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모든 바이오기업이 동등한 조건에서 출발하는 것은 아니다. 대기업의 자본력을 등에 업은 계열사나 이미 제품을 통해 현금을 벌어들이는 선두 기업은 자본시장이 얼어붙어도 연구개발(R&D)을 이어갈 여력이 있다. 반면 자체적인 현금창출원이 없는 중소 바이오벤처는 임상 단계가 올라갈 때마다 자금을 새로 확보해야 한다. 투자시장이 위축되면 연구개발을 지속할지, 파이프라인을 포기할지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기도 한다.
실제 국내 바이오업계에서는 장기간 자금을 투입할 수 있었던 대기업 계열사가 신약 개발과 상업화에 성공해 다시 새로운 연구개발에 투자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드는 반면, 중소 바이오기업은 매출보다 막대한 연구개발비를 감당하며 외부 자금 조달에 의존하는 양극화가 뚜렷해지고 있다. 결국 신약 개발의 성패를 가르는 것은 기술력뿐 아니라 그 기술이 결실을 맺을 때까지 버틸 시간을 살 수 있는 ‘돈’이다.
SK그룹 뚝심이 SK바이오팜·SK바이오사이언스 결실로
자본시장의 냉각기에도 R&D 투자를 멈추지 않는 바이오기업 가운데 대표적인 곳이 SK바이오팜이다. 대기업의 장기적인 자본 지원을 바탕으로 신약 개발을 지속했고, 이후 자체 제품의 매출을 통해 현금창출력을 확보하면서 다시 R&D에 투자하는 선순환 구조를 구축했다.
SK바이오팜은 뇌전증 치료제 세노바메이트(미국 제품명 엑스코프리)를 독자 개발해 미국 시장에서 성과를 내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SK바이오팜은 2001년 세노바메이트 연구를 시작해 2005년 임상에 진입했고, 글로벌 임상 3상을 거쳐 2019년 미국 식품의약국(FDA) 승인을 받았다. 연구 착수부터 미국 허가까지 약 18년이 걸린 셈이다.

투입된 자금도 적지 않았다. SK바이오팜의 연결 기준 연구개발비는 2019년 1772억 원, 2020년 1091억 원, 2021년 1148억 원에 달했다. 미국 출시 이후에는 현지 직접판매 조직 구축 비용까지 더해지면서 2020년 영업손실은 2395억 원까지 확대됐다.
이 과정에서 SK그룹의 장기적인 지원이 든든한 버팀목이 됐다는 게 업계 안팎의 평가다. 단기간에 투자금을 회수해야 하는 일반적인 바이오벤처와 달리 수년간 대규모 적자를 감수하면서도 개발과 상업화를 이어갈 수 있었던 배경이다.
현재 SK바이오팜은 엑스코프리의 미국 매출을 바탕으로 자체적으로 현금창출력을 확보해 방사성의약품 치료제(RPT), 표적단백질분해(TPD) 등 새로운 성장동력 모색에 투입할 수 있는 선순환 구조를 구축했다.
SK바이오사이언스도 SK그룹의 자본력을 활용해 기틀을 다졌다. 현재의 백신 사업은 SK케미칼이 2001년 백신·혈액제 사업을 하던 동신제약을 인수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이후 SK케미칼은 2005년 백신 R&D센터를 구축하고 2012년에는 안동 L하우스를 완공하는 등 연구개발과 생산 인프라에 지속적으로 투자했다. 이 같은 투자를 바탕으로 2015년 세포배양 3가 독감백신 ‘스카이셀플루’, 2016년 세계 최초 세포배양 4가 독감백신 ‘스카이셀플루4가’, 2017년 대상포진 백신 ‘스카이조스터’, 2018년 수두백신 ‘스카이바리셀라’ 등을 차례로 출시하며 자체 백신 포트폴리오를 완성했다.
이렇게 축적한 백신 사업은 2018년 SK케미칼에서 물적분할돼 SK바이오사이언스로 출범했다. 동신제약 인수에서 독립적인 백신 전문기업 출범까지 17년이 걸린 것이다.
