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AI(인공지능) 대전환 시대에 접어들면서 국내외 투자 자금이 AI 인프라와 반도체, 로보틱스 등 단기 수익 가시성이 높은 첨단 테크 섹터로 쏠리고 있다. 긴 호흡과 높은 임상 실패 리스크를 감내해야 하는 바이오 섹터를 향한 투자 심리는 과거에 비해 한층 위축됐다는 평가가 나올 수밖에 없다. 하지만 바이오 투자 시장이 냉각됐다고 해서 모든 바이오텍이 자금 절벽에 직면한 것은 아니다.
자본시장의 유동성이 줄어들면서 단순히 파이프라인의 성장 잠재력만으로는 더 이상 투자 유치가 힘들어지고 있다. 반면 글로벌 시장에서 검증된 정량적 임상 데이터와 명확한 상업화 가능성을 보여준 기업에는 대규모 자금이 유입되고 있다.
결국 바이오 시장의 투자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 과거처럼 섹터 전반에 뭉칫돈이 흘러들던 유동성 장세에서 벗어나, 기술수출과 임상 성과 등 객관적인 검증 결과를 갖춘 소수 기업으로 자금이 집중되는 선별 투자 시대가 본격화하고 있다.
대기업의 자본 우산이나 당장의 흑자 실적이 없더라도 글로벌 빅파마의 선택을 받고 기술력을 입증한 바이오텍에는 국내외 기관투자자의 관심이 이어지고 있다. 이와 달리 아직 기술이나 사업성을 시장에 충분히 증명하지 못한 기업과의 자금 격차는 갈수록 벌어지는 모습이다.

기술수출과 플랫폼 경쟁력…기관이 먼저 찾는 바이오
최근 얼어붙은 시장에서도 손쉽게 대규모 자금을 조달하며 기업가치를 끌어올린 선두 바이오텍에는 공통점이 있다. 하나의 신약 후보물질에만 기대는 게 아니고 여러 파이프라인으로 확장할 수 있는 플랫폼 기술을 확보하고, 이를 글로벌 제약사와의 기술수출이나 공동개발 등 구체적인 사업 성과로 연결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주자는 알테오젠이다. 알테오젠은 정맥주사(IV) 제형을 환자가 자가 투여할 수 있는 피하주사(SC) 제형으로 변경하는 인간 히알루로니다제 플랫폼 ‘ALT-B4’를 앞세워 글로벌 제약사들의 구애를 받고 있다.
특히 연간 30조 원 이상의 매출을 올리는 글로벌 1위 면역항암제 ‘키트루다’ SC 제형 개발에 ALT-B4이 활용되면서 플랫폼의 상업적 가치가 높아지고 있다. ALT-B4가 MSD(머크)의 키트루다SC(제품명 ‘키트루다 큐렉스’)의 상업화 및 특허 방어 전략의 핵심 열쇠로 자리잡으면서 알테오젠은 MSD뿐만 아니라 산도스, 인타스, 아스트라제네카 등 글로벌 빅파마에 잇따라 기술수출 계약을 체결했다. 이를 통해 미국 할로자임과 함께 SC 제형 전환 플랫폼 시장을 주도하는 키플레이어로 도약했다.
올릭스도 독자적인 자가전달 비대칭 RNAi(RNA 간섭) 플랫폼 기술을 바탕으로 글로벌 시장의 주목을 받고 있다. MASH(대사이상 관련 지방간염), 비만, 탈모, 황반변성 등 미충족 의료 수요가 높은 질환군으로 파이프라인을 확장하고 있다. 이를 통해 글로벌 화장품 기업 로레알로부터 탈모 및 스킨케어 신소재 관련 전략적 지분투자(SI)와 공동 연구를 유치했고, 한중 합작 파트너사 등 글로벌 제약사들에 플랫폼 기술이전을 잇따라 성사시키며 플랫폼 사업 모델을 구축하고 있다.
에이비엘바이오는 뇌혈관장벽(BBB)을 투과해 약물을 뇌 내부로 전달하는 ‘그랩바디-B’와 면역항암 이중항체 플랫폼인 ‘그랩바디-T’ 등을 앞세워 글로벌 빅파마와 협력을 확대하고 있다.
2022년 사노피에 파킨슨병 치료제 ‘ABL301’을 1조 3000억 원 규모로 기술수출한 것을 시작으로 2025년 4월에는 GSK에 그랩바디-B를 총 4조 1104억 원 규모로, 같은 해 11월 일라이릴리에 그랩바디 플랫폼을 최대 3조 7487억 원에 기술수출하며 플랫폼 기술의 경쟁력을 입증했다. 이 과정에서 일라이릴리로부터 약 220억 원 규모의 전략적 지분투자까지 유치하며 글로벌 빅파마와 사업적 결속력까지 강화하고 있다.
플랫폼의 확장성을 인정받으면서 자금조달도 용이해지고 있다. 에이비엘바이오는 KDB산업은행, 에이티넘인베스트먼트, 한국투자파트너스 등 기관투자자들을 대상으로 1400억 원 규모의 제3자 배정 유상증자를 진행해 후속 임상 파이프라인을 독자 완주할 실탄을 마련했다.

