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스타트업을 운영하는 친구를 만났다. 그는 다양한 복리후생과 연말마다 큰 금액의 인센티브를 제공함에도 불구하고 그로 인한 직원들의 열의가 일주일도 채 못 간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나는 “어제 어떤 다큐를 봤는데, 무주상보시(無主相布施)라고, 내가 무엇을 주었다는 생각조차 버리는 걸 실천하는 사람이 있더라”라며 어쭙잖은 소리를 했고, 곧바로 퉁박이 날아왔다. “야, 줬는데 어떻게 생각이 안 나냐?” 맞다. 동의한다. 줬는데 어떻게 요만큼의 생색도 안 낼 수 있지? 그런데 그런 사람도 있더라. MBC경남의 2부작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의 김장하 선생 같은.
김장하 선생은 50년 넘게 한약방을 운영하며 수십 년간 끊임없이 기부한 인물이다. 젊을 적부터 기부를 시작했고, 진주에 세운 명신고등학교를 1991년 국가에 헌납하는 등 평생을 지역사회를 위해 기부하고 헌신해왔다. 그럼에도 자신을 드러내기 싫어해 어떠한 인터뷰도 거절하여 대중적으로 알려지지 않았었다. 덕분에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는 김장하라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고도 그에 대한 이야기를 그에게 직접 듣기 보다 그의 주변 사람들을 통해 듣는, 요상한 형태를 취한다.
열심히 일해 부(富)를 쌓은 사람들이 경제적 형편으로 공부하기 힘든 고학생 등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기부하는 미담들은 세상에 종종 들린다. 김밥을 팔거나 파지를 주우며 일평생 모은 전재산을 기부했다는 아름다운 할머니, 할아버지의 이야기들도 들린다. 김장하 선생의 경우는 조금 독특하다.
그가 세간의 관심을 산 것은 1983년 설립한 명신고등학교를 1991년 조건 없이 국가에 헌납한 전무후무한 일 때문이었다. 학교를 설립했을 때가 우리 나이로 고작 마흔. 경상남도 사천에서 시작해 진주로 옮긴 남성당한약방으로 많은 돈을 벌고 있었지만 젊은 나이부터 재단을 만들고 학교를 세우는 것도, 그렇게 세운 학교를 아무 조건 없이 국가에 기부한 것도 흔치 않은 일이다.
이로 인해 김장하 선생에게 관심을 보인 사람이 많았다. ‘어른 김장하’에서 키맨으로 등장하는 ‘경남도민일보’ 출신 기자 김주완도 그중 한 명. ‘어른 김장하’가 재미난 것은 김장하의 주변 인물들의 입을 통해 주인공의 삶의 궤적을 쫓는 것도 있지만, 오랜 시간 기득권자의 악행을 발굴해서 보도하던 김주완 기자가 인터뷰어가 되어 시청자의 관점에서 궁금한 지점을 짚어낸다는 점에서 재미나다.
이를테면, 명신고를 국가에 헌납한 뉴스를 보면서 김주완 기자는 처음엔 “그냥 돈 많은 사람이 좋은 일 하는구나” 하고 크게 감흥이 없었다고 말한다. 그러다 흥미를 가지게 된 건 그렇게 돈이 많다는 사람이 그 흔한 승용차 한 대 없다는 대목. 기부를 일삼는 부자가 승용차 한 대 없이 검소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척 드문 일이기도 하다. 나도 처음에 김주완 기자와 비슷한 마음이 들었기에 흥미가 갔다.
자신이 최대 후원자로 있는 ‘진주신문’을 비롯해 그 어떤 대중매체의 인터뷰에도 일절 응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면 선생에겐 자기 이름을 널리 드러내고자 하는 공명심 또한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일종의 자기만족, 혹은 자신이 많이 배우지 못한 것에 대한 한 같은 정서 때문이 아닐까? 명신고 설립은 물론 진주고, 대아고 등 지역의 많은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는 등 교육 사업에 관심이 많았던 부분을 보며, 문형배 헌법재판관을 비롯해 이준호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 우종원 사이타마대 교수, 권재열 충남대 교수 등 김장하 장학금의 혜택을 받은 이들의 면면이 이른바 사회 엘리트 계층인 것을 보면서 나의 속세에 찌든 의심은 깊어졌다. 그런데 그 또한 오산.