SK바이오사이언스는 이후 자체 백신 개발에 더해 글로벌 협력을 확대했고,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며 백신 CDMO 사업에서도 경험과 네트워크를 확보했다. 최근에는 차세대 폐렴구균 백신을 비롯해 mRNA(메신저 리보핵산), CGT(세포·유전자치료제) 등으로 사업 영역을 넓히고 있다
SK바이오팜과 SK바이오사이언스는 방식은 다르지만 장기적인 자금 투입을 통해 사업 기반을 다진 뒤 이를 바탕으로 다시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연결한다는 특징을 보여준다.
LG·삼성도 모기업 자본력으로 신약·바이오시밀러 연 매출 1조 넘겨
중소 바이오벤처가 수천억 원 규모의 자금을 단독으로 마련해 해외 기업을 인수하거나 글로벌 임상을 확대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반면 대기업 계열 바이오 사업은 기존 사업에서 발생하는 현금과 모기업의 투자 여력을 함께 활용할 수 있다.
LG화학 생명과학본부는 모기업의 자본력과 기존 사업에서 발생하는 현금흐름을 동시에 활용하는 또 다른 사례다.

LG생명과학은 2017년 LG화학에 흡수합병되면서 LG화학 생명과학본부로 편입됐다. 이후 당뇨병 치료제 제미글로와 성장호르몬 유트로핀 등 기존 제품의 안정적인 매출을 기반으로 사업 규모를 키우는 동시에 LG화학의 자본력을 활용할 수 있는 구조를 갖췄다.
특히 LG화학은 2023년 미국 식품의약국(FDA) 승인 신장암 치료제 ‘포티브다’를 보유한 바이오기업 아베오를 약 5억 6600만 달러(7300억 원)에 인수하는 대규모 투자를 통해 항암제 사업의 글로벌 상업화 역량을 확보했다. 지난해 LG화학 생명과학 사업부문이 기록한 매출은 1조 3454억 원이다.
삼성바이오에피스도 대기업의 자본 지원을 바탕으로 초기 연구개발과 임상에 필요한 시간을 확보한 뒤 자체적인 수익 기반까지 구축한 대표적인 사례다.
삼성바이오에피스는 2012년 삼성바이오로직스와 미국 바이오젠의 합작법인으로 설립된 바이오시밀러 기업이다. 하지만 초기에는 연구개발과 글로벌 임상 비용 부담으로 2018년까지 적자를 이어갔다. 그럼에도 이 기간 삼성그룹으로부터 약 1조 원 규모의 유상증자 지원을 받아 초기 사업 기반을 구축했다.
삼성그룹의 지원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2022년 바이오젠이 보유하던 삼성바이오에피스 지분 전량을 약 23억 달러(2조 7655억 원)에 인수해 100% 자회사로 편입했다. 이후 자가면역질환과 항암제뿐 아니라 안과, 혈액·신장, 내분비 분야로 바이오시밀러 제품군을 확대하며 글로벌 바이오시밀러 기업으로 성장했고 지난해 매출 1조 6619억 원, 영업이익 3799억 원을 기록했다.
대기업 인수에 숨통 튼 바이오…기술에 시간을 더하다
대기업과의 결합이 바이오기업의 자금 구조를 바꾼 대표적인 사례로는 리가켐바이오사이언스가 꼽힌다.
리가켐바이오는 ADC(항체-약물접합체) 플랫폼 분야에서 높은 기술력을 인정받았지만 신약 후보물질의 후기 임상 비용을 감당하기에는 자금 여력이 제한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신성장동력으로 바이오사업을 점찍은 오리온이 약 5500억 원 규모의 투자를 통해 리가켐바이오의 최대주주가 됐다. 이 자금으로 리가켐바이오는 자체 ADC 신약을 개발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이 밖에 CJ제일제당의 지원을 받는 CJ바이오사이언스, OCI홀딩스 품에 안긴 부광약품, 엠투엔을 최대주주로 둔 신라젠 등은 자본력을 갖춘 모기업 품에서 연구개발에 매진하고 있다. 바이오 투자 한파 속에서 생존을 걱정하는 중소 바이오기업과 달리 시장 환경에 흔들리지 않고 R&D 실탄을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는 유리한 상황에 놓인 셈이다.

