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인공지능(AI)이 의료현장에 빠르게 확산되는 가운데 한국 정부와 WHO(세계보건기구)가 의료 AI의 책임 있는 활용을 위한 국제적 원칙을 제시했다. 그러나 AI를 활용한 진료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했을 때 누가 책임을 져야 하는지, 국제사회가 합의한 원칙을 각국의 의료현장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 등은 여전히 풀어야 할 과제로 남았다.
보건복지부와 WHO는 21일 서울 강서구 마곡 코엑스에서 열린 ‘2026 세계 바이오서밋’에서 ‘AI 헬스케어 서울선언’을 공동 선포했다. AI 기술을 보건의료에 활용하는 과정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환자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고, 기술 발전의 혜택이 특정 국가나 계층에 집중되지 않도록 국제사회가 협력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이번 행사에는 테드로스 아드하놈 게브레예수스 WHO 사무총장이 직접 참석했다. WHO 사무총장의 한국 방문은 2015년 마거릿 찬 전 사무총장 이후 11년 만이다. 테드로스 사무총장은 정은경 보건복지부 장관과 함께 서울선언을 선포하고 공동 기자간담회에서 의료 AI의 발전 방향과 규제 필요성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의료 AI 혁신 강조한 WHO…사고 발생 시 책임은?
서울선언은 AI의 역할을 의료 전문가 의사결정 보조로 규정하면서도 최종 판단과 책임은 인간에게 있다는 원칙을 제시했다. 여기에 AI 기술의 위험 수준에 비례한 규제체계를 마련하고 데이터 투명성과 개인정보 보호를 강화해야 한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테드로스 사무총장은 이날 정 장관과 공동 기자간담회에서 “서울선언의 두 가지 핵심 축은 인간의 존엄성과 글로벌 형평성 및 연대”라며 “AI 기술 확산에 앞서 엄격한 검증과 투명성, 데이터 보호, 사이버 보안이 담보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기조연설에서도 “속도가 곧 진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며 AI 기술의 발전 속도보다 실제 의료현장에서 누구에게 도움이 되고 누구를 보호하는지가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다만 서울선언을 실제 의료현장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적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대표적인 것이 AI를 활용한 진료 과정에서 의료사고가 발생했을 때 책임을 어떻게 배분할지의 문제다. 의료 AI의 활용이 확대되는 상황에서 위험 통제와 피해 구제에 관한 기준이 명확하지 않으면 결국 의료인과 환자가 책임을 떠안을 수 있다는 우려는 커진다
이에 테드로스 사무총장은 AI 기술을 칼에 비유하며 “칼은 빵을 자르는 데 쓰이지만 사람의 목숨을 해치는 데도 쓰일 수 있다”며 “그렇다고 인류가 칼 사용을 멈추지 않았던 것처럼 AI의 위험 때문에 잠재력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이어 “AI의 위험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규제와 책임성이 필요하다”며 “투명성 확보와 환자 동의, 위험도에 따른 차등적 규제를 통해 AI의 잠재력 활용과 위험 관리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만 의료 AI로 인한 피해가 발생했을 때 개발기업과 의료기관, 의료진 사이에 책임을 어떻게 나눌 것인지에 관한 구체적인 기준까지 제시되지는 않았다.

42개국 참석…국가별 이행체계 구체화 필요
서울선언의 실효성에 대한 질문도 제기됐다. 의료 AI의 책임 있는 활용이라는 방향성에 국제사회가 공감했지만 이를 실제 정책과 제도로 이어지려면 국가별 후속 조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기자간담회에서도 서울선언에 대한 국가별 서명 절차가 마련돼 있는지, 미국과 중국, 유럽연합(EU) 등 주요국의 참여가 제한적인 상황에서 국제적 협력을 얼마나 확대할 수 있을지에 대한 질문이 나왔다.
이에 기자간담회에 배석한 정경실 보건복지부 보건의료정책실장은 “이번 행사에는 유럽을 비롯해 전 세계 42개국 대표단이 참석했다”며 “개별 국가의 서명 여부보다 중요한 것은 보건의료 분야에서 AI의 책임 있는 활용에 대한 논의를 서울에서 공식적으로 시작했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다만 참여국별 서명 절차나 선언의 이행 상황을 점검할 구체적인 체계에 대한 설명은 나오지 않았다. 이번 선언을 한국 정부와 WHO가 공동 선포한 만큼 향후 국제사회가 얼마나 폭넓게 참여하고 구체적인 협력사업으로 이어질지가 실효성을 가늠할 기준이 될 전망이다.
정 장관은 “현재 정부가 추진 중인 글로벌 AI 허브 사업과 관련해 WHO와 긴밀하게 실무 협의를 진행하고 있다”며 “의료진 교육과 컨설팅, 표준 가이드라인 마련, AI 기술·모델 개발 및 임상 실증·검증, 중저소득국으로의 확산 사업 등을 단계적으로 구체화해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국제병원연맹(IHF)도 의료현장에서 AI를 안전하게 활용하기 위한 실행체계 마련에 나선다. 이왕준 IHF 차기 회장은 “IHF 산하에 글로벌 AI 헬스케어 리더십 센터를 설립하기로 합의했다”며 “내년 2월까지 구체적인 실행계획을 수립하고 전 세계 병원 리더들과 소통하면서 가이드라인을 의료현장에 적용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이 차기 회장은 정부 차원의 규제뿐 아니라 병원과 의료진이 실제로 수용하고 적용할 수 있는 실행 지침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결국 서울선언이 국제적 합의를 넘어 실질적인 성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국가별 정책과 의료기관의 운영체계에 이를 반영하는 후속 작업이 중요할 것으로 보인다.

빌 게이츠, 한국 사무소 개소 발표
이재명 대통령도 이날 서면축사를 통해 의료 AI의 안전하고 책임 있는 활용과 국제적 협력을 강조했다.
이 대통령은 인간의 생명과 직결되는 보건의료 분야에서 AI 기술은 안전하고 책임 있게 사용돼야 하며, 전 세계 보건 격차를 해소하는 데 활용돼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서울선언을 계기로 대한민국이 지향하는 AI 기반 보건의료의 가치가 전 세계로 확산되고, 인류의 생명과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국제적 협력이 강화되기를 기대했다.
빌 게이츠 게이츠재단 이사장은 영상 축사를 통해 한국 사무소 개소를 공식 발표했다.
게이츠 이사장은 “한국의 바이오 연구개발 생태계는 세계 최고 수준”이라며 “한국의 바이오테크, 제약, AI 분야의 글로벌 리더십을 지원하기 위해 서울에 게이츠재단 한국 사무소를 공식 개소한다”고 밝혔다.
이어 결핵과 말라리아 등 감염병 위협이 지속되는 가운데 글로벌 보건 분야에 대한 재정 지원이 감소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이러한 결정적인 순간에 대한민국과 같은 국가의 리더십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또 AI가 감염병 진단과 신약 후보물질 발굴, 질병 예측 등에 걸리는 시간을 획기적으로 단축할 잠재력이 있다며 한국과의 협력을 통해 글로벌 보건 문제 해결에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