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흔히 블랙홀은 모든 걸 빨아들이고 파괴하는 죽음의 영역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오히려 이런 블랙홀 주변에서 새로운 행성이 탄생하고 있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오히려 블랙홀이 새로운 행성을 싹틔우는 놀라운 탄생의 현장일 수 있다니. 심지어 초대질량 블랙홀 하나 주변에서는 수천, 수백만 개도 아닌 수천만 개 수준의 행성들이 쏟아질 수 있다.
보통 행성은 당연히 별 주변에서 태어난다. 우리 태양계도 46억 년 전 갓 태어난 태양을 둘러싸고 있던 가스와 먼지 원반에서 시작됐다. 원반 속 작은 먼지 알갱이가 서로 부딪치고 뭉치면서 조금 더 큰 자갈과 암석으로 성장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작은 미소행성체들이 서로 충돌하고 합쳐지면서 지구와 목성 같은 행성이 탄생했다.
그런데 초대질량 블랙홀 주변에서도 이런 비슷한 원반이 형성된다. 은하 중심 블랙홀이 주변의 가스와 먼지를 빨아들이면서, 물질은 곧바로 블랙홀 속으로 떨어지지 않는다. 블랙홀 주위를 매우 빠르게 돌면서 납작하고 거대한 강착 원반을 형성한다. 특히 블랙홀이 물질을 게걸스럽게 집어삼키는 은하 중심을 활동성 은하핵이라고 하는데, 이런 블랙홀 주변의 원반 안쪽은 매우 뜨겁고 밝다. 가스는 강력한 엑스선, 자외선을 내뿜고, 먼지는 높은 온도를 버티지 못하고 대부분 증발해버린다. 당연히 이런 환경에서는 행성을 만들지 못한다.

하지만 중심의 블랙홀에서 충분히 멀리 벗어난 원반의 바깥쪽으로 가면 상황이 완전 달라진다. 초대질량 블랙홀에서 약 3~30광년 정도 떨어진 곳에 가면 온도가 크게 떨어지는 영역이 존재한다. 이곳에는 가스와 먼지가 어둡고 두꺼운 도넛처럼 블랙홀을 둘러싸고 있다. 그래서 먼지 토러스라고 한다. 중심의 블랙홀과 강착원반 안쪽에서 새어나오는 강력한 복사 에너지도 두꺼운 토러스에 가로막힌다. 그 너머에는 온도가 충분히 내려가고 규산염, 금속, 얼음이 살아남는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행성이 탄생할 수 있다.
태양 주변의 원시 행성 원반은 보통 수백 AU 규모에 머무른다. 하지만 활동성 은하핵의 먼지 토러스는 수 광년, 수십 광년 규모로 펼쳐져 있다. 크기만 단순 비교해도 평범한 행성 원반보다 수천 배는 더 거대하다. 당연히 그 안에 있는 재료의 양도 압도적으로 많다. 최근 천문학자들은 바로 이곳에서 압도적으로 많은 행성들이 쏟아져 나올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했다.
태양 질량의 1000만에서 10억 배에 이르는 거대한 초대질량 블랙홀을 가정하고 그 주변에 자기장이 원반을 지탱하는 모델을 만들었다. 사실 행성을 만들 때 자기장도 굉장히 중요한 요소다. 원반의 가스와 먼지가 너무 무거워지면 행성을 하나하나 따로 만들기보다는 그냥 원반 전체가 통째로 한 덩어리로 붕괴해버릴 수 있다. 그러면 오히려 행성을 만들기는 어렵다. 그런데 강한 자기장이 유지되고 원반을 부풀리고 지탱해준다면, 원반 전체가 한 덩어리로 한꺼번에 붕괴하는 것을 막아준다. 그리고 원반 속의 먼지 알갱이들이 살아남아 따로따로 독립된 행성 조각으로 성장할 수 있다.

이번 시뮬레이션으로 확인한 블랙홀 주변 환경에서 벌어지는 과정은 상당히 흥미롭다. 처음에는 고작 1마이크로미터 수준의 작은 먼지 알갱이들이 떠돈다. 사람 머리카락 굵기의 수십에서 수백분의 1밖에 안 되는 스케일이다. 이 작은 알갱이들이 서로 충돌하면서 밀리미터, 센티미터 수준의 크기로 성장한다. 은하 중심 블랙홀의 질량, 그리고 블랙홀에서 떨어진 거리에 따라 알갱이가 덩치를 키우는 시간은 수천 년에서 수억 년까지 크게 달라진다.
