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진의 계정공유] 차라리 3월에 볼 걸 그랬어 '더 글로리'

[비즈한국] “더 글로리 봤어?” 카페, 식당, 술집에서 대화를 나누는 무리에서 요즘 자주 들리는 소리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더 글로리’는, ‘더 킹’으로 삐끗하며 ‘언제 적 김은숙이야’가 될 뻔한 김은숙 작가를 화려하게 부활시켰다. 공개 사흘 만에 2541만 시청 시간을 기록했고, 넷플릭스 글로벌 톱10 비영어 부문 3위 랭크에, OTT 플랫폼 시청 순위 집계 사이트 플릭스패트롤에선 1월 5일 기준 전 세계 톱10 TV프로그램 4위를 차지했다. 총 16부작 중 파트1에 해당하는 8화까지 공개됐으니, 파트2가 공개되는 3월에는 얼마나 더 높은 영광을 차지할지 모를 일이다.

‘더 글로리’는 고등학생 시절 잔혹한 폭력으로 몸과 영혼이 모두 부서진 문동은(송혜교, 아역 정지소)이 온 생을 걸어 치밀하게 준비한 처절한 복수와 그 소용돌이에 빠져드는 이들의 이야기다. 학교폭력, 학폭으로 괴로워하다 복수한다는 설정은 그간 여러 작품에서 봐온 바 있다. 지난해에만 OTT에서 ‘돼지의 왕’(티빙), ‘3인칭 복수’(디즈니플러스), ‘약한영웅 Class 1’(웨이브)이 공개되었고, 모두 일정 이상 화제를 일으켰다. 2022년 연말인 12월 30일 공개한 ‘더 글로리’는 화제를 넘어 신드롬을 만들며 방점을 찍었다.

먼저 딴지부터 걸고 넘어가자. ‘더 글로리’는 놀라운 몰입감에도 불구하고 이해되지 않는 설정이나 개연성이 보인다. 죽음을 생각할 만큼 지독한 괴롭힘을 당한 문동은이 자퇴하던 열여덟 살부터 18년이란 세월을 바치며 복수를 계획한 것 치고는 허술한 부분이 많다는 소리다. 문동은의 복수의 얼개는 자신을 괴롭힌 무리의 대장인 박연진(임지연, 아역 신예은)의 딸의 초등학교 담임이 된다는 것이다.

그를 위해 문동은은 공장을 다니며 몇 번의 도전 끝에 교대에 붙어 교사가 되었고, 박연진 딸이 다니는 세명초등학교 재단 이사장 집의 쓰레기를 반 년 이상 뒤지며 약점을 잡은 끝에 세명초등학교 1학년 2반 담임이 된다. 이 과정에서 있을 수 있는 무수히 많은 변수들은 사뿐히 제외된다(이사장이 결정적인 약점이 없었다면? 박연진 자식이 어릴 적부터 유학을 갔거나 국제학교에 갔다면? 아니, 아예 박연진이 자식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오는 데 우연은 단 한 줄도 없었어”라지만, 수많은 우연과 당위가 있었기에 문동은의 칼춤은 시작될 수 있었다. 

물론 십 수 년을 계획한 만큼 플랜B, 플랜C도 있었겠지. 그러나 찰나일지언정 성인이 된 박연진이 문동은을 마주했을 때 두려워할 공간으로 자녀가 공부하는 초등학교 교실을 설정한 문동은의 계획은, 엄청난 몰입감으로 새벽까지 정주행하는 시청자가 보기에도 ‘읭?’스러운 구석이 많다.

결정적인 키가 되는 박연진 딸의 출생의 비밀은 문동은도 예상하지 못한 바이고, 뒤늦게 박연진 모녀에 과하게 집착하는 전재준(박성훈, 아역 송병근)의 심리는 빌드업이 약한 편이다. 몇 년간 알았지만 사실 잘 알지 못하는 존재인 동은을 위해 망나니 칼춤을 춰주겠다는 주여정(이도현)은 갑작스럽고, 폭탄 같은 존재감의 시신이 무려 18년간이나 병원 안치실에서 누워 있었다는 설정도 의아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글로리’는 눈을 뗄 수가 없다. 1, 2화 보고 자야지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틀었다가 졸린 눈을 비비며 밤새 정주행을 마쳤고, 가볍게 지나쳤던 장면들만 다시 들여다 봐야지 하고 틀었다가 또 정주행을 했다. 문동은의 복수는 더디고 더디지만 확고하게 앞을 향해 나아가며 자신을 망가뜨렸던 패거리들의 숨통을 죈다. 박연진 패거리의 악인들은 비루한 사연없이 확고한 악인들이고, 그래서 그들을 향한 동은의 사적 복수는 시청자들의 옹호를 받는다.

