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파업 중 평소보다 많은 노동자가 일하는 곳이 있다. 철도나 공항, 병원 등이 그렇다. 이 사업장들은 파업을 하더라도 정해진 비율에 따라 일하는 노동자 수를 유지해야 한다. 필수유지업무 제도 때문이다.
필수유지업무로 지정된 사업장은 파업에 돌입해도 사측에 가하는 압박이 미미하다. 10일 민주노총 전국공공운수사회서비스노조(공공운수노조) 용인경전철 지부는 처우개선과 민간위탁 폐지 등을 요구하며 총파업에 돌입했는데, 파업 기간에 오히려 평소보다 많은 인원이 근무한 경우도 있었다.
이석주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용인경전철지부 지부장은 “용인경전철은 필수유지 업무 비율 70%를 유지해야 하는데, 무인운행을 합쳐 열차 100%가 운행되는 상황이다. 평상 시 휴가로 빠지는 인원 등을 고려하면, 파업 기간인데도 평소보다 더 많은 인원이 근무할 때도 있다. 지금까지 파업을 해도 열차가 정상적으로 운행돼 사측이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고 설명했다.
다른 곳도 마찬가지다. 필수유지업무로 지정된 A 공항 노조 관계자는 “부당한 부분에 대해 1인 시위 등 항의를 계속해도 쟁의행위를 못 해, 업무에 차질이 없으니 사측에서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고 한탄했다.
이러한 이유로 필수유지업무 제도가 쟁의권을 박탈하고 노동권을 제한한다는 지적이 잇따른다. 2008년부터 시행된 필수유지업무는 2006년 ‘노사정 대타협’을 통해 도입됐다. 쟁의권을 과도하게 제한한다는 비판을 받은 직권중재제도를 폐지하는 대신 지정된 사업에 대체근로를 허용한 것이다. 그러나 이 합의에 민주노총이 참여하지 않는 등 반대의견이 거셌으며, 직권중재제도보다 규제가 심해졌다는 지적도 있었다.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동조합법)은 ‘공중의 일상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거나 국민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큰 사업’을 공익사업으로 규정한다. 항공운수, 수도, 전기, 의료, 은행, 철도, 통신 등 11개 사업이 필수공익사업이다. 이 사업에 해당하는 업장은 필수유지수준, 대상 직무, 필요인원 등을 노사협정으로 체결하는데, 협정이 체결되지 않을 때는 관할 지방노동위원회에서 이를 결정한다.
#대체 수단 많아졌는데도 필수유지업무 업종은 그대로
최근에는 이전과 달리 대체재가 여럿 생겨 더 이상 필수유지업무 업종이 아닌 사업이 늘어났다. 그러나 이를 규정힌 노동조합법 조항은 2006년 12월 이후 약 16여 년간 개정되지 않았다. 시행령에 명시된 필수유지업무 역시 2007년 11월 신설 이후 개정된 바 없다.
철도노동조합 관계자는 “예전과 달리 지금은 열차 외 버스, 비행기 등 대체 교통수단이 충분히 많다. 그런데도 필수유지업무 사업은 그대로며 지방노동위원회에서 정하는 업무유지율은 오히려 높아졌다”고 지적했다.
정부가 국제노동기구(ILO) 협약을 위반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2021년 비준된 ILO 협약에는 결사의 자유와 단결권을 보장하며, 이미 2002년 ILO가 한국 정부에 철도와 석유 부문은 필수공익사업장에서 제외하라고 권고했는데도 개선된 바가 없다는 것이다.
황수옥 참여연대 노동사회위원회 실행위원은 “2002년 ILO 결사의자유위원회는 ‘철도와 석유 부문은 엄격한 의미의 필수서비스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의견을 보냈으며 이후 여러 차례 비슷한 권고를 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필수공익사업의 범위를 조정하지 않는 것은 헌법에서 규정하는 노동권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는 “대한민국 정부의 이러한 행태는 단결권 및 단체교섭 협약 제98호 제4조를 위반함이 명백하다. 단체교섭권 및 단체협약 체결권 침해에 대해 ILO에 진정을 제기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고용노동부는 필수유지업무 사업장 파악도 안 해
이 같은 문제 제기에도 정부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정원섭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조직쟁의부실장은 “필수유지 비율이 비교적 적은 곳도 50~60%에 육박한다. 이러다 보니 노조는 교섭력을 상실하게 된다. 운송수단 등은 대체재가 많음에도 업무유지율은 점점 높아지는 실정이다. 지방노동위원회는 본인들의 권한이 아니라고 말하고, 중앙노동위원회는 법이 바뀌지 않으면 어쩔 수 없다고 말한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노동조합 관계자 역시 “시정 요청을 여러 번 했는데 전혀 해결되지 않았다. 정부가 해결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필수유지업무 제도의 개선 필요성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고용노동부나 중앙·지방노동위원회는 책임을 서로 떠넘기고 있다.
노동조합법 시행령 개정 논의 여부 등에 대해 묻자 고용노동부 관계자는 “법 개정에 대해 논의하지 않았다. 사업마다 업무가 상대적이고 해석의 여지가 있기는 하다. 대체재가 생기는 등 사회 변화에 따라 바뀌는 부분들은 협의를 통해 지방노동위원회에서 반영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지방노동위원회는 법 개정 없이 자체적으로 규제를 완화하기는 어렵다는 입장이다.
업무유지율 완화에 대한 논의도 종합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중앙노동위원회 관계자는 “지방노동위원회에서 필수유지업무 내용을 결정하기 때문에 위원회별로 (유지비율 완화 논의 등을) 알아봐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이러다 보니 관할 주체가 붕 떠버렸다. 전국 필수유지업무 사업장 현황 등의 흐름도 파악하는 주체가 없다. 2021년판 고용노동백서에 따르면 노동위원회가 결정한 필수공익사업별 필수유지업무 사업장은 총 108개지만, 노사 간 협의로 필수유지업무가 체결된 비율이나 전체 필수유지업무 사업장 개수 등은 파악할 수 없었다.
고용노동부는 필수유지업무 사업장 현황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필수유지업무 내용을 세부적으로 결정하는 중앙노동위원회조차 이를 파악하지 않았다.
고용노동부 관계자는 “노동위원회에서 필수유지업무 내용을 지정할 수 있지만 고용노동부에서 이를 직접 정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사업장 명단을 파악하지는 않는다”고 밝혔다. 중앙노동위원회 관계자 역시 “보통 재심까지는 오지 않아 중앙노동위원회에서 사업장 명단을 관리하거나 작성하는 자료는 없다”고 밝혔다.
노화된 매뉴얼도 문제다. 비즈한국 취재 결과 각 노동위원회에서 사용하는 필수유지업무 매뉴얼은 4년 전 만들어진 2018년 개정본이었다. 작년에 진행된 필수유지업무 제도 개선방안 토론회에서 중앙노동위원회 관계자는 “필수 업무유지율 재결정과 관련해서 규정과 서식이 내부적으로 마련돼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면밀히 검토해 기준을 마련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지만, 아직 이에 대한 개정 사안은 반영되지 않은 상태다.
허유경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공공기관사업국장은 “필수유지업무 제도 문제점과 관련해 법안 개정과 ILO 제소를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전다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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