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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가봤어?
RM만 반한 게 아니야, ‘유영국 전시’ 수십 만 관람객 몰린 이유

탄생 110주년 맞아 작품 170여 점 전시하는 ‘대규모 회고전’…산을 보고, 내 안의 산을 찾아보는 시간

[비즈한국]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 ‘유영국: 산은 내 안에 있다’를 보러 갔다. 유영국 화백 탄생 110주년을 맞아 그의 작품 170여 점을 전시하는 대규모 회고전이다. 평일 낮임에도 사람이 무척 많았다. 5월 19일 시작해 한 달 만에 8만 명을 넘고, 지금은 누적 관람객 19만 명을 돌파했단다. 관람료가 무료인 점을 감안해도 이례적이다. 유영국이 한국 추상미술을 개척했던 선구자이긴 하지만, 우리(평범한 미술 문외한)가 언제부터 추상미술에 지대한 관심이 있었다고?

유영국 : 산은 내 안에 있다,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 2026.05.19. ~ 2026.10.25. 

전시의 인기엔 작가 특유의 색감과 절제된 구도가 존재한다. 이름값이 아니라 전시 포스터만 보고 단박에 보러 가고 싶어진 사람이 나뿐만은 아닐 것. 유명 스타의 이름값도 전시의 인기에 보탬이 되긴 했을 것으로 보인다. 미술에 조예가 깊은 애호가이자 컬렉터로 유명한 BTS의 RM이 유영국의 작품을 소장했고, 이번 전시에도 그 소장품을 대여했기 때문(전시장을 직접 찾아 꼼꼼하게 둘러본 건 물론이다).

1964년, 유영국이 생애 첫 개인전을 열었던 1964년 당시의 작품들을 만날 수 있는 1섹션. 개인전을 기점으로 그는 동인전 중심의 그룹 활동 대신 개인전을 통해서만 작품을 선보이겠다고 선언했다. 사진=정수진 제공

그렇다면 유영국은 누구인가. 1916년생인 작가는 김환기, 이중섭 등과 동시대에 활동했으나 대중에겐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었다. 전시장 입구에서 작가의 간단한 생애를 훑어볼 수 있는데, 그 이력이 상당히 특이하다. 경북 울진에서 태어나 일본 도쿄문화학원 유화과에 입학해 그림을 배우고 화가로 활동했다. 그러다 1943년 한국으로 귀국 후 행적에선 어선을 몰고, 양조장을 운영하며 가족의 생계를 돌본다.

1930~1940년대, 도쿄 문화학원 시절의 작품들. 서구 아방가르드 사조를 흡수하며 추상 미술에 흠뻑 빠지며 다양한 실험을 시도했다. 사진=정수진 제공

심지어 직접 라벨을 디자인해 내놓은 ‘망향소주’가 인기를 끌며 사업이 번창했다니, 부자로 호의호식하며 살았어도 그만일 것이다. 하지만 그는 “금(金)논도 싫고, 금산도 싫다. 이제 그림을 그리겠다”며 서울로 올라와 평생 화가로 살았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정해진 시간에 따라 기계처럼 그림을 그렸고, 술을 마신 후엔 붓을 들지 않았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무절제하고 방탕한 예술가의 면모는 일절 그에게서 찾아볼 수 없다.

작가의 이력 때문일까, 전시의 구성도 독특하다. 보통 회고전은 작가의 시작부터 끝까지 흐름순으로 구성된다. 유영국 전시는 48세에 첫 개인전을 열었던 1964년 당시의 작품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해, 초기 아방가르드 실험기 작품을 선보이던 초기로 역행하다가, 다시 1960~1970년대 추상의 절정을 이뤘던 시기를 지나 만년의 깊은 추상 세계를 보여주는 순서로 구성됐다.

‘아방가르드 예술을 찾아서’란 제목의 2섹션은 어두운 배경으로 작품의 몰입을 극대화했다. 사진=정수진 제공

전시를 보는 공간 섹션도 돋보인다. 디자이너 양태오가 전시 공간 디자인을 맡았는데, 섹션마다 작품의 집중도를 높이는 방법이 달라 눈길을 끈다. 아방가르드 실험기 작품들이 어두운 배경에서 강렬한 존재감을 발산하고, 벽에 창을 내고 바깥에 걸린 작품을 또 하나의 배경으로 끌어들여 가까이는 물론 멀찍이서 감상을 권유하는 식이다. 푸른색 카펫을 깔아 놓은 개방형 공간인 4부 섹션에선 크기가 작은 작품들을 한데 모으고 큰 평상을 놓아 자유로운 관람을 유도한다.

