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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춘욱 경제팩트] 일본 장기불황의 원인은? 자산시장 버블 때문!

플라자 합의 후 엔고 불황 우려한 중앙은행의 정책금리 인하가 버블 유도한 셈

2017.02.13(Mon) 12:36:53

지난번 글 ‘고령화 때문에 일본 자산시장이 붕괴했다고?’에서 1990년대 일본 자산시장 붕괴의 원인이 ‘인구감소’ 때문이 아니었음을 확인한 바 있다. 인구감소가 장기불황의 원인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 때문에 일본경제가 ‘잃어버린 20년’을 보냈을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유력한 원인은 1985년 ‘플라자 합의’ 이후 자산시장에 발생한 이례적인 급등 현상, 즉 자산 버블 때문으로 판단된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부동산가격 폭락에서 시작된 것처럼, 자산시장의 붕괴는 경제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기 때문이다. 이번 글에서는 1990년대 초반 일본 자산시장에 버블이 형성된 경우에 초점을 맞춰보자. 

 

일본 도쿄의 상징과도 같은 도쿄타워.


 

플라자 합의, 강력한 붐을 촉발하다

 

1985년 9월 22일 뉴욕 맨하탄 중심에 위치한 플라자호텔에서 열린 재무장관·중앙은행총재 회담, 이른바 ‘플라자 회담’에서 선진 5개국(미국, 일본, 영국, 프랑스, 독일)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안에 합의했다. 

 

① 미국의 무역수지 개선을 위해 일본 엔화와 독일 마르크화의 평가절상을 유도하며 

② 이것이 순조롭지 못할 때에는 정부의 협조개입을 통해 목적을 달성한다

 

미국 경제가 대규모 무역수지 적자를 기록하고 경기도 좋지 않자, 달러의 약세를 유도해 이 문제를 해결해보자는 게 ‘플라자 합의’의 배경이었다. 이 영향으로 달러에 대한 엔화 환율은 242엔에서 9월 말 216엔으로 떨어졌고, 심지어 1988년 12월에는 124엔까지 떨어지고 말았다. 

 

환율이 급락하면 무엇보다 수입 물가 하락으로 디플레이션 위험, 즉 지속적인 물가 하락의 가능성이 부각될 뿐만 아니라 수출기업의 가격경쟁력이 급격히 약화된다. 수출기업들이 어려움을 겪으면 고용이 감소하며 또 투자도 부진해, 이른바 ‘엔고 불황’의 위험이 부각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일본 중앙은행은 정책금리를 1985년 5.0%에서 2.5%까지 무려 2.5%포인트나 인하하는 등 강력한 경기부양에 나섰다. 

 

금리가 인하되면 경기가 좋아진다. 부동산 담보대출과 자동차 할부금융 등 목돈이 드는 물건을 구입할 때, 금리 조건은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동차나 주택 같은 큼직큼직한 소비가 증가하면, 기업들의 이익도 증가하기 마련이다. 다만, 환율 급락으로 수출 경쟁력이 약화되었기에 일본 기업들은 수출보다는 국내 소비를 겨냥한 투자, 즉 부동산 및 리조트 등 위락시설 투자를 급격히 늘렸다.

 

상황이 이렇게 진행되니, 주식 및 부동산시장 분위기도 바뀌었다. 제일 먼저 ‘금리인하’의 혜택을 받는 증권, 전철, 부동산, 창고, 건설 등 수출과 큰 관련이 없는 내수업종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분위기가 호전되자 개인도 주식시장에 돌아오기 시작했다. 1984년 말 일본 가계의 주식형 펀드 투자 규모는 2829억엔으로 전체 보유 금융자산의 7.5%에 불과했지만, 1985년 말에는 4255억엔 그리고 1986년 말에는 5320억엔으로 부풀어 올랐다.

 

기업실적에 이어 수급여건도 좋아지니, 일본 주식시장은 거칠 게 없었다. 1985년 말 일본 닛케이지수(일본을 대표하는 255개 종목으로 구성된 주가지수)는 1만 3083 포인트로 마감한 후, 1986년 말에는 1만 8821포인트까지 상승했으며, 드디어 1987년 1월 30일에는 지수 2만 포인트를 돌파하기에 이르렀다. 

