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한때 독일 배터리 산업의 자존심으로 불렸던 바르타(Varta)가 무너졌다. 바르타는 7월 24일 독일 슈투트가르트 지방법원에 자기관리형 예비 도산절차를 신청했다. 모회사인 바르타 AG뿐 아니라 바르타 마이크로배터리 GmbH, 바르타 마이크로 프로덕션 GmbH, 바르타 스토리지 GmbH 등 총 4개 법인이 신청 대상이다. 당장 회사를 청산한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법원의 감독 아래 채무를 조정하고 사업부 매각과 인력 구조조정을 추진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2024년 포르쉐가 구원투수로 등장해 부채를 줄이고 자금을 투입한 지 불과 2년 만이다.
바르타는 기술이 부족해 실패한 회사가 아니다. 1887년 납축전지 제조사를 시작으로 1904년 본격 설립된 이 회사는 가정용 건전지와 보청기용 버튼전지에서 오랜 경쟁력을 쌓았다. 무선이어폰 시대가 열리자 초소형 충전식 버튼전지 ‘코인파워(CoinPower)’를 앞세워 다시 전성기를 맞았다. 애플 에어팟 공급망에 진입하면서 낡은 건전지 회사라는 이미지를 벗고 유럽의 대표 배터리 기술주로 변신했다.
2021년 바르타 주가는 장중 181유로를 넘었다. 시장은 에어팟이 팔릴 때마다 바르타의 배터리도 함께 팔릴 것이라고 믿었다. 바르타 역시 그렇게 판단했다. 문제는 그 믿음을 바탕으로 회사의 생산과 투자를 지나치게 빠르게 키웠다는 데 있었다.
보청기 버튼전지로 쌓은 기술력, 에어팟 통해 급성장
바르타의 전성기를 만든 제품은 ‘코인파워’다. 완전무선이어폰은 작은 공간에 높은 에너지 밀도와 안정성을 갖춘 배터리를 넣어야 한다. 바르타는 이 분야에서 기술 우위를 확보했고 애플을 비롯한 글로벌 전자업체의 핵심 공급사로 자리 잡았다.

주문이 몰리자 바르타는 독일 노르들링겐 공장의 생산능력을 빠르게 확대했다. 높은 가동률을 전제로 설비와 인력을 늘렸고, 무선이어폰 시장이 계속 성장할 것이라는 전망에 맞춰 신규 투자를 단행했다. 애플이라는 세계 최대 고객의 주문은 투자 위험을 가려주는 보증서처럼 보였다.
바르타는 여기서 한발 더 나갔다. 초소형 전지의 성공을 바탕으로 고출력 원통형 리튬이온 배터리 ‘V4드라이브’ 개발에 뛰어들었다. 전동공구뿐 아니라 전기차와 하이브리드차용 배터리까지 만들겠다는 구상이었다. 유럽 각국이 아시아에 의존하던 배터리 공급망을 역내로 가져오려던 시기였고 독일 정부도 바르타의 투자에 지원을 약속했다.
코인파워 공장 증설과 자동차용 배터리 개발이 동시에 진행됐다. 기존 사업에서 벌어들인 돈으로 미래 사업을 키우는 전형적인 성장 전략이었다. 다만 여기에는 하나의 전제가 있었다. 애플을 중심으로 한 무선이어폰용 배터리 주문이 계속 늘어나야 했다.
문제는 그 전제가 2022년부터 흔들리기 시작한 것. 코로나19 기간 급증했던 전자기기 수요가 정상화되면서 무선이어폰 시장의 성장세가 둔화됐다. 고객사들은 재고 조정에 들어갔고 코인파워 주문량도 예상보다 줄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에는 유럽의 에너지와 원자재 가격까지 급등했다.
2022년 1~9월 바르타 매출은 전년 동기보다 8.3% 감소한 5억 7070만 유로를 기록했다. 같은 기간 조정 EBITDA는 1억 8247만 유로에서 6636만 유로로 63.6% 줄었다. 매출 감소 폭보다 이익 감소 폭이 훨씬 컸다. 주문량이 줄어 공장 가동률은 떨어졌지만 이미 늘려놓은 설비와 인력에 들어가는 비용은 그대로 남았기 때문이다.