그런데 먼지가 더 커지기 시작하면 새로운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원반의 가스 물질은 압력으로 인해 점차 속도가 느려진다. 먼지 알갱이는 가스와 서로 힘을 주고받으면서 계속 이동한다. 이 과정에서 먼지가 조금 더 많이 모인 곳이 더 강한 힘으로 주변의 먼지를 더 많이 끌어모으기 시작한다. 마치 도로 위에서 자동차 한두 대가 느려지면서 뒤에 차량이 계속 누적되는 것처럼, 먼지 알갱이도 원반의 특정한 영역에 집중되기 시작한다. 이렇게 쌓인 먼지는 길쭉하게 밀집되고 하나의 필라멘트를 형성한다.
이 필라멘트 하나에 들어 있는 순수한 먼지의 양은 놀라울 정도로 무겁다. 목성 질량의 수만에서 수백만 배에 이를 수 있다. 심지어 태양 질량과 맞먹을 수도 있다. 그런 엄청나게 많은 양의 먼지 입자들이 원반 한복판에 길쭉한 띠를 형성하고 모이게 된다. 하지만 이 필라멘트가 곧바로 하나의 행성으로 뭉쳐지는 건 아니다.
밀도가 충분히 높아지면 이제 필라멘트도 자신의 중력을 버티지 못하고 붕괴한다. 그러면서 수많은 더 작은 덩어리들로 분화한다. 태양계에서 소행성과 미소행성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비슷하지만 규모는 훨씬 크다. 이번 시뮬레이션에 따르면 이런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행성의 질량은 대체로 목성급이다. 그리고 원반 전역에서 태어난 모든 행성의 수를 헤아려보면 무려 수천만 개에 이를 수 있다. 은하 중심 난폭한 블랙홀 주변에서 목성 수준의 무거운 행성들이 우리 대한민국의 인구만큼 탄생하는 것이다.
이렇게 탄생한 초기의 행성들은 주변에 남아 있던 작은 먼지와 자갈을 더 쓸어담는다. 이 과정을 자갈 축적(Pebble accretion)이라고 한다. 천체가 자라면서 중력이 더 강해지고 더 많은 물질을 붙잡을 수 있다. 이렇게 성장하면 약 1000년에서 1000만 년 사이에 행성은 덩치를 두 배까지 불릴 수 있다. 일반적인 원시 행성 원반에는 평균 수백만 년 정도 걸리는 일이다. 하지만 활동성 은하핵 주변 원반에서는 재료가 풍족하다 보니 조건에 따라서는 고작 1000년 만에 행성의 덩치를 빠르게 불릴 수 있다.
바로 여기에서 블랙홀 주변과 평범한 별 주변에서 중요한 차이가 발생한다. 평범한 별 주변에서는 행성이 무한정 성장하지 못한다. 성장하는 행성이 점차 주변 원반을 말끔히 청소하고 원반에 텅 빈 틈이 벌어진다. 주변에 자갈이 더 이상 접근할 수 없게 되고 성장은 제한된다. 그래서 보통 별 주변의 행성들은 어느 정도 질량이 무거워지고 나면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이것을 자갈 고립 질량(Pebble Isolation Mass)이라고 한다.
그런데 블랙홀 주변은 재료가 풍족해도 너무 풍족하다. 재료가 주변에 널려 있다 보니 행성은 성장을 멈추지 않고 계속 무거워진다. 심지어 수소 핵융합이 가능해지는 시작 질량을 넘어선다. 행성과 별의 경계가 무너지는 셈이다. 결국 처음에는 고작 먼지 알갱이, 자갈, 돌멩이를 뭉쳐서 행성으로 시작했지만, 성장을 멈추지 못한 바람에 진짜 별이 될 때까지 성장을 이어가게 된다. 블랙홀 주변에서는 정말 행성이 별로 성장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 천체들의 화학 조성을 보면 더 기묘하다. 천문학에서 말하는 먼지는 사실 단순한 흙먼지와 다르다. 규소, 산소, 철, 마그네슘과 같이 수소, 헬륨보다 더 무거운 원소로 이루어진 고체 입자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블랙홀 주변에서 갓 태어난 천체는 사실상 이런 중원소만으로 반죽된 덩어리라고 볼 수 있다. 중원소 비율이 사실상 100%인 것이다!

