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세계 최고 수준의 선박 건조 능력을 갖춘 한국 조선업에도 오랫동안 풀지 못한 숙제가 있다. LNG 화물창과 선박 제어시스템 등 핵심 기술을 해외 기업에 의존하면서 선박을 많이 건조할수록 막대한 로열티와 장비·유지보수 비용이 함께 늘어나는 구조다. 앞선 기사에선 이러한 국내 조선업이 매년 상당한 비용을 해외에 지급하는 현실을 짚었다.
최근에는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다. 국내 조선사들이 자체 개발한 LNG 화물창을 실제 상업 운항에 투입하고, 자율운항 소프트웨어를 대형 선박에 적용해 대양 횡단 실증까지 마치는 등 핵심 기술의 국산화가 연구개발 단계를 넘어 상용화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 단순히 배를 잘 만드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동안 해외 기업이 가져가던 기술료와 서비스 매출까지 확보하려는 움직임이다.
아직 글로벌 시장을 장악한 해외 기업과의 격차는 크지만, 국산 기술이 실제 운항 실적을 쌓기 시작했다는 점은 의미가 작지 않다. 한국 조선업이 ‘완제품 조립’ 중심의 경쟁력을 넘어 핵심 기술을 직접 보유하는 산업으로 전환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LNG 화물창, 소형선 상용화를 대형선으로 확대
가장 대표적인 격전지는 역시 LNG 화물창이다. 국내 조선 3사가 30년간 GTT에 지불한 로열티는 약 7조 2900억 원, 척당 평균 130억 원에 달한다. 이 구조를 깨기 위해 개발된 한국형 화물창 ‘KC-2/KC-2C’는 최근 상징적인 진전을 이뤘다. 삼성중공업은 지난해 10월 27일, KC-2C를 탑재한 7500㎥급 LNG운반선을 대한해운엘엔지에 인도하고 통영에서 제주 애월 LNG기지까지 첫 항차를 마쳤다. 국산 화물창이 시험 단계를 넘어 실제 상업 운항에 투입된 첫 사례다.

정부도 속도를 맞추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지난해 12월 22일 ‘LNG 화물창 국산화 워킹그룹’ 킥오프 회의를 열고, 기획재정부·해양수산부·한국가스공사·HD현대중공업·삼성중공업·한화오션 등이 참여하는 민관 협의체를 가동했다. 목표는 지금까지 소형선에서만 검증된 KC-2 계열 화물창을 시장 주력인 17만 4000㎥급 대형 LNG운반선까지 확대 적용하는 것이다. 정부는 2028년까지 대형선 실증을 마치고, 2030년까지 한국형 화물창을 탑재한 LNG선 수주를 달성한다는 로드맵을 제시했다.
선박의 ‘뇌’, 자율운항 소프트웨어 경쟁
최근 국내 조선업계가 공격적으로 뛰어든 영역은 선박의 ‘뇌’에 해당하는 자율운항 소프트웨어다. 항해·기관 통합 제어시스템(IAS) 시장을 지배해 온 콩스버그 등 유럽 선박 회사의 영역에, HD현대와 삼성중공업이 각자의 방식으로 도전장을 내밀었다.
HD현대의 자율운항 전문 자회사 아비커스는 2022년 6월, 자체 개발한 2단계 자율운항 솔루션 ‘하이나스(HiNAS) 2.0’을 탑재해 세계 최초로 대형 선박의 자율운항 대양 횡단에 성공했다. SK해운의 18만㎥급 초대형 LNG운반선 ‘프리즘 커리지’호가 미국 멕시코만에서 출발해 파나마 운하를 거쳐 태평양을 건너 충남 보령까지 33일간 약 2만km를 항해했는데, 이 중 절반인 1만km 구간을 사람의 개입 없이 하이나스 2.0이 직접 조타 명령까지 제어했다. 이 과정에서 다른 선박과의 충돌 위험을 100여 차례 스스로 회피했고, 연료 효율은 약 7%, 온실가스 배출은 약 5% 개선됐다. 아비커스는 이후 HiNAS Control(옛 HiNAS 2.0)에 대해 미국선급협회(ABS)의 형식승인까지 받아 상용화 단계로 넘어갔다.

삼성중공업도 별도의 독자 노선을 걷고 있다. 2019년 개발한 자율운항시스템 ‘SAS(Samsung Autonomous Ship)’는 레이더·GPS·AIS·카메라 영상을 융합해 상황을 인지하고 충돌 회피를 위한 엔진·러더(방향타)를 자동 제어하는 시스템이다. 지난해 9월 25일에는 대만 에버그린사의 1만 5000TEU급 컨테이너선에 SAS를 탑재해 미국 오클랜드에서 대만 가오슝까지 약 1만km 태평양 구간 실증에 성공했다. 이 항해에서 SAS는 3시간마다 기상을 분석해 최적 운항 가이드를 104회, 자동 제어를 224회 수행하며 선원 개입 없이 정시 도착을 지켜냈다.
두 회사의 실증 실적은 지금 당장 콩스버그의 시장 지배력을 대체할 수준은 아니다. 다만 ‘운항 실적이 곧 시장 진입권’이라는 이 업계의 공식을 감안하면, 태평양을 두 차례 건넌 실증 데이터는 향후 국산 통합제어시스템이 해외 선주들에게 제시할 수 있는 최소한의 신뢰 자산이 됐다는 의미가 있다.
조립기지를 넘어 ‘기술 주권’으로
가스 탱크와 자율운항 소프트웨어에서 동시에 진행되는 이 국산화 시도들은 개별 기술 하나하나의 승부를 넘어, 한국 조선업의 수익 구조 자체를 바꾸려는 전략으로 읽힌다. GTT에 내는 화물창 로열티는 척당 100억 원대, 콩스버그 계열 제어시스템은 장비 구매비에 더해 소프트웨어 업그레이드·유지보수 계약이 계속 뒤따르는 구조다. 이 비용을 걷어내는 만큼 조선사의 실질 영업이익률은 그대로 개선 여력으로 돌아간다.
동시에 이 싸움은 친환경·디지털 선박이라는 다음 시장의 주도권 경쟁이기도 하다. IMO의 환경규제 강화로 선박 연료가 메탄올·암모니아로 옮겨가고, 자율운항이 표준으로 자리 잡을수록, 하드웨어 건조 능력만으로는 마진을 지키기 어려워진다는 게 업계의 공통된 진단이다. 화물창이든 제어 소프트웨어든 원천기술을 쥔 쪽이 향후 애프터마켓과 구독형 서비스 매출까지 가져가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물론 갈 길은 남아 있다. KC-2C는 이제 본격적인 상용화 단계를 밟고 있고, 하이나스와 SAS 모두 선체 하부에서 물리적으로 구현하는 동적위치제어(DP) 시스템은 국산화가 필요한 상황이다. 다만 조립기지를 넘어 원천기술을 확보하려는 한국 조선업의 움직임은 가속화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