대형 고객에게 원가 상승분을 모두 전가하기도 어려웠다. 애플과 같은 글로벌 기업에 부품을 공급한다는 것은 안정적인 물량을 확보한다는 뜻이지만, 동시에 가격과 발주량을 결정하는 힘을 고객에게 넘기는 일이기도 했다. 주문이 늘어날 때는 이 구조가 잘 보이지 않았다. 주문이 줄자 약점이 한꺼번에 드러났다.
구원투수인줄 알았는데…포르쉐의 ‘배신 아닌 배신’
바르타는 2023년부터 본격적인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대주주가 유상증자에 참여했고 은행들은 대출 조건을 조정했다. 회사는 인력을 줄이고 투자를 축소해 수익성을 회복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는 부채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보다 실적이 돌아올 때까지 시간을 버는 조치에 가까웠다.
바르타가 살아남으려면 여러 조건이 동시에 충족돼야 했다. 코인파워 주문이 다시 늘고, 가정용 에너지저장장치 판매가 성장하며, V4드라이브가 자동차 업체의 대규모 발주로 이어져야 했다. 실제로는 어느 하나도 계획대로 풀리지 않았다.
2024년 2월에는 사이버 공격까지 발생했다. 회사는 IT 시스템을 생산망에서 분리했고 일부 공장 운영이 중단됐다. 사이버 공격이 위기의 근본 원인은 아니었지만, 이미 현금이 부족한 회사에는 치명적이었다. 생산과 매출에 차질이 생겼고 재무제표 작성과 감사까지 늦어졌다.
결국 바르타는 같은 해 4월 기존 구조조정 계획만으로 회사를 정상화하기 어렵다고 인정했다. 시장 침체와 고객 주문 감소, 에너지저장장치 경쟁 심화, 사이버 공격이 동시에 겹쳤다. 첫 번째 구조조정이 시작된 지 1년 만에 다시 구조조정이 필요해진 것이다.
이때 등장한 곳이 포르쉐였다. 포르쉐가 관심을 가진 것은 바르타 전체가 아니라 V4드라이브였다. 이 배터리는 순간적으로 높은 출력을 낼 수 있어 고성능 하이브리드 스포츠카의 부스터용으로 적합했다. 바르타가 대규모 사업으로 키우지 못한 기술의 가치를 포르쉐가 알아본 셈이다.

2024년 마련된 구조조정안에 따라 바르타의 금융부채 약 4억 8500만 유로 가운데 2억 8500만 유로가 삭감됐다. 대신 기존 자본금은 전액 감자됐다. 바르타 주식을 보유했던 일반 주주는 사실상 투자금을 모두 잃었다. 이후 포르쉐와 기존 대주주, 채권단이 새로운 지분과 경제적 권리를 나눠 가졌다.
포르쉐는 동시에 자동차용 배터리 자회사의 경영권을 확보했다. 이후 회사 이름도 ‘V4스마트’로 바뀌었다. 바르타의 고성능 배터리 기술과 생산시설은 포르쉐의 통제 아래 들어갔지만, 포르쉐가 바르타의 나머지 사업과 부채까지 떠안은 것은 아니었다.
이 장면은 바르타 구조조정의 본질을 보여준다. 가장 가치 있는 기술은 고객사에 넘어갔고, 바르타 본체에는 가정용 건전지와 보청기용 전지, 에너지저장장치 사업, 여전히 무거운 부채가 남았다. 회사는 살아남았지만 미래 성장동력의 상당 부분을 잃었다.
애플만 믿고 지은 새 공장이 ‘과잉설비’로 전락
결정타는 핵심 고객의 이탈이었다. 바르타는 2026년 노르들링겐 공장 폐쇄와 약 350명 규모의 감원 계획을 내놨다. 회사는 고객 이름을 공개하지 않았지만, 독일 언론과 로이터 등은 에어팟용 배터리를 공급받던 애플이 바르타와 거래를 종료하기로 했다고 앞다투어 보도했다.

이는 단순히 매출처 하나를 잃은 사건이 아니었다. 바르타가 호황기에 늘려놓은 코인파워 생산설비의 존재 이유가 사라졌다는 의미였다. 애플 주문을 전제로 지은 공장은 애플이 떠나는 순간 과잉설비가 됐다.
