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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스타트업열전
젠슨 황 ‘픽’ 독일 스타트업…엔비디아 다음 승부처는 ‘산업 AI’

공장 병원 위성 분야 선정, 독일 제조역량에 AI기술 결합 선점…‘엔비디아 생태계’에 갇힐 우려도

[비즈한국] “당신의 회사에 투자합니다! 당신의 회사에도요! 또 당신의 회사도요!”

지난 14일(현지시각) 젠슨 황 엔비디아 CEO는 영국 런던의 한 행사장 무대에 올라 이렇게 외쳤다. 황 CEO는 2004년 방청객 전원에게 자동차를 선물한 미국 토크쇼 진행자 오프라 윈프리를 흉내 내듯 신약 개발, 양자컴퓨팅 등 영국 스타트업 5곳에 대한 지분 투자를 공언했다. 그러고는 이 스타트업 CEO들을 무대에 올려, 자신의 투자자였던 돈 밸런타인의 조언을 그대로 전하겠다며 이렇게 덧붙였다.

“내 돈을 날리면 널 죽여버리겠다.”

무대는 웃음바다가 됐다. 밸런타인은 1993년 막 창업한 엔비디아에 투자한 세쿼이아 캐피털의 창업자다. 30여 년 전 투자를 받던 창업자가 이제는 투자자가 되어 같은 말을 돌려준 셈이다.

황 CEO는 전날 파리에서도 프랑스 스타트업 4곳에 투자 계획을 발표하며 자신이 “유럽 최대의 VC(벤처 투자자)”라고 농담을 던졌다.

그의 마지막 행선지는 베를린이었다. 19일 베를린에서 프리드리히 메르츠 총리와 나란히 무대에 오른 황 CEO는 독일에서도 스타트업 4곳에 대한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이미 유럽스타트업열전에서 한 차례 소개한 바 있는 애자일 로보츠(Agile Robots)를 비롯해 미렐로(Mirelo), 리플렉스 에어로스페이스(Reflex Aerospace), 아벨리오스 메디컬(Avelios Medical) 등 4곳이 엔비디아의 선택을 받았다. 엔비디아의 지갑을 연 이 업체들엔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10월 21일(현지시각)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인베스트 인 저머니 서밋’에서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왼쪽)와 젠슨 황 엔비디아 CEO가 대담하고 있다. 사진=엔비디아 블로그

제조업의 나라가 엔비디아를 부른 이유

베를린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파리와 런던의 행사는 엔비디아가 직접 주최한 자리였지만, 베를린은 독일 정부가 차린 무대였다. 19일 열린 ‘인베스트 인 저머니 서밋’은 독일 연방정부가 처음 연 투자 유치 행사다.

그도 그럴 것이 독일의 사정은 절박하다. 2023년과 2024년 2년 연속 역성장한 독일 경제는 지난해 겨우 플러스로 돌아섰지만, 같은 해 제조업 일자리가 12만 개 넘게 사라졌다. 독일산업연맹은 2차 대전 이후 가장 심각한 위기라고까지 했다. 제조업의 나라가 다시 투자를 부르기 위해 연 자리에서, 황 CEO는 가장 중요한 손님일 수밖에 없었다.

이날 두 인사가 마주 앉은 곳은 옛 화력발전소를 개조한 행사장 ‘크라프트베르크(Kraftwerk)’였다. 행사에서 메르츠 총리와 연방 경제에너지부, 연구기술우주부는 엔비디아와 공동 의향서에 서명했다. 독일의 엔지니어링·제조 역량을 AI와 결합해, 로봇과 자율 시스템을 움직이는 ‘피지컬 AI’ 모델을 함께 개발하겠다는 내용이다.

