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국내 석유화학 산업이 생존을 위한 대대적인 체질 개선에 속도를 내고 있다. 정부는 지난 2월 충남 대산 1호 프로젝트를 승인한 데 이어, 7월 22일 국내 최대 석유화학 단지인 전남 여수에서도 대규모 사업재편 계획을 발표했다.
‘여수 1호 프로젝트’는 여천NCC, 롯데케미칼, 한화솔루션, DL케미칼 등 4개 기업이 손을 잡고 범용 석유화학 설비를 대폭 감축하는 동시에 고부가가치 친환경 소재로 전환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정부 역시 금융과 세제, R&D, 인허가 특례, 그리고 고용 및 지역경제 지원을 포함해 7000억 원 이상의 전방위 지원 패키지를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이번 조치를 두고 석유화학 업계는 대대적인 환영의 뜻을 밝혔다. 그러나 기후 싱크탱크에서는 구조조정의 내면에 근본적인 탈탄소 로드맵이 부재하다는 지적을 내놓았다.

4개사 복합 통합법인 신설…범용 에틸렌 139만 톤 전격 셧다운
여수 1호 사업재편은 석유화학 4사의 업스트림(기초유분 생산)과 다운스트림(고분자 소재 생산) 구조를 하나로 묶는 빅딜이다. 구조 변경안에 따르면 한화솔루션과 DL케미칼은 각자 보유한 폴리에틸렌(PE) 및 접착·도료용 석유수지 등 다운스트림 사업 부문을 여천NCC에 현물출자한다.
이어 롯데케미칼은 여수 사업장의 나프타분해시설(NCC)과 PE, 폴리프로필렌(PP) 등 기초소재 사업을 물적분할한 후 분할 신설법인을 여천NCC와 합병해 ‘3사 균등 지분(3:3:3)’ 구조의 통합법인을 새롭게 출범시킨다.
통합의 핵심 목적은 공급 과잉인 범용 제품의 설비를 과감히 정리하는 데 있다. 신설 통합법인은 여천NCC가 보유한 3개의 NCC 설비 중 2호기(연간생산량 92만 톤)와 3호기(47만 톤)의 가동을 전면 중단한다. 여천NCC 1호기(90만 톤)와 롯데케미칼 여수 NCC(123만 톤)만 남고, 국내 에틸렌 생산 능력은 한꺼번에 총 139만 톤이 감축된다. 업계는 이를 통해 범용 제품의 설비 가동률을 끌어올리고 경쟁에 따른 적자 고리를 끊어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기업들도 자구노력 및 체질 개선에 대규모로 투자한다. 여천NCC 대주주인 한화솔루션과 DL케미칼은 재무구조 개선을 위해 2725억 원씩 총 5450억 원의 유상증자를 단행해 부채를 상환한다. 아울러 4개사는 사업재편 이행 및 고부가가치 전환을 위해 총 2532억 원 신규 투자를 단행한다. 산단 내 공급망 배관 및 스팀·용수 등 유틸리티 연결 인프라 구축에 1032억 원을 투입하고, 수액백·의료용 튜브용 LDPE(저밀도 폴리에틸렌) 및 포장 점접착제용 POE(폴리올레핀 엘라스토머) 등 첨단 화학소재 진출에 1500억 원을 집중 투자할 계획이다.