 

상황이 이렇게 진행되니, 일본 중앙은행은 새로운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주식시장이 강세를 보이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지만, 그 속도가 너무 빨랐기 때문이다. 특히 주당순이익과 주가의 비율, 즉 주가수익비율(PER)이 1986년 말 주가 기준으로 49.2배에 이른 것은 대단히 큰 부담이었다. 1965년부터 1986년까지 일본 증시의 평균 PER이 23.6배였음을 감안할 때, 1986년 말 일본 주식시장은 역사적인 평균에 비해 거의 2배 이상 고평가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산업생산도 1987년 초를 고비로 전년 동기대비 플러스로 전환하는 등 경기가 회복되고 있었기에, 일본 중앙은행은 1987년 정책금리의 인하 기조를 중단하고 인상하는 것이 올바른 방향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1987년 내내 정책금리는 2.5%에 못박혀 있었다.

 

일본증시 주가수익배율(PER). 자료: 존 템플턴의 가치 투자 전략(2009년)


 

왜 일본 중앙은행은 초저금리 정책을 오래 유지했을까? 

 

일본 중앙은행이 ‘금리 인상’을 단행하지 못했던 이유는 1987년 10월 미국 주식시장의 대폭락 사태, 이른바 ‘블랙 먼데이’ 때문이었다. 블랙 먼데이란 1987년 10월 19일 월요일 하루 동안 다우존스 산업평균 지수가 2246포인트에서 1738포인트까지 폭락(-22%)한 것을 의미한다. 이후 주가가 급락하면 언론에서는 항상 ‘블랙 ○○데이’라는 이름을 붙일 정도로 인상적인 사건이었다. 

 

투자자들과 정책당국이 ‘블랙 먼데이’에 충격을 받은 이유는 1929년 대공황의 시발점이 되었던 ‘검은 목요일’과 대단히 유사했기 때문이다. 일단 1929년 대공황 당시의 주가 하락률(-21%)과 비슷했던 데다, 당시의 주가 폭락이 연준의 금리인상으로 촉발되었다는 것도 공포를 자극한 요인이었다. 

 

그러나 1929년 연준과 1987년의 연준은 전혀 달랐다. 1929년 미 연준이 금리를 대폭 인상했던 것과 달리, 1987년 그린스펀 의장은 블랙 먼데이 당일 “통화를 풍부하게 공급하고 금리를 내릴 것”이라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하는 한편, 베이커 재무장관은 서독을 방문하여 독일 재무장관 및 중앙은행 총재와 연쇄회동을 가지며 금리인하를 요청하였다. 이런 노력 덕분에 1987년 말 다우존스 산업평균 지수는 블랙 먼데이 이후의 최저점에 비해 200포인트 이상 상승한 1938포인트로 한 해를 마감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극적인 ‘성공 스토리’인데, 이게 왜 일본경제에 문제일까? 그 이유는 일본은행이 정책금리를 동결하는 동안 일본 자산시장, 특히 주식시장에 어마어마한 거품이 꼈기 때문이다. 

 

1985년 플라자 합의 이후 엔고 불황을 우려한 일본 중앙은행은 금리를 인하해 경기를 부양했고, 이는 주식 및 부동산시장 활황으로 이어졌다.


 

새로운 돈이 유입되지 않으면 자산가격이 유지될 수 없는 상황, 그게 버블이다

 

이 대목에서 잠깐 ‘버블’이 어떤 과정을 통해 생기는지 살펴보자. 하이만 민스키(1919∼1996년)에 따르면 버블은 크게 보아 3단계의 과정을 거친 자산가격의 상승을 의미한다.*

 

자산시장이 바닥 수준에 도달한 경기불황 상황을 가정해보면, 이때 투자자들은 보유 자산 가치의 폭락으로 고통받고 있기에 돈을 빌려 투자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금융시장에서 대출을 받기 위해서는 많은 조건이 필요하며, 또 기업과 가계는 충분히 상환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대출을 신중하게 사용한다. 그리고 여유 현금이 생기면 부채를 상환함으로써, 다음번 위기에서 큰 손실을 입지 않으려 노력한다. 이런 1단계를 민스키는 ‘헷지금융’이라고 지칭했다. 