숫자로 드러난 ‘자금 양극화’…적자 속 R&D 쏟아붓는 중소 바이오
대부분의 중소 바이오벤처는 신약 후보물질에서 발생하는 매출이 없다. 연구개발비는 계속 발생하지만 제품이 출시되기 전까지 이를 상쇄할 현금창출원이 없는 경우가 많다.
개발 초기인 전임상과 임상 1상까지는 정부 지원금이나 벤처캐피털(VC) 투자로 연구를 이어갈 수 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유효성을 증명해야 하는 임상 2상부터 환자 수가 늘고 임상 기간이 길어지면서 필요한 자금 규모는 크게 늘어난다.
대규모 환자를 대상으로 하는 임상 3상은 더욱 큰 장벽이다. 글로벌 다국가 임상으로 확대되면 필요한 자금이 수백억 원에서 수천억 원까지 늘어날 수 있다. 하지만 아직 제품 매출은 발생하지 않고, 임상 성공 여부도 확정되지 않은 상태다.
바이오업계에서는 이처럼 돈이 가장 많이 필요한 시점과 투자자가 가장 보수적으로 변하는 시점이 겹치는 시기를 ‘데스밸리(죽음의 계곡)’라 부른다.
특히 최근처럼 바이오산업으로 유입되는 자본시장이 위축된 상황에서는 이 간극이 더욱 커진다. 대표적인 자금 조달창구인 기업공개(IPO)에 성공하는 곳도 1년에 20곳 안팎에 불과하다. 기술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기술이 사업이 되기 전까지 버틸 돈이 없어서 개발을 중단하거나 파이프라인을 축소하는 기업이 생기는 이유다.
바이오기업의 생존을 가르는 기준이 기술력만은 아니라는 의미다. 같은 기술력을 가진 기업이라도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는 자금력을 확보했느냐에 따라 임상 결과와 사업의 운명이 달라질 수 있다.
자본시장이 냉각될수록 이 격차는 더욱 선명해진다. 돈이 있는 기업은 불황을 견디며 다음 임상과 기술에 투자하지만, 현금창출원이 없는 기업은 당장의 운영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핵심 파이프라인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특히 최근 바이오기업의 재무 상황을 보면 중소기업이 처한 자금 여건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한국바이오협회가 82개 상장사를 대상으로 집계한 ‘2026년 1분기 상장 바이오헬스케어기업 동향조사’에 따르면, 대기업·중견기업과 중소기업의 실적 양극화는 뚜렷하다.
의약품 대기업 8곳은 1분기 매출 2조 6701억 원·영업이익 1조 797억 원을, 중견기업 28곳은 매출 3조 8166억 원·영업이익 3259억 원을 올렸다. 반면 의약품 중소기업 21곳의 총매출은 2090억 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0.7% 감소했고 영업손실은 658억 원을 기록해 적자전환했다.
문제는 벌어들이는 돈이 줄어든 상황에서도 파이프라인 유지를 위해 투입해야 할 R&D 비용이 불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1분기 의약품 중소기업의 연구개발비 지출은 1446억 원으로 전년 동기보다 38.5% 늘었다. 분기 총매출의 약 70%에 이르는 금액을 R&D에 쏟아부으면서 적자 폭이 커진 셈이다.
자체 영업활동만으로 R&D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워진 중소 바이오기업으로서는 외부 자본을 수혈해야 하는 처지로 내몰리고 있다. 문제는 시장의 자금이 소수 기업에만 쏠리고 있다는 점이다. 생존과 임상 완주를 증명해야 하는 중소 바이오의 ‘쩐의 전쟁’이 시작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