리가켐바이오도 최근 차세대 항암제로 떠오르고 있는 ADC(항체-약물 접합체)의 핵심 요소인 링커·페이로드 개발 플랫폼 ‘콘쥬올’을 기반으로 얀센, 다케다 등 글로벌 빅파마와 대규모 기술이전 계약을 잇따라 성사시켰다.
이러한 플랫폼 경쟁력은 2024년 1월 오리온그룹(홍콩 소재 오리온 계열사 팬오리온코퍼레이션)으로부터 5500억 원 규모의 대규모 지분 투자를 이끌어내는 기반이 됐다. 여기에 지난 6월에는 국민성장펀드로부터 5000억 원 규모의 직접 지분투자를 승인받으며 대규모 자금 조달 기반을 추가로 확보했다.
리가켐바이오는 확보한 자금을 단순한 운영자금이 아니라 후속 임상개발과 파이프라인 확대에 활용하며 사업 구조를 장기적으로 전환하고 있다. 채제욱 리가켐바이오 수석부사장은 지난 7월 글로벌 R&D Day 2026 행사에서 “지속적으로 기술이전을 하면서도 임상 2상이나 후기 단계로 진입하는 파이프라인 숫자를 늘리겠다”며 “임상 후기 단계에서 기술이전하면 지금보다 훨씬 더 규모나 부가가치 측면에서 큰 기술이전이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자금이 필요한 기업과 투자하고 싶은 기업은 다르다
이 기업들이 처음부터 투자자들의 선택을 받은 것은 아니다. 오랜 시간 연구개발과 임상이라는 인고의 세월을 견디며 기술력을 입증하고 사업 성과를 만들어냈다. 글로벌 제약사와의 기술수출 등 굵직한 성과를 통해 시장의 신뢰를 얻으면서 비로소 자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한번 튼 자금조달의 물꼬는 후속 투자와 연구개발로 이어지고 있다. 글로벌 시장에서 기술력을 검증받고 이를 기술수출해 확보한 자금을 다시 후속 임상과 파이프라인 개발에 투입하면서 기업가치를 높이는 ‘기술 검증→자금 유입→후속 개발→추가 가치 창출’의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진 것이다.
결국 투자자 입장에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좋은 기술을 가진 기업이 아니다. 그 기술이 실제 시장에서 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얼마나 구체적으로 증명했느냐가 투자 판단을 가르는 핵심 기준이 되고 있다.
특히 글로벌 제약사와 협업은 대표적인 외부 검증 수단으로 꼽힌다. 기술수출 과정에서 글로벌 제약사가 기술의 경쟁력과 사업성을 직접 검토하고 계약을 체결했다는 사실 자체가 시장에서 일종의 기술 검증으로 작용한다. 여기에 계약금과 마일스톤까지 확보하면 후속 연구개발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할 수 있어 기술 검증과 자금 조달을 동시에 달성하게 된다.
이 같은 성과는 후속 자금조달 마중물로도 작용한다. 연구개발에 재투자할 여력을 확보해 임상 단계가 진전되면 다시 추가 기술수출이나 전략적 투자 유치로 이어질 가능성이 커진다. 투자자 입장에서도 이미 일정 수준의 기술력과 사업성을 확인한 기업에 추가 자금을 투입하는 것이 투자 위험을 낮출 수 있는 선택이다.

반면 아직 임상 데이터나 기술수출 등 외부에서 확인할 수 있는 성과를 충분히 확보하지 못한 기업은 아무리 유망한 기술을 보유하고 있더라도 투자자를 설득하기 쉽지 않다.
바이오투자 시장이 냉각될수록 이 같은 차이는 더욱 선명해진다. 투자자는 자금이 필요한 기업보다 이미 시장에서 성공 가능성의 일부를 증명하고, 추가 자금이 투입됐을 때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 기업을 찾기 때문이다.
선별 투자 흐름은 외국인 투자에서도 확인된다. 지난 26일 기준 알테오젠(15.22%)과 에이비엘바이오(13.24%), 리가켐바이오(11.88%), 올릭스(9.65%) 등의 외국인 지분율은 두자릿수에 달한다. 글로벌 빅파마와의 기술수출과 플랫폼 경쟁력을 통해 사업성을 입증한 기업에 국내 자금뿐 아니라 글로벌 투자자들의 관심도 이어지는 것이다.
지금의 바이오 투자 시장에서는 돈이 필요한 기업과 투자하고 싶은 기업 사이의 간극이 커지고 있다. 시장이 요구하는 것은 막연한 성장 가능성이 아니라 기술수출, 임상 데이터, 글로벌 파트너십 등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성과다. 이러한 검증을 통과한 기업에는 자금이 다시 자금을 부르는 선순환이 작동하지만, 그렇지 못한 기업에는 투자 한파가 더욱 가혹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