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보건당국이 관리하는 희귀질환은 1389개에 이른다. 환자 수가 적은 초희귀·극희귀질환으로 갈수록 치료제와 질환 정보를 찾기 어렵고 같은 질환을 앓는 환자를 만나는 일조차 쉽지 않다.
이들에게 환우회는 단순한 친목 모임을 넘어선다. 먼저 같은 길을 걸어온 환자의 경험을 나누고, 흩어져 있던 문제를 모아 의료진이나 정부에 전달한다. 연구자와 환자를 연결하거나 제도 개선을 요구하는 역할도 맡는다.
망막색소변성증(RP)과 저인산효소증(HPP) 환우회의 활동은 희귀질환 영역에서 환자단체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전국서 모인 RP 환자 100여 명…“얼굴 보는 것 자체가 힘”
지난 8월 29일 경기 성남에서 열린 실명퇴치운동본부의 1박 2일 여름캠프에는 서울을 비롯해 부산·대구·인천·광주·경남 진해 등 전국에서 RP 환자와 가족 100여 명이 모였다.
기자가 찾기 전 예상했던 무겁고 침통한 분위기와는 달랐다. 진행성 시각질환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인 자리였지만 행사장에서는 오랜만에 만난 참가자들이 서로 안부를 묻고 웃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식사와 프로그램을 함께하면서 각자의 일상과 치료 경험도 자연스럽게 오갔다.
RP는 유전적 원인으로 망막의 광수용체 기능이 점차 떨어지는 질환이다. 질환이 진행되면서 시야가 좁아지고 시력이 저하돼 실명에 이를 수 있지만 현재 적용할 수 있는 치료법은 제한적이다.
캠프는 친목 행사에만 머물지 않았다. 글로벌 치료제 개발 동향과 세포·유전자 치료 기술에 대한 강연이 이어졌고, 환자들은 자신의 유전자 변이와 향후 치료 가능성 등을 직접 질문했다. 환자와 가족이 최신 치료 정보를 접하고 연구진과 직접 소통하는 자리였다.
최정남 실명퇴치운동본부 회장은 올해 행사 개최 자체를 고민했다고 했다. 운영 부담이 커지면서 한 해 쉬어가는 방안을 검토했지만 결국 환자들이 서로 얼굴을 마주하는 자리는 계속돼야 한다고 판단했다. 최 회장은 “우리 가족들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마주하는 것이 서로에게 가장 큰 힘이 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정진향 한국희귀·난치성질환연합회 사무총장 역시 희귀질환 환자에게 환우회가 필요한 이유를 고립에서의 탈출로 꼽았다. 정 사무총장은 “환자 한 명이 감당하던 어려움을 밖으로 끌어내 함께 해결할 문제로 만드는 것이 환우회의 중요한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산정특례 유지하려고 검사했더니 시력이…”
환자들이 한자리에 모이면서 개인이 의료 현장에서 겪은 어려움도 자연스럽게 수면 위로 올라왔다.
광주에서 온 RP 환자 최금식 씨는 산정특례 재등록 과정에서 겪은 경험을 꺼냈다. 최 씨는 최근 병원에서 망막전위도검사(ERG)를 받았다. ERG는 빛 자극에 따른 망막의 전기적 반응을 측정해 망막 기능을 확인하는 검사다.
최 씨는 검사 이후 색을 구분하는 능력과 시력이 이전보다 떨어졌다고 주장했다. 그는 “산정특례를 유지하려고 검사를 받았는데 이후부터 색깔을 구분하기 어렵고 시력이 떨어졌다”며 “다시 검사를 받아야 할까 봐 두렵다”고 호소했다.
산정특례는 희귀질환 등 진료비 부담이 큰 환자의 건강보험 본인부담을 낮춰주는 제도다. 희귀질환자는 해당 질환 진료 시 본인부담률이 10%로 낮아지며 일반적인 적용기간은 5년이다. 재등록하려면 적용기간 종료 시에도 질환이 남아 있고 계속 치료 중이면서 해당 질환의 등록기준을 다시 충족해야 하며, 신청일 기준 1년 이내 검사기록이 인정된다. 색소망막염 진단에는 ERG를 비롯해 시력·시야검사와 안저검사, 유전자검사 등이 활용된다.