블랙홀에서 3광년 이내에 가까운 일부 영역에서는 질량은 목성 수준이지만 가스 행성이 아닌, 통째로 암석과 금속만으로 이루어진 정말 무거운 고체 덩어리도 만들어질 수 있다. 조금 더 벗어난, 30광년 너머의 영역부터는 애초부터 수소 핵융합이 가능한 시작 질량을 넘어서는 순수한 암석질 천체도 탄생할 수 있다. 놀랍게도 이 거대한 덩어리들은 질량은 별과 맞먹지만 수소로 이루어진 플라즈마 덩어리가 아니다! 거의 대부분 규산염과 금속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금속 덩어리다. 어쩌면 영화 속 데스스타와 더 비슷할지도 모른다.
과연 그 모습은 어떨까. 중심부는 극도로 압축돼서 마치 중성자별이나 백색왜성처럼 축퇴 상태에 들어갈지 모른다. 표면은 알루미늄-26과 같은 방사성 동위원소가 열을 방출하면서 암석 전체를 뜨겁게 녹일 수 있다. 그러면 표면은 행성 전체를 뒤덮은 마그마의 바다가 가득하고, 일부 증발한 암석에서 새어나온 기체가 행성에 얇게 깔린 대기를 형성할 수 있다. 천문학자들은 블랙홀 주변을 맴돌지 모르는 이 기묘한 천체를 ‘축퇴한 거대 용암 방울’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정말 이런 기묘한 천체가 우주에 존재하는지 관측으로 확인할 수 있을까? 아직은 방법이 마땅치 않다. 평범한 별 곁을 도는 행성과 달리 압도적으로 강력한 블랙홀 주변을 맴도는 행성을 찾기란 쉽지 않다. 활동성 은하핵 자체가 일단 우리 은하 너머 아주 먼 거리에 있고, 행성에 비해 압도적으로 밝고 강력하기 때문에 그 주변에 숨은 작은 행성 조각을 직접 관측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행성이 블랙홀 주변 작은 엑스선 광원 앞을 가리고 지나갈 때 엑스선의 밝기가 줄어드는 일종의 트랜짓(transit)을 노려볼 수 있다. 그동안 블랙홀 주변에서 행성 후보를 거론한 연구들이 몇 개 있지만, 아직 공식적으로 최종 확인된 사례는 없다.
하지만 물리적 조건을 보면 블랙홀이야말로 우주에서 가장 열정적으로 가장 많은 수의 행성을 꾸준히 만들어내는지도 모른다.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주인공이 방문한 외계행성도 블랙홀 곁에서 블랙홀 강착 원반의 빛을 받아 온도를 유지하는 기묘한 환경이었다.
우리는 그동안 ‘행성’이라고 할 때 너무 고리타분한 고정관념에 갇혀 있었는지 모른다. 태양 곁을 맴도는 지구처럼 중심에 평범한 별을 두고 궤도를 도는 행성은 오히려 우주 전체로 보면 가장 드문 사례일 수 있다. 우주에는 중심에 별 없이 홀로 우주 공간을 떠도는 떠돌이 행성이 압도적으로 많다. 심지어 은하 중심 초대질량 블랙홀 주변에서 쉬지 않고 새로운, 더 기묘한 금속 덩어리 행성들이 쏟아지고 있을지 모른다. 단순히 누가 더 수가 많고 적은지를 기준으로 한다면, 오히려 우리처럼 별 곁을 맴도는 행성이 더 드물고 희귀한, 기묘한 세계인지도 모른다.
참고
https://iopscience.iop.org/article/10.3847/1538-4357/ae6f0b
필자 지웅배는? 고양이와 우주를 사랑한다. 어린 시절 ‘은하철도 999’를 보고 우주의 아름다움을 알리겠다는 꿈을 갖게 되었다. 현재 세종대학교 자유전공학부 조교수로 강연과 집필 등 다양한 과학 커뮤니케이션 활동을 함께 하고 있다. ‘천문학자의 쓸모없음에 관하여’, ‘우리는 모두 천문학자로 태어난다’, ‘우주를 보면 떠오르는 이상한 질문들’ 등의 책을 썼으며, ‘나는 어쩌다 명왕성을 죽였나’, ‘퀀텀 라이프’, ‘UFO’ 등을 번역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