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지난 19일 스위스 수도 베른의 의사당 앞에서 열린 반전 시위에 화상으로 참석했다. 전 세계가 한 국가를 향해 동시다발적으로 제재를 가하는 현 상황은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다. 특히 중립국 스위스도 제재에 동참하자 젤렌스키 대통령은 스위스 정부에 러시아 계좌 동결을 촉구했다. 스위스 은행 비밀 계좌에 있는 러시아 올리가르히(신흥 재벌 집단)의 재산이 전쟁 비용에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스위스 예치 재산은 2130억 달러(258조 원)로 추산된다.
러시아에 대한 제재 조치로 유럽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러시아 7개 은행을 스위프트(SWIFT) 결제망에서 제외한 것이다. 이후 러시아산 제품의 EU 수출이 금지됐고, 마이크로소프트, 비자카드, 넷플릭스 등 글로벌 대기업들이 줄줄이 러시아에서의 영업을 중단했다. 제재가 갈수록 늘어남에 따라 제재에 해당하는 부분을 발 빠르게 파악하는 것이 기업에 중요해졌다. 스타트업계에서도 전쟁의 영향으로 3월 들어 전반적으로 펀딩 규모가 축소되거나 연기되는 등 투자 분위기가 다소 위축됐다.
반면 러시아 제재로 규제 관련 기술을 개발하는 레그테크(RegTech) 분야는 VC(벤처캐피털)의 관심을 한몸에 받고 있다. 컴플라이언스 관련 기술 산업이 현재와 같은 불안한 국제 정세에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레그테크’는 규제(Regulation)와 기술(Technology)의 합성어로 다양한 기술을 활용해 금융 관련 규제를 관리하고 준수하도록 돕는 서비스나 기술을 의미한다. 핀테크의 발달로 복잡한 금융규제를 기업들이 쉽게 이해하고 지키도록 돕는 기술에서 시작됐는데, 이제는 단순히 금융 규제에 대한 준수와 모니터링을 넘어 빅데이터, AI, 블록체인 등을 활용해 위험을 적극적으로 예측하고 대응하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 주로 규제 모니터링, 리포팅, 컴플라이언스를 모두 포함하며, 요즘에는 핀테크 분야뿐만 아니라 산업 전반에서 규제와 관련한 문제를 해결하고 준수하도록 돕는 기술과 소프트웨어를 광범위하게 ‘레그테크’로 부른다.
#레크테크가 왜 필요할까
다양한 산업환경 변화로 인해 규제가 더욱 복잡해지고 감독 당국의 제재도 늘어나고 있다. 규제는 본질적으로 소비자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므로, 규제로 인한 불편은 줄이되 고객 경험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 레그테크가 필요하다.
특히 신규 고객 가입을 위한 제품 설계, 고객이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신기능 안내 등을 뜻하는 고객 온보딩(Onborading), KYC(Know Your Customer, 본인인증 절차) 등 개인정보를 다루는 분야에서는 레크테크가 반드시 필요하다. 예를 들어, 어떤 웹사이트에 회원으로 가입할 때 요즘은 네이버나 페이스북 아이디로 가입하기를 많이 한다. 클릭 한 번으로 회원 가입이 되는 소셜네트워크 로그인 기능은 대표적으로 레그테크가 필요한 부분이다. 사용자의 정보가 가입하려는 웹사이트뿐만 아니라 SNS 회사에도 넘어가기 때문이다. 그 밖에 데이터 관리, 세금 관리, 자금세탁방지(AML), 위험 관리, 기록 관리 등 분야에서 다양한 솔루션을 제공하는 것이 레그테크 기업들의 영역이다.
특히 유럽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일반 개인정보보호법(GDPR)을 실시하고 있다. GDPR은 회사가 유럽에 있지 않더라도 유럽에 사용자가 있다면 모든 서비스 제공 회사들이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규제이기 때문에 사실상 전 세계 모든 IT 기반 업체들이 이 법의 적용을 받는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규제 위반 시 기본적으로 전 세계 연 매출의 2%나 1000만 유로(약 128억 원) 중 높은 금액을 과징금으로 내야 하므로 전 세계 기업들에게 유럽의 개인정보보호법은 무서운 존재다.