그간 연예계를 중심으로 문화예술계에서 유명인이 학폭 가해자였음이 밝혀진 경우는 많지만, 제대로 처절하게 반성하는 모습은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더욱 옹호를 받는 것인지도 모른다. 혹은 방관자였을 수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한 반성일지도 모르겠다. 학창시절 학폭까지는 아니더라도 은근히 따돌림당하는 친구에게 손을 내어주지 못한 과거에 대한 반성. ‘더 글로리’의 문동은도, 자신 이전의 피해자였던 친구를 지켜보기만 했을 뿐이니까.

학폭 소재 드라마가 끊이지 않는 것은 학폭으로 여전히 하루하루가 지옥 같은 사람들이 많다는 것의 방증이기도 하다. 김은숙 작가는 고2가 되는 딸의 질문으로 ‘더 글로리’를 쓰게 됐다고 밝혔다. “엄마는 내가 누굴 죽도록 때리면 더 가슴 아플 것 같아, 아니면 죽도록 맞고 오면 더 가슴 아플 것 같아?” 충격적이고 지옥 같은 딸의 질문은 ‘로코의 대가’ 김은숙 작가를 현실의 서늘한 복수극을 쓰도록 만들었다. 김은숙 작가의 딸이 던진 질문은 더 나아가 자식이 밖에서 폭력을 자행했거나 혹은 반대로 폭력을 당했을 때 어른의 대응에 대해 생각해 보게 만든다.

‘더 글로리’에서 박연진 패거리는 옹호할 만한 일고의 가치도 없는 악의 무리지만, 그들에게 무소불위의 권력을 쥐어준 것은 부모, 교사, 경찰 같은 어른들이다. 문동은의 복수 대상 리스트에서 박연진 패거리뿐 아니라 그들을 괴물로 성장시킨 어른들의 사진도 있다는 점을 기억하자.

생경한 얼굴로 변신한 송혜교, 악마 같은 미소로 소름을 자아내는 임지연, ‘나이스한 개XX’의 면모를 감추고 있는 정성일 등 배우들의 활약은 ‘더 글로리’의 몰입감을 높이는데 지대한 역할을 한다. 복수극의 조력자이자 피해자들의 연대로 보이는 인물들도 돋보인다. 세명초 재단 이사장 집의 가사도우미였다가 동은의 눈과 귀와 발이 되는 강현남(염혜란)이 대표적.

가정폭력의 피해자로, 딸아이를 지키기 위해 문동은에게 거래를 제안하며 복수극에 참여하게 된 강현남은 “난 매 맞지만 명랑한 년이에요”라는 명대사로 ‘피해자 프레임’을 상큼하게 부수며 시청자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연대와 연애 사이 어딘가에 위치한 주여정은 아버지를 살해한 범인에게 조롱당하며 환상속에서 끊임없이 그를 죽이는 상상을 하는 인물. 파트2에서 그런 그의 심리가 문동은의 복수극에 어떻게 작용할지 기대되는 대목이다.

이미 시청자들은 캐릭터 포스터 분석부터 인물들의 의상에 감춰진 복선까지 촘촘히 캐고 있는 중이다. 정주행에 정주행을 거듭하다 대사를 외우게 될 지경이 되면 파트2가 공개되는 3월이 오려나. 꽃 피는 봄을 이토록 기다리게 될 줄이야. 

필자 정수진은?

여러 잡지를 거치며 영화와 여행, 대중문화에 대해 취재하고 글을 썼다. 트렌드에 뒤쳐지고 싶지 않지만 최신 드라마를 보며 다음 장면으로 뻔한 클리셰만 예상하는 옛날 사람이 되어버렸다. 광활한 OTT세계를 표류하며 잃어버린 감을 되찾으려 노력 중으로, 지금 소원은 통합 OTT 요금제가 나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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