관람객이 많아 고요할 순 없지만, 작품들이 뿜어내는 기운은 고요하면서 깊다. “추상은 말이 없어 좋다”던 작가의 마음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사전지식이나 오디오 가이드의 해설이 없어도, 작품에 담긴 선과 면과 색감이 먼저 다가온다. 색감과 함께 캔버스 고유의 질감, 의외의 곳에 보이는 터치를 차근차근 들여다보자. 전체적으로 전시장을 둘러보고, 다시 해설을 곁들여 둘러보고, 이후에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 다시 들여다보면 좋을 만한 전시다. 흔한 말로, 사유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함께한 동행이 가을에 다시 오고 싶다고 말했는데, 나도 마찬가지. 깊어진 가을로 절로 산을 찾고 싶을 때, 다시 유영국의 ‘산’ 시리즈를 보면 울림이 남다를 것 같으니까.

약수동과 등촌동, 방배동으로 옮겨가며 실제 쓰던 작업실의 이젤과 의자 등을 함께 전시했다. 사진=정수진 제공

전시 작품은 유영국미술문화재단을 비롯해 국립현대미술관, 가나아트, 갤러리 현대, 한솔문화재단, 대구미술관, 국제갤러리, 전남도립미술관, 리움미술관, 삼성생명, PKM갤러리와 개인 소장가들의 대여로 이뤄져 있다. 아무래도 대중의 관심이 가장 쏠리는 곳은 RM의 소장품일 것이다. 여느 작품과 마찬가지로 ‘개인 소장’이라고만 쓰여 있지만, 미리 알고 작품 앞에서 인증샷을 남기는 이들이 많다. 모르면 주변 사람들이 친절하게 알려주기도 한다.

관람객들이 인증샷을 가장 많이 남기는 작품이 아닐까? RM의 소장품인 ‘Work’(1968). 사진=정수진 제공

작품 자체가 인상적인 만큼 아트숍 굿즈 퀄리티에 대한 기대도 높았는데, 만족스러울 굿즈들이 많은 편이다. 화장품 브랜드와 협업해 선보이는 한정판 아트 코스메틱을 포함해 유영국의 망향소주 스토리를 담은 소주잔 세트, 영국 라이프스타일 브랜드와 협업한 비비드한 색감의 텀블러 등 소장욕 자극하는 제품이 여럿이다. 서울시립미술관의 아치형 창문을 배경 삼아 유영국의 ‘산’을 모티프로 한 굿즈 전시 매대도 센스 넘친다.

깊은 색감과 절제된 구도가 깊은 울림을 주는 유영국의 작품은 여러 브랜드와 협업해 굿즈로 만나볼 수 있다. 사진=정수진 제공

이번 전시는 조선일보사와 서울시립미술관, 유영국미술문화재단이 공동 주최했다. 10월 25일까지 열리니, 전시를 보러 갈 시간은 아직 넉넉하다. 매달 둘째 주 금요일에 열리는 전시 연계 프로그램도 참고할 만하다. 시인 박준과 함께하는 8월의 낭독회를 비롯, 워크숍과 강연 프로그램이 준비돼 있다. 주식으로 신음하고, AI를 두려워하며, 온갖 세상의 속도와 소음에 지친 이들이라면, 말이 없이 깊은 울림을 주는 유영국의 추상 세계를 들여다보러 가보자. 평일은 저녁 8시까지, 매주 금요일은 저녁 9시까지 관람할 수 있다(매주 월요일 휴관). 현장 도슨트는 매일 오전 11시에 20명 선착순으로 진행되며, 오디오 가이드(유료)는 피아니스트 손열음과 방송인 피터 빈트의 음성으로 들을 수 있다.

정수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무비위크> <바앤다이닝> <KTX매거진> 등을 거치며 영화, 여행, 미식, 대중문화에 대해 취재하고 글을 썼다. 노후는 모르겠고, 오늘 이 순간 맛있는 거 먹고 마시고 즐기며 사는 게 제일이라 생각한다. 경쟁상대는 ‘노는 게 제일 좋아’를 외치는 뽀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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