에 불이익을 주거나 부품 수요의 과반을 구매하도록 강요하지 않기로 했다. 다만 이 사건은 위법성을 확정한 이번 삼성전자 사건과 달리 동의의결로 종결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