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의료기기 비임상시험을 수행하는 국내 대표 시험기관이 의뢰자의 요청에 따라 과학적 근거 없이 시험조건을 변경해 시험을 실시한 사실이 적발됐다. 비임상시험 데이터의 신뢰성과 시험기관의 독립성을 두고 적잖은 파장이 예상된다.

식품의약품안전처(식약처)는 지난달 28일 의료기기 비임상시험실시기관인 한국건설생활환경시험연구원(KCL) 바이오화학본부에 대해 의료기기법 시행규칙 및 비임상시험관리기준(GLP) 위반을 이유로 경고 처분을 내렸다.
행정처분에 따르면 KCL은 비임상시험 시험계획서의 작성 근거가 되는 시험지침과 다르게, 별도의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지 않은 채 의뢰자가 요청한 용출조건을 그대로 적용해 수출전용 의료기기 시험을 실시하고 최종보고서를 발급한 것으로 확인됐다.
식약처는 이를 GLP 위반으로 판단해 경고 처분을 내렸다. 경고는 식약처 행정처분 중 가장 낮은 수위여서 KCL의 비임상시험(GLP) 지정이 취소되거나 시험 업무가 정지되는 법적 효력은 발생하지 않아 기관 운영 및 시험성적서 발급 업무는 정상적으로 계속 수행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번 처분은 단순한 절차상 부주의를 넘어, 시험 조건을 설정하고 변경하는 과정에서 GLP 기관이 지켜야 할 객관성과 독립성에 경종을 울렸다는 점에서 가볍지 않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번에 적발된 KCL은 산업통상자원부 국가기술표준원 산하 유관기관이자 국내 최대 규모의 종합 시험·인증기관이다. 의료기기는 물론 건설자재, 환경, 생활용품, 화학 분야까지 산업 전반의 시험·검사 및 인증을 수행한다.
특히 KCL 바이오화학본부는 식약처 지정 의료기기 GLP 실시기관으로서 세포독성·유전독성·이식시험 등 생물학적 안전성 평가와 화학적 특성화 시험을 전담하고 있다. KCL 바이오화학본부는 연간 수백 건에 달하는 의료기기 생물학적 안전성 및 GLP 시험을 수행하며 국내 의료기기 기업들의 식약처는 물론 FDA, CE MDR 등 인허가용 데이터를 생산해왔다.
GLP 기관은 의료기기의 안전성을 객관적으로 검증하는 역할을 하는 만큼, 시험자료는 식약처 허가심사뿐만 아니라 해외 규제기관 제출 자료로도 활용돼 결과의 객관성과 재현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GLP는 시험 수행부터 시험계획서 작성, 시험방법 변경, 결과 보고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표준화해 시험 데이터의 신뢰성을 확보하기 위한 제도다. 시험조건을 변경할 경우에는 과학적 근거와 변경 사유를 명확히 기록하고 검증해야 하며, 의뢰기관의 요구만으로 시험방법을 변경해서는 안 된다.
업계에서는 이번 처분이 의료기기 안전성 자체를 문제 삼은 사례라기보다 시험기관의 독립성과 데이터 무결성 확보의 중요성을 다시 환기하는 사례라고 보고 있다. 특히 의료기기 기업들이 국내외 인허가를 위해 GLP 시험자료를 활용하는 만큼 시험기관이 객관성을 유지하는 것은 산업 전반의 신뢰성과도 직결된다는 것이다.
의료기기업계 관계자는 “시험성적서는 정해진 기준 규격에 맞춰 발급돼야 효력을 갖기 때문에 업계에서도 흔히 발생하는 사례는 아니다”며 “해외 허가 등 특정 수출국이 요구하는 별도 기준에 맞추기 위해 업체가 특수한 조건을 요청했을 가능성은 있지만, 과학적 근거나 관련 규격 제시 없이 이를 그대로 받아들여 성적서를 발급한 것은 오·남용 및 악용의 소지가 있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번 행정처분에서는 시험을 의뢰한 기업과 대상 의료기기의 이름, 시험자료가 실제 인허가에 활용됐는지는 공개되지 않았다. KCL 관계자는 “시험 의뢰기관 및 제품에 대한 정보는 고객과 체결한 계약상 비밀유지의무가 있어 연구원이 임의로 공개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