바르타는 다시 수천만 유로 규모의 긴급 자금을 필요로 했지만 포르쉐와 기존 대주주는 추가 출자를 거부했다. 채권단도 그룹 전체를 살리기보다 사업성이 있는 부문을 떼어내는 쪽으로 움직였다. 가정용 건전지 사업은 별도 법인으로 분리해 인수하는 방안이 추진됐고, 자동차용 배터리 사업은 이미 포르쉐에 넘어간 상태다. 나머지 사업도 매각과 축소, 청산 가능성을 놓고 재편될 전망이다.
바르타의 실패를 중국 배터리 업체의 저가 공세로만 설명하기는 어렵다. 중국 기업들의 가격 경쟁력과 높은 독일의 에너지 비용, 전기차 시장 둔화가 불리하게 작용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더 직접적인 원인은 특정 고객에게 지나치게 의존한 사업구조였다.
바르타는 애플 공급사라는 지위를 독자적인 시장 지배력으로 착각했다. 애플이 요구하는 품질과 물량을 맞추기 위해 설비를 늘렸지만 발주 규모와 가격, 공급 기간을 결정하는 힘은 애플에 있었다. 호황기에는 양쪽이 함께 성장하는 것처럼 보였다. 위기가 닥치자 고객은 공급처를 바꿀 수 있었지만, 협력사는 고객 전용으로 지은 공장과 차입금, 고용 책임을 떠안을 수밖에 없었다.
대기업에 종속된 하청기업의 비극 되풀이
사실 이런 장면은 우리나라에서도 낯설지 않다. 완성차와 전자, 조선, 반도체 업종의 협력사는 대기업이 요구하는 품질과 납기를 맞추기 위해 전용 설비를 들이고 인력을 뽑는다. 특정 차종이나 스마트폰 모델, 생산라인에 맞춰 공장을 증설하기도 한다. 주문이 유지되는 동안에는 안정적인 협력사로 평가받고 매출도 빠르게 늘어난다.

하지만 발주가 줄거나 납품처가 바뀌면 상황은 달라진다. 대기업은 생산계획과 공급망을 조정하면 그만이지만, 협력사에는 해당 고객만을 위해 마련한 설비와 대출금이 남는다. 거래 중단에 대비해 다른 고객을 찾으려 해도 전용 부품과 전용 생산라인은 쉽게 다른 용도로 돌릴 수 없다. 협력사가 대기업과 함께 성장했다기보다, 대기업의 주문 안에서만 성장해왔다는 사실이 그제야 드러난다.
기술 공동개발도 마찬가지다. 협력사는 대기업의 요구에 맞춰 연구개발비와 인력을 투입하지만, 제품이 성공했을 때 확보하는 이익과 실패했을 때 떠안는 위험은 대칭적이지 않다. 성공하면 납품단가 인하 압박을 받고, 실패하면 개발비와 설비투자를 협력사가 감당하는 구조가 반복된다. 거래 관계가 끝난 뒤 기술이나 핵심 인력이 고객사 또는 다른 자본으로 넘어가는 사례도 적지 않다.
바르타는 130년 역사의 독일 배터리 명가였고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애플과 포르쉐의 공급망 안에서 바르타가 가진 협상력은 이름값만큼 크지 않았다. 글로벌 기업의 핵심 공급사라는 수식어는 독립적인 경쟁력을 증명하는 말처럼 들리지만, 반대로 그 기업의 결정 하나에 회사 전체가 흔들릴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바르타의 몰락은 배터리 기술 경쟁에서 진 회사의 이야기가 아니다. 거대 고객이 원하는 제품을 누구보다 잘 만들었지만, 그 고객 없이도 살아남을 사업구조를 만들지 못한 회사의 이야기다. 고객은 기술과 생산능력 가운데 필요한 부분만 가져갔고, 부채와 고용 책임은 공급업체에 남았다.
독일에서 벌어진 일이지만 결말은 지나치게 익숙하다. 대기업과 협력사가 함께 성장한다고 말하지만, 발주가 끊기는 순간 누가 진짜 주도권을 쥐고 있었는지가 드러난다. 바르타는 애플의 파트너였지만, 끝까지 대등한 파트너였던 적은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