메르츠 총리는 이 자리에서 객석의 중소·중견기업, 이른바 ‘미텔슈탄트(Mittelstand)’ 경영자들을 직접 불러냈다. 그는 “독일의 가장 큰 강점은 미텔슈탄트”라며 “AI에 문을 열고 여러분의 데이터를 활용하라”고 주문했다. 앞선 행사장에서는 가끔 농담도 던졌던 황 CEO도 이 자리에서는 진지했다. 그는 독일 제조 기업들이 쌓아온 지식을 두고 “그 지식은 여러분의 것이고, 대체될 수 없다”며 “AI는 당신의 역량을 증강할 뿐, 대체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21일 황 CEO는 베를린 크로이츠베르크에서 열린 엔비디아 개발자 행사 ‘GTC 베를린’의 기조연설 무대에 섰다. 그는 AI를 소프트웨어 유행이 아닌 새로운 산업혁명이자 하나의 제조업이라고 규정하며, 유럽의 제조·기계 기반이 휴머노이드 로봇과 산업 AI에서 주도권을 쥘 수 있다고 강조했다.

로봇부터 위성까지, 엔비디아가 고른 4장의 카드

10월 21일(현지시각) ‘GTC 베를린 2026’에 참석해 기조연설 하는 젠슨 황. 사진=엔비디아 블로그

황 CEO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그는 이날 애자일 로보츠의 휴머노이드 ‘애자일 원’에 엔비디아 로봇 플랫폼을 얹은 연구용 모델 ‘애자일 원 SN’을 공개했다. 개발자들이 로봇 실험 환경을 꾸리는 시간을 몇 주에서 며칠로 줄이는 것이 목표다. 독일항공우주센터(DLR) 출신들이 2018년 세운 애자일 로보츠는 4곳 중 엔비디아와 가장 깊이 얽힌 회사다. 엔비디아의 로봇 AI 모델과 클라우드로 자사 로봇을 학습시킨다.

2023년 창업한 독일 스타트업 미렐로는 영상에 어울리는 효과음을 AI로 만들어 낸다. 발자국 소리와 문 닫히는 소리, 빗소리 등을 화면 속 움직임에 맞춰 생성하는 식이다. 두 공동창업자는 아마존 연구소에서 만난 AI 연구자이자 음악가다. 지난해 12월 인덱스벤처스와 앤드리슨 호로위츠(a16z)가 공동 주도한 4100만 달러(약 545억 원) 시드 투자를 받았다. 시드 단계로는 이례적인 규모다. 회사는 이전부터 엔비디아의 컴퓨팅 자원과 스타트업 지원 프로그램을 썼다고 밝혔다.

베를린에 본사를, 뮌헨에 생산 공장을 둔 리플렉스 에어로스페이스는 2021년 창업한 위성 제조사다. 지구 관측, 정찰, 통신용 위성은 보통 만드는 데 수년이 걸리지만, 이 회사는 약 1년 만에 만들어 낸다. 지난해 11월 5000만 유로(약 750억 원) 규모의 시리즈A 투자를 유치했다. 리플렉스는 독일 방산 대기업 라인메탈과 핀란드 위성기업 아이스아이(ICEYE)의 합작사가 추진하는 독일 우주 정찰 체계 구축에 초기 파트너로 참여하고 있다. 엔비디아의 투자 계획이 성사되면 생산 확대와 위성 내 데이터 처리 플랫폼 개발에 쓰일 예정이다.

아벨리오스 메디컬은 이 중 가장 의외의 이름이다. 2020년 뮌헨에서 창업한 이 스타트업은 클라우드 기반 병원정보시스템을 만든다. 2025년 세쿼이아가 주도한 3000만 유로(약 450억 원) 시리즈A를 유치했다. 병원정보시스템은 진료와 행정 기록이 쌓이는 핵심 기반이다. 아벨리오스는 처음부터 임상 데이터를 구조화해 기록하도록 설계했고, 이는 병원 업무에 AI를 적용할 때 중요한 접점이 될 수 있다. 엔비디아가 파리에서 의료 플랫폼 독토리브(Doctolib)를 고른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타이밍도 좋다. 독일어권 병원 500곳 이상이 쓰는 SAP의 병원 소프트웨어가 2030년이면 지원이 종료돼 병원들이 시스템을 통째로 바꿔야 하는 시기가 오고 있다.

