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미국 인공지능(AI) 기업 앤트로픽의 해적판 도서 저작권 합의 대상 목록에 ‘홍길동전’ ‘구운몽’ 같은 고전과 북한 작가의 소설까지 한국 관련 서적 최소 46종이 포함된 것으로 확인됐다. 영국 대거상 수상작 ‘밤의 여행자들’, 박완서·황순원 작가의 작품과 시인 34명의 시를 엮은 현대시 선집 등 16종은 앞서 드러나지 않았던 도서다.

대거상 수상작부터 박완서·황순원 작품도 추가 확인
비즈한국은 한국문학번역원이 공공데이터로 공개한 ‘한국문학 번역출간도서정보’ 가운데 2022년까지 나온 영어 번역서 1300여 종을 앤트로픽 합의 사이트의 보상 대상 목록과 대조했다. 취재 결과 한강, 김영하 등 현대 작가의 작품뿐 아니라 조선시대 고전 5종, 김소월부터 김지하까지 시인 34명의 시를 엮은 선집, 북한·월북 작가의 작품도 목록에 올랐다. 탈북자 수기와 재일조선인·한국계 미국인 작가의 책, 장하준 케임브리지대학교 교수처럼 한국 출신 저자가 외국어로 쓴 책도 포함됐다.
보상 목록은 미국 작가들이 제기한 ‘바츠 대 앤트로픽’ 집단소송의 합의 결과다. 앤트로픽은 AI 모델 학습용으로 해적판 사이트에서 내려받은 책 가운데 미국 저작권청에 적기에 등록되는 등 합의 요건을 충족한 저작물 48만여 건에 대해 1건당 약 3000달러(약 430만 원)를 지급하기로 했다. 미국 법원은 지난 7월 이 합의를 최종 승인했다. 앤트로픽은 합의 과정에서 위법 행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번역원 안내와 기존 보도를 통해 알려진 한강, 김영하, 신경숙 등의 작품 외에 추가로 16종이 합의 대상에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2021년 아시아 작가 최초로 영국 추리작가협회(CWA) 대거상 번역 부문을 받은 윤고은의 ‘밤의 여행자들’, 박완서 작가의 단편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 등이 실린 영문 단편선, 황순원의 ‘카인의 후예’, 시인 박재삼의 영역 시선집 등이다.

각 도서의 미국 저작권 등록 서류를 확인해 권리자 명의를 집계한 결과, 46종 가운데 번역가 명의로 등록된 도서는 23종, 출판사·대학 등 기관 명의로 등록된 도서는 16종이었다. 한강의 ‘채식주의자’ ‘소년이 온다’ ‘흰’ 3종은 모두 번역가 데버라 스미스 명의로 등록됐다. 영문판의 등록 명의는 번역가나 출판사로 분류돼 있고, 원작자는 목록의 저자 항목에 함께 표기되는 방식이다.
원작자 본인 이름이 오른 경우는 영어원문을 직접 집필한 장하준 교수의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나쁜 사마리아인들’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 등 3종과 안정효의 ‘은마는 오지 않는다’를 빼면, 신경숙의 ‘외딴 방’, 번역가와 공동 명의인 혜민 스님의 책 정도다. 합의안은 일반 도서의 경우 저자와 출판사가 보상금을 절반씩 나누도록 정했는데, 원작자에게 돌아가는 몫은 원작·번역·출판 계약에 따라 달라진다.
400년 전 ‘홍길동전’ 보상금 어디로? 번역본 권리가 기준
목록에 오른 한국 고전 번역서는 5종으로 파악됐다. 허균의 ‘홍길동전’과 김만중의 ‘구운몽’은 글로벌 출판사 펭귄북스의 고전 시리즈 ‘펭귄 클래식’으로 나온 영역판이다. 사도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가 남긴 회고록 ‘한중록’은 미국 캘리포니아대 출판부가 펴낸 영역판이 올랐다. 한국 고전 영역의 개척자로 꼽히는 최병현 교수가 번역한 ‘태조실록’과 정약용의 ‘목민심서’도 포함됐다.