정부도 7000억 원 지원 패키지로 화답
정부도 7000억 원 이상의 맞춤형 패키지를 지원한다. 금융 부문에서는 산업은행 등 채권금융기관을 통해 설비 통합 및 고부가 전환에 필요한 신규 자금 최대 4500억 원을 공급하고, 2029년 말까지 협약 채무에 대한 상환을 유예하기로 했다. 무역보험공사를 통해서는 수입보험료를 최대 30% 할인하고 2000억 원 규모의 수입자금 대출 보증을 지원한다. 세제 지원과 제도 합리화 혜택도 제공한다. 법인세·지방세를 감면하고, 수입 나프타·원유에 무관세 적용을 연장하며, 공정위 기업결합 심사기간을 단축(120일→90일)해주는 등이다.
설비 감축에 따른 고용 불안과 지역경제 타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고용 안전망 지원책’도 다각도로 포함됐다. 정부는 기존 고용위기 선제대응지역 지정기간이 종료되더라도 지역 고용 상황이 개선되지 않을 경우 ‘고용위기지역’으로 지정해 지속적 지원을 검토하기로 했다.
또한 석유화학 산업 특성상 영업이익 적자 속에서도 가동률을 유지하느라 고용유지지원금을 받지 못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매출액 감소 요건을 대폭 완화했다. 구조조정 기간에도 필수 고부가 R&D 인력의 신규 채용을 예외적으로 허용하고, 재직자 대상으로 단순 생산직에서 AI 활용 공정 소프트웨어 개발 등으로의 직무 심화·전환 훈련비를 적극 보조한다.
이 같은 전방위 지원책에 업계는 즉각 환영의 뜻을 표명했다. 한국화학산업협회는 승인 직후 입장문을 내고 “대산 1호에 이은 여수 산단의 사업재편 승인으로 국내 석유화학 공급과잉 해소와 산업 경쟁력 회복에 크게 기여할 것”이라며 “정부 부처들이 긴밀히 협력해 신속한 승인과 금융·세제·고용·R&D 지원을 마련해 준 데 대해 깊이 감사드린다”고 발표했다.
엄찬왕 한국화학산업협회 상근부회장은 “석유화학이 국가 전략산업으로서 경쟁력을 회복할 수 있도록 지속적인 실효성 있는 지원이 이어지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대산 1호보다 기후 대책 후퇴…‘탄소 감축’ 실천 로드맵 부재
업계의 환호에도 기후 싱크탱크에서는 이번 재편안에 탈탄소 전략에 대한 고민이 빠졌다는 비판이 나온다. 지난 2월 승인된 대산 1호 프로젝트 지원 당시에는 바이오 납사 활용, 에탄 가스 도입 등 공정 자체의 탄소 배출을 줄이려는 구체적 기술 도입이 과제로 포함됐던 반면, 여수 1호 지원책에서는 R&D 지원 일부를 제외하면 저탄소 전환 및 공정 전기화에 대한 구체적 메시지가 거의 사라졌기 때문이다.
정석환 기후솔루션 석유화학팀장은 “현재 국가 차원에서 녹색전환(GX) 체계를 준비 중이고 하반기 경제성장전략 등에서도 석유화학 공정 전기화 등 화석연료 기반 산업의 구조 대전환을 강조하고 있다”면서 “반면 이번 구조재편 지원책은 금융 자금 공급과 설비 감축에만 몰두했을 뿐, 근본적 저탄소 전환과 공정 전기화를 위해 체질을 어떻게 바꿀 것인지에 대한 명확한 가이드라인이 비어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석유화학 저탄소 전환의 핵심은 결국 공정의 전기화인데, 산업부가 이 부분에 명확한 확신이나 구체적 실천 방안을 제시하지 못했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설비 폐쇄로 인한 온실가스 감축 효과가 본질적인 기술 혁신을 더디게 만들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김수강 사단법인 넥스트 수석연구원은 “생산량 조절을 넘어 설비를 완전히 중단함에 따라 탄소 배출 절대량 자체는 크게 줄어들 것”이라면서도 “이처럼 설비 셧다운만으로 국가 온실가스 감축목표(NDC)를 쉽게 달성하게 되면, 기업들이 공정 개선이나 혁신 기술 개발 같은 본질적인 탈탄소 노력은 오히려 안하게 될 것”이라고 진단했다.

‘다음 타자’는 울산 석유화학단지
여수 1호 사업재편이 타결되면서 정부와 업계의 시선은 석유화학 구조조정의 다음 퍼즐인 ‘울산 산단’으로 이동하고 있다. 하지만 울산 산단 재편은 대산이나 여수보다 까다로운 난관에 봉착했다. 에쓰오일(S-OIL)이 9조 2580억 원을 투입해 울산에 건립 중인 초대형 석유화학 프로젝트 ‘샤힌 프로젝트’의 가동이 임박했기 때문이다.
샤힌 프로젝트는 정유 공정 부산물을 직접 석유화학 원료로 바꾸는 원유직접크래킹(TC2C) 기술을 통해 엄청난 양의 범용 에틸렌과 석유화학 제품을 양산하게 된다. 대산과 여수의 전통 석유화학 기업들이 설비를 폐쇄하고 감산에 나서는 상황인데, 울산에서는 초대형 신규 범용 설비가 새로 문을 여는 역설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 같은 구조는 산단 간, 그리고 전통 석화사 간의 형평성 문제를 야기할 수밖에 없다. 국내 기존 기업들이 막대한 손실을 감내하며 범용 설비를 줄여도, 외국계 최대주주(아람코)를 둔 에쓰오일의 샤힌 프로젝트가 범용 제품을 대량 방출하면 국가 전체의 공급과잉 해소 및 탄소 감축 효과가 도로 상쇄되기 때문이다.
정석환 팀장은 “다른 산단 기업들이 고통을 감내하고 체질 전환을 해도, 한쪽에서 샤힌 프로젝트 같은 초대형 신규 설비가 들어서면 정부가 수조 원의 국비를 들여 만든 지원 패키지의 효과 자체가 불분명해진다”며 “샤힌 프로젝트가 범용 제품 감산에 참여하거나 물량을 양보하지 않는다면, 울산의 다른 석화 기업들이 순순히 구조조정에 동참하기 어려울 것이며 이는 전체 석화 구조조정의 걸림돌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