엔비디아는 회사별 선정 이유를 밝히지 않았다. 하지만 4곳을 나란히 놓으면 공통분모가 보인다. 모두 범용 AI만으로는 따라 하기 어려운, 수년의 전문성이 쌓여야 하는 분야를 다룬다. 그리고 이 분야들은 AI가 본격적으로 쓰이는 순간 엔비디아 칩을 대량으로 필요로 하는 시장이 된다. 화면 속 챗봇 경쟁에서 미국과 중국에 밀렸지만, 공장과 병원, 위성이라는 ‘물리 세계’에서는 유럽이 데이터와 노하우로 주도권을 잡을 수 있다. 엔비디아는 거기에 미리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다.

투자자이자 공급자라는 양날의 검

이번 순방에서 엔비디아가 이름을 밝힌 투자처는 파리 4곳, 런던 5곳, 베를린 4곳 등 모두 13곳이다. 황 CEO는 엔비디아가 지난 1년간 유럽에 80억 달러(약 10조 6000억 원)를 투자했고, 수십억 달러를 더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엔비디아의 투자는 유럽 스타트업에 자금과 네트워크, 기술 협력을 한번에 안겨준다. 그러나 엔비디아는 투자자이면서 핵심 기술 공급자다. 스타트업이 엔비디아 플랫폼 위에서 클수록 한 회사의 생태계에 묶일 수 있다. 칩 회사가 투자한 기업이 다시 그 칩을 사는 ‘순환 투자’라는 비판도 나온다. 황 CEO는 이런 지적을 일축하지만, 투자 금액도 칩 구매 약정 여부도 공개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판단할 근거가 부족하다.

애자일 로보츠의 휴머노이드 ‘애자일 원’에 엔비디아 로봇 플랫폼을 얹은 연구용 모델 ‘애자일 원 SN’. 사진=애자일 로보츠 홈페이지

역설도 있다. 유럽은 미국 빅테크 의존에서 벗어나 ‘디지털 주권’을 확보하겠다고 말한다. 그런데 독일 정부가 산업 AI의 파트너로 손잡은 곳도, 독일 스타트업에 투자하겠다고 나선 곳도 미국 기업 엔비디아다. 더 아이러니한 건 젠슨 황이 ‘주권 AI’를 적극적으로 내세운다는 점이다.

엔비디아가 말하는 주권은 자국 기술만으로 AI를 만드는 데 있지 않다. 자국 데이터를 자국 안에 두고 통제하면서, 그 인프라에는 엔비디아의 칩과 소프트웨어를 쓰는 방식에 가깝다. 칩은 미국산이어도 데이터센터가 유럽 땅에 있으면 주권을 지킬 수 있다는 논리다. 이 논리는 유럽이 데이터 통제권을 얻는 현실적인 방안일 수 있다. 동시에 핵심 기술의 의존 관계는 그대로 둔 채 주권의 기준을 바꿔놓는 것이기도 하다. 유럽의 디지털 주권은 어느새 ‘자립’에서 ‘관리’로 목표가 낮아지고 있다.

다만 이번 발표는 아직 계획이다. 투자 금액과 지분율, 기업가치 등이 공개되지 않았고 거래도 완료되지 않았다. 4곳이 실제 현장에서 실력을 증명해내느냐가 남은 과제다.

이번 베를린 발표는 AI 경쟁의 무대가 화면 밖, 공장과 병원, 우주로 넓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국 기업들도 이미 엔비디아와 제조·AI 인프라 협력을 확대하고 있다. 현대차그룹은 제조와 자율주행을 위한 AI 인프라를, SK는 AI 팩토리와 메모리 협력을 추진한다. 칩과 플랫폼을 들여와 공장에 AI를 까는 데까지는 독일과 같은 길이다. 남은 질문도 같다. 공장에서 쌓이는 데이터와 경험을 우리 기술로 바꿀 수 있는가, 아니면 남의 플랫폼 위에서 산업을 ‘관리’하는 데 머물 것인가.

필자 이정우는 17년간 언론사 기자로 자동차, 2차전지, 중공업 등 주요 산업을 비롯해 국방, 외교, 환경, 교육, 보건복지 등 다양한 분야를 두루 담당했다. 특히 모빌리티 및 에너지 전환과 지속가능성 중심의 산업 구조 변화를 현장에서 취재했다. 현재 독일 베를린에 거주하며 스타트업 액셀러레이터 ‘123팩토리’의 파트너로 활동하고 있다.

이정우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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