수백 년 전에 쓰인 고전이 왜 보상 대상에 올랐을까. 허균과 김만중은 17세기 인물로 이들의 작품은 ‘퍼블릭 도메인’, 즉 누구나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저작물에 해당한다. 이번 보상 목록에 오른 것은 원작이 아니라 현대에 출간된 영어 번역본이다. 번역본은 번역자의 창작적 표현이 반영된 별도의 2차적 저작물로 보호받을 수 있다. 어떤 단어와 문장으로 원문을 옮길지, 어떤 주석과 해설을 붙일지에 번역자의 창작이 들어가서다.
미국 저작권 등록 명의도 이런 차이를 보여준다. 고전 원작의 저작권이 소멸한 만큼, 이들 도서의 보상은 목록에 오른 영어 번역본의 권리관계를 중심으로 배분되는 구조다.
북한과 이산 문학도 확인됐다. 북한 주요 작가 백남룡의 소설 ‘벗’이 대표적이다. 이혼 문제를 다룬 이 작품은 2020년 미국에서 영어판이 출간됐고 같은 해 미국 도서관 전문지 ‘라이브러리 저널’이 선정한 올해의 세계문학 10선에 들었다. 월북 작가 이태준의 수필집 ‘무서록’과 ‘먼지’가 실린 단편집 영문판 등 2종, 탈북자 김용 씨의 수기 ‘롱 로드 홈’, 재일조선인 작가 김석범의 ‘만덕유령기담’, 한국계 미국인 작가 강용흘의 ‘동양 서양에 가다’도 포함된다.

작고 작가의 경우 유족의 권리 문제가 남는다. 김소월부터 김지하까지 시인 34명의 시 228편을 엮은 ‘현대 한국시 선집’은 컬럼비아대 출판부 명의로 한 건 등록돼 있다. 합의 목록에서 이 선집은 저작물 한 건으로 집계돼, 권리자 간 배분 전 기준액은 약 3000달러다.
한국 저작권법은 저작자 사후 70년까지 권리를 보호하기 때문에 1962년 이전에 세상을 떠난 김소월·윤동주·한용운 등의 작품은 이미 보호 기간이 끝난 반면, 서정주·김춘수·김수영 등은 유족이 권리를 갖고 있다. 개별 시의 권리관계와 실제 보상금 배분은 번역·출판 계약 등을 확인해야 알 수 있다. 합의금 청구 마감은 지난 3월 30일이었다.
출간처에 따른 차이도 나타났다. 해외 출판사가 낸 영문판은 690여 종 가운데 39종이 보상 목록에 올랐지만, 국내 출판사가 펴낸 영문판 300여 종은 한 종도 확인되지 않았다. 미국 저작권청에 적기에 등록됐는지가 합의 대상에 포함되는 전제 조건이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국내에서도 AI 학습용 도서 문제는 현안으로 떠올랐다. 국내 도서 유통사가 앤트로픽에 책을 공급한 사실이 알려진 데 이어 대형 서점들에 해외 업체의 대량 구매 문의가 잇따랐다는 보도가 나왔다. 한국출판인회의는 지난 16일 “책이 없으면 AI도 없다”며 학습 데이터 투명성과 정당한 보상을 요구하는 ‘대한민국 호소문’을 내고 연명운동을 진행 중이다.
한국출판인회의는 “책을 만든 사람들은 자신의 작품이 언제, 어떻게, 어느 AI에 쓰였는지조차 알지 못한다”며 “AI 기업은 출판물의 권리자에게 정당한 대가를 지급하고, 협상력이 약한 중소 출판사와 개별 창작자도 공정한 조건에서 협상하고 보상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23일 기준 연명에는 단체 268곳과 개인 971명이 이름을 올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