#떠오르는 유럽의 레그테크 스타트업 3
실제 GDPR이 시행된 2018년 5월 이후 전 세계 레크테크 스타트업에 대한 투자는 지속적으로 증가해 지난 2021년에는 총 161개의 스타트업이 53억 달러(6조 원) 이상의 투자를 받았다. 2019년 17억 달러(2조 원)에 비해 급격히 증가한 수치다.
거슬러 올라가자면,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국가별 다양한 금융 규제, 자금세탁 방지를 위한 법안 등이 통과되면서 2009년에서 2012년까지 3년 동안 G20국가에서만 5만 개 이상의 규제가 추가됐다. 특히 유럽은 평균 7분마다 1개의 규제가 생겨난다. 게다가 현재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상황이 얼마나 장기화될지 알 수 없어 전 세계 기업들이 각국의 규제를 주시하고 있다. 레그테크 기업이 주목받는 이유다.
2021년 3월까지 집계한 자료에 따르면 유럽에는 약 140개의 레그테크 스타트업이 있다. 이들 중 30%는 규정 준수 관리에 관한 영역을 다루고, 27%는 KYC와 AML 자동화를 전문적으로 다룬다. 그리고 26%는 데이터와 기술을 활용해 기업에 위험 관리 솔루션을 제공한다.
영국에 기반을 둔 레그테크 기업 엔컴파스(Encompass)는 은행과 에너지 트레이딩 회사가 주요 고객이다. 사용자가 엔컴파스의 플랫폼을 통해 실제로 거래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파악하고, 규정을 준수하며 거래를 진행하고 있는지 확인하는 절차를 모두 자동화해 서비스를 제공한다. 엔컴파스는 지난 3월 14일 은행을 위한 KYC 자동화와 글로벌 확장을 위해 3300만 달러(400억 원)의 투자를 유치했다.
2015년 독일 뮌헨에서 설립된 앨린(alyne)은 조직이 겪는 크고 작은 위험을 관리하는 솔루션을 위한 기술을 제공한다. 사이버 보안, 위험 및 규제 관련 기술 구축 서비스가 주를 이룬다. 특히 최근 세계적으로 기업들에 가장 중요한 화두인 ESG(Environmental, Social and Governance) 관련 위험 관리 솔루션도 제공한다. 이를 바탕으로 기업이 장기적으로 친환경적인 방향으로, 사회적으로 책임 경영과 투명경영을 통해 지속 가능한 발전을 추구할 수 있도록 돕는다.
직원 4명으로 시작해 이제는 48명 이상이 뮌헨, 뉴욕, 런던, 멜버른에 차근차근 지사를 열어 전 세계를 무대로 활동한다. 특히 AI를 도입한 자동화 기술 덕분에 세계적인 규제 관련 소프트웨어 공급 업체인 미국의 미트라테크(Mitratech)에 2021년 9월에 인수돼 존재감을 높였다.
세르비아의 디지털 온보딩 솔루션 스타트업 블링킹(Bliking)은 2017년 베오그라드대학 동료 교수로 만난 미로스라프 미노비치(Miroslav Minović)와 밀로시 밀로바노비치(Miloš Milovanović)가 합심해 설립했다. 이들의 공동 창업은 처음이 아니었다. 앞서 2015년에 회계 관리 프로그램과 카드 결제 리더기에 들어가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스타트업 프라우드소스아이티(ProudSourceIT)를 창업해 지금도 회사를 함께 운영하고 있다. 블링킹은 생체 인식과 블록체인 기술을 기반으로 본인인증 서비스 솔루션을 제공한다. 은행, 통신사, 보험사, 온라인쇼핑몰, 항공사뿐만 아니라 정부 기관에도 플랫폼에 기반한 소프트웨어를 제공하고 있다.
지금까지 레그테크는 디지털 뱅킹이나 암호화폐 등을 포괄하는 핀테크처럼 많은 관심을 받는 영역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핀테크를 보조하는 수단이나 핀테크의 일부처럼 취급됐다. 하지만 지난 몇 년 동안 서서히 커가면서 최근 더욱 주의 깊게 들여다봐야 하는 영역이 됐다. 규제는 스타트업에 걸림돌이 될 수 있지만, 이를 어떻게 관리하고 활용하는지에 따라서 기회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필자 이은서는 한국에서 법학을 전공했고, 베를린에서 연극을 공부했다. 예술의 도시이자 유럽 스타트업 허브인 베를린에 자리 잡고, 도시와 함께 성장하며 한국과 독일의 스타트업 생태계를 잇는 123factory를 이끌고 있다.
이은서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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