다만 최 씨가 호소한 시력 변화와 ERG 검사 사이의 인과관계가 의학적으로 확인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미 진행성 질환으로 진단받은 환자가 특례 유지를 위해 다시 검사를 받아야 한다는 부담이 있는 만큼, 재등록 과정에서 필요한 검사의 범위와 대체 가능한 방법을 보다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 사무총장은 “희귀질환 환자들이 산정특례 재등록 과정에서 겪는 검사 부담을 줄일 필요가 있다”며 “주치의 소견서 등 다른 방법으로 갈음할 수 있는지 정부에 환자들의 목소리를 전달하고 제도 개선을 건의하겠다”고 밝혔다.

의료진 불러 함께 공부하는 HPP 환우회
환우회의 또 다른 역할은 환자와 의료진 사이의 정보 격차를 좁히는 것이다.
저인산효소증(HPP)은 뼈와 치아의 무기질화에 문제가 생기는 희귀 유전질환이다. 국내 환자는 약 50명으로 추산될 만큼 적다. 성인 환자는 골절이나 근골격계 증상을 일반적인 골다공증 등으로 오인할 가능성도 있다.
HPP 환우회는 소아청소년과·재활의학과·내분비내과·소아치과 등 여러 진료과 의료진을 초청해 환자와 가족이 질환을 공부하는 자리를 마련해왔다. 자신의 증상을 이해하고 실제 진료 과정에서 무엇을 확인해야 하는지를 의료진에게 직접 묻는다.
환자단체와 의료진의 문제 제기가 제도 변화로 이어진 사례도 있다.
HPP에서는 외상이나 심한 충치가 없는데도 어린 나이에 유치가 빠지는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 이를 단순한 치과 문제로 여기면 질환을 의심하지 못해 진단이 늦어질 수 있다. 이에 환우회와 의료진은 영유아 구강검진 단계에서 유치 조기 탈락 여부를 확인할 필요성을 제기해왔다.
이 같은 문제 제기가 이어지면서 영유아 구강검진 문진 과정에 유치 조기 탈락 여부를 살펴볼 수 있는 항목이 반영됐다. 문진 항목 하나만으로 HPP를 진단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의료진과 보호자가 질환을 의심하고 정밀검사로 연결할 수 있는 단서를 마련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강정민 연세대학교 치과대학병원 소아치과 교수는 “외상이나 충치 없이 네 돌 이전에 유치가 빠지는 것은 HPP를 의심할 수 있는 중요한 신호”라며 “구강검진 단계에서 이런 부분을 확인할 수 있게 되면 환자가 여러 의료기관을 전전하는 진단 방랑을 줄이고 보다 이른 시기에 정밀검사로 연결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서로 위로하던 모임에서 의료·연구·정책의 연결고리로 발전
희귀질환에서 환자 수가 적다는 것은 단순히 시장 규모가 작다는 의미에 그치지 않는다. 해당 질환을 경험한 의료진과 축적된 연구자료가 적고, 정책을 만드는 과정에서도 환자의 경험이 충분히 드러나기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빈틈에서 환우회의 역할은 커지고 있다.
처음 진단받은 환자에게는 같은 질환을 먼저 경험한 사람을 만나는 창구가 되고, 치료법을 찾는 환자에게는 의료진과 연구자를 연결하는 통로가 된다. 여러 환자가 반복해서 겪는 문제가 확인되면 이를 모아 정부에 제도 개선을 요구하기도 한다.
최정남 회장이 환자들과 함께 치료제 연구에까지 뛰어든 사례는 환우회의 역할이 연구 영역으로 확장된 경우다.
극희귀질환 환자에게 당장 새로운 치료제만큼 절실한 것은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시작된 만남은 질환 정보를 쌓고 의료진과 환자를 연결하며 때로는 제도를 바꾸는 목소리로 커진다. 절망 속에서 만난 ‘또 하나의 가족’이 서로를 위로하는 데서 한발 더 나아가 의료와 정책을 움직이는 연대가 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