 

경기 회복이 서서히 진행되는 가운데 일부 투자자들을 중심으로 주식이나 부동산 같은 자산시장에 대한 매수가 시작된다. 특히 저금리 환경에 힘입은 기업들의 투자회복 속에 점점 경기는 확장국면에 접어든다. 가계의 소득이 증가함에 따라, 가계는 주식 및 부동산 등의 자산을 구입하기 위해 차입을 시작한다. 투자자들은 차입을 이용한 자산 투자의 이점을 깨달으며, 빚을 내어 투자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사라진다. 민스키는 이 단계를 ‘투기금융’ 단계로 정의한다.

 

이제 버블이 형성된다. 자산가격이 상승함에 따라 기업과 가계는 보유자산의 평가차익이 급격히 증가하며, 이는 담보가치의 상승에 따라 추가적인 차입의 가능성을 열어두게 된다. 특히 대출의 증가가 가져오는 유동성 효과, 그리고 자산가격 상승에 따른 소비 증가는 자산시장의 매력을 더욱 부각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결국 투자자들은 자산의 ‘수익성’보다는 ‘추가적인 상승 여력’에 마음이 빼앗기는 마지막 3단계, ‘폰지금융’의 단계에 진입한다. 

 

폰지금융이란 2008년 말 발생한 버나드 매도프 사건처럼, 새롭게 유치한 자금으로 기존 투자자들에게 배당금을 지급하는 일종의 ‘사기 금융’을 의미한다. 따라서 자산시장이 폰지금융의 상태에 접어들 때에는 투자를 중단해야 하며, 금융 감독당국은 대출이 급격히 늘지 않도록 금리를 인상해야 한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 일본 중앙은행은 매번 뒷북으로 일관했다. 

 

버블의 형성과 소멸. 조지 쿠퍼의 책(2009)을 바탕으로 작성했다.


 

뒤늦은 금리 인상, 버블 붕괴로 이어지다

 

주식시장 호황으로 기업들의 증자가 쉬워지자, 은행의 기업대출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은행은 이때 기업대출에서 가계대출로 방향을 전환했다. 시중은행의 부동산 업종 대출이 1988년 31조 4486억 엔이던 것이 1990년에는 42조 4269억 엔으로, 주택관련 대출잔고는 1988년 25조 164억 엔에서 1990년 38조 1509억 엔으로 급증했다. 경기가 좋아진 데다 시중자금마저 빠르게 유입되자 부동산 가격이 급등하기 시작했다. 전국 지가는 1984년 100포인트에서 1990년 160포인트로 급등했으며, 특히 동경과 오사카 등 이른바 6대 도시의 지가지수는 무려 300포인트까지 치솟았다. 

 

결국 사방의 압박을 견디지 못한 일본 중앙은행은 금리를 인상하기 시작했다. 1989년 5월 30일, 금리가 0.75% 포인트 인상되었다(2.5→3.25%). 일본 중앙은행의 금리인상은 1980년 8월 이후 처음이었지만, 자본시장의 참가자들은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일본 닛께이 225지수는 1988년 12월 27일 대망의 3만 포인트를 돌파한 데 이어, 1989년 9월 말에는 다시 3만 5000엔을, 그리고 1989년 말에는 대망의 4만 포인트에 근접하는 강세를 보였다. 

 

이에 대해 일본 중앙은행은 1989년 10월 11일, 12월 25일 정책금리를 연속 인상함으로써 ‘거품 해소’에 적극 대처하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내비쳤다. 결국 1990년 1월 초 닛케이지수 3만 8900포인트를 역사적인 고점으로 하락세로 돌아서, 1990년 말에는 2만 3849포인트 그리고 1992년 4월에는 다시 2만 포인트마저 붕괴되고 말았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미국 주식시장과 경제는 금방 회복된 반면, 1990년대 일본경제가 장기불황에 빠져든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해 다음 시간에 보다 자세히 살펴보자. 

 

*조지 쿠퍼(리더스하우스, 2009), “민스키의 눈으로 본 금융위기의 기원”, 참조. 

홍춘욱 이코노미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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