선생은 전혀 젠체하지 않고 장학금과 생활비를 지원했지만, 보통 사람이라면 그 돈이 얼마나 유의미한 결과를 낳을지를 은연중에 바랄 것이다. 문형배 헌법재판관에게 선생이 했다는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이 사회에 갚아라”라는 말을 들으며 수혜를 받은 당사자는 지극한 부채감을 가질 수도 있고, 이를 지켜보는 (나 같은) 사람들은 조금 삐딱하게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가 운영하던 남성당한약방이 문을 닫던 날 찾아왔던 한 장학생이 “제가 장학금을 받고도 특별한 인물이 못 돼서 죄송합니다”라고 했던 것도 그 같은 상황에 보통 사람들이 느끼는 부채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에 대해 김장하 선생의 대답은 그런 오해를 불식시키며 눈시울을 뜨겁게 만든다. “우리 사회는 평범한 사람들이 지탱하고 있는 거다.”
여성 인권에 대해 말 꺼내기 어려웠던 1999년, 가부장적인 유교문화가 드리웠던 경상남도에서 진주가정폭력상담소 개소에 후원하고 가정폭력 피해여성과 동반 자녀에게 안식처와 회복프로그램을 지원하는 피해여성 피난시설을 만드는 데 도움을 주었다는 점이나 백정들의 신분을 철폐하고자 한 인권운동인 형평운동을 기념하는 형평운동기념사업회를 발족하며 차별 없는 세상을 연구하고 응원하는 모습, ‘빨갱이’ 소리까지 들으면서도 민족문제연구소에 후원한 사실 등을 방송은 찬찬히 짚어간다. 폭 넓고 다양한 분야에 대한 지원은 물론이요, 규모 있고 이름 난 단체가 아니라 언론사, 문고, 극단, 환경단체 등 풀뿌리 같은 다양한 지역 커뮤니티에 선생이 꾸준한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도 놀랍기 그지없다.
‘어른 김장하’가 장안에 화제를 일으켰던 ‘나는 신이다: 신이 배신한 사람들’을 제치고 59회 백상예술대상 교양작품상을 수상한 것은 자못 의미심장하다. 2022년 마지막 날과 2023년 새해 첫날에 MBC경남에서 2부작으로 방영하며 화제를 모으고 이후 설 연휴에 전국으로 송출될 만큼 화제를 모으기는 했으나 지역 방송사 작품이 백상예술대상에서 수상한 것은 최초.
이는 김주완 기자가 김장하 선생을 취재하고자 했던 마음과 백상의 선택이 일맥상통한 것으로 보인다. 오랜 시간 세상의 비리와 악행을 폭로하고 비판하며 세상이 바뀌기를 갈망했던 김주완 기자는, 김장하 선생처럼 좋은 사례를 찾아내 널리 알리는 것도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유용한 방법일 수 있겠다고 말한다. ‘어른 김장하’를 보고 난 뒤, 나도 그 말에 기꺼이 동의를 던진다.
선한 영향력의 힘이라는, 너무 빤해 보이는 그 개념이 얼마나 울림이 있고 깊이가 있는지 깨닫게 만들어주는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는 웨이브에서 시청할 수 있다.
필자 정수진은?
여러 잡지를 거치며 영화와 여행, 대중문화에 대해 취재하고 글을 썼다. 트렌드에 뒤쳐지고 싶지 않지만 최신 드라마를 보며 다음 장면으로 뻔한 클리셰만 예상하는 옛날 사람이 되어버렸다. 광활한 OTT세계를 표류하며 잃어버린 감을 되찾으려 노력 중으로, 지금 소원은 통합 OTT 요금제가 나오는 것.
정수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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