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그래미 어워즈를 주관하는 미국 레코딩 아카데미는 지난 6월 16일(현지시각) 2027년 2월 열리는 제69회 시상식부터 ‘베스트 아시안 팝 뮤직 퍼포먼스’ 등 5개 부문을 신설한다고 발표했다. 10월 12일에는 후보 선정을 위한 1차 투표에 들어갔다. 한국의 하이브·SM·JYP·YG 등 4대 기획사 소속 아티스트는 투표 대상에 없었다. 방탄소년단, 스트레이키즈만이 아니라 SM과 YG 소속 아티스트들이 모두 출품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애초 하이브는 방탄소년단의 출품 거부가 하이브 전 사적 차원의 결정은 아니고 각 개별 레이블의 결정에 따른 것이라고 밝혔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하이브 전체 레이블은 물론 다른 기획사들도 동참한 것이다. 모두 방탄소년단의 생각에 동의하고 있다는 얘기다.

일각에서는 그래미 어워즈에 유독 민감하게 반응하고 보이콧하는 것 아니냐고 지적한다. 하지만 빌보드 뮤직 어워즈의 전례가 있다. 빌보드 뮤직 어워즈는 2023년 K팝 부문을 신설했다. 톱 글로벌 K팝 아티스트, 톱 글로벌 K팝 앨범, 톱 글로벌 K팝 노래, 톱 K팝 투어링 아티스트 등 4개 부문이었다. 이후 K팝 아티스트들은 본상을 뺀 K팝 부문 수상에만 한정되었다. 2024년 시상식 결과를 보면 세븐틴이 2024년 ‘톱 K팝 투어링 아티스트’, 스트레이키즈가 ‘톱 글로벌 K팝 아티스트’, 방탄소년단 정국이 솔로 앨범 ‘GOLDEN’으로 ‘톱 K팝 앨범’을 받았을 뿐이다.
빌보드 뮤직 어워즈가 이 정도라면 그래미 어워즈의 앞날도 불 보듯 훤하다. 그래미는 빌보드보다 K팝에 더 인색했기 때문이다. 그 대표 사례가 방탄소년단이다. 2021년 제63회 그래미뮤직 어워즈에서 전 세계적인 히트곡 ‘다이너마이트’로 베스트 팝 듀오 그룹 퍼포먼스 부문에 후보에 올랐지만 수상하지 못했다. 2022년에도 빌보드 핫 100 1위를 10주간이나 차지한 ‘버터’로 같은 부문 후보에 올랐지만 역시 수상하지 못했다.
2023년에는 무려 3개 부문 후보에 올랐고 후보 부문도 다양해 기대를 모았다. ‘Yet To Come’으로 최우수 뮤직비디오, 콜드플레이와의 협업곡인 ‘My Universe’는 베스트 팝 듀오/그룹 퍼포먼스, 이 곡이 수록된 앨범으로 올해의 앨범상(Album of the Year) 후보까지 올랐다. 하지만 시상 순서까지 뒤로 배치했음에도 방탄소년단은 수상하지 못했고, 시청율과 화제성을 위해 방탄소년단을 이용했다는 혹평이 현지에서 쏟아졌다.
방탄소년단만이 아니라 K팝 전반에 대해 장벽과 배제의 분위기가 느껴졌다. 2024년에는 방탄소년단 멤버들의 솔로 활동 곡만이 아니라 스트레이키즈, 뉴진스, 트와이스, 세븐틴 등 K팝 가수들이 빌보드 차트는 물론이고 국제음반산업협회 통계에서도 활약했지만 단 한 개 부문도 후보로 오르지 못했다. 이러한 흐름은 2025년 제67회 시상식도 별로 다르지 않았다.
2026년에는 변화가 있을 줄 알았다. 9개 부문에 K팝 관련 곡들이 후보에 올랐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골든’과 로제의 ‘아파트’는 전 세계적으로 히트한 만큼 강력한 수상 후보로 거론됐다. ‘아파트’는 이미 2025 MTV 비디오 뮤직 어워즈에서 대상에 해당하는 ‘올해의 노래(Song of the Year)’를 받은 터였다. 하지만 두 곡 모두 수상하지 못했다. 더 큰 문제는 ‘베스트 팝 듀오/그룹 퍼포먼스(Best Pop Duo/Group Performance)’ 부문에 ‘골든’과 로제의 ‘아파트’, 캣츠아이의 ‘가브리앨라’가 후보에 올랐지만 누구도 수상을 못 했다는 것이다.
이는 그래미가 K팝을 평가할 의식은 물론 정체성이나 시스템을 갖추지 못했음을 뜻한다. 이런 상황에서 ‘베스트 아시안 팝 뮤직 퍼포먼스’ 부문을 신설한 것은 그들의 위기감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어느 K팝 아티스트도 2027년 시상식에서 본상을 받을 가능성은 없다. K팝은 아시아 음악의 틀에 가두려는 의도가 보일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그래미 출품 거부가 즉흥적이거나 우연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방탄소년단은 이번 MTV 뮤직 어워즈에서 ‘올해의 노래(Song of the Year)’, ‘베스트그룹’(통산 다섯 번째)을 포함해 3관왕을 차지했는데도 시상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예정되어 있던 수순이었다. 멤버들은 군입대 전 자신들의 채널을 통해서 빌보드 순위나 시상식 수상에 너무 연연해하는 것 같다며 자신들의 정체성과 그에 따른 길을 찾겠다는 소회를 밝힌 적이 있다. 정규 5집 ‘아리랑’ 수록곡들이 ‘버터’나 ‘다이너마이트’처럼 대중적인 곡이 아니라는 점에서도 당장의 성적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는 것이 드러났다. 빌보드나 그래미에 연연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미 세계 음악 문화는 K팝으로 기울었다.
음악의 유통 채널은 이제 대형 음반사나 플랫폼이 아니다. 신생 아티스트의 홍보만이 아니라 음악 공유나 향유도 SNS를 기반으로 한다. 코로나19 엔데믹을 거치면서 음악 산업과 시장은 음원이나 앨범이 아니라 콘서트 투어로 주도권이 넘어갔다. 대면 체험이 중요해지면서 콘서트만이 아니라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과 행사가 주축이다. K팝만이 이 같은 패러다임을 구축했다. 방탄소년단의 경제 효과는 이미 전 세계적으로 증명됐다. 테일러 스위프트 효과는 넘어선 지 오래다.
그래미보다는 2027년 한국에서 열릴 패노메몬(Fanomenon) 시상식에 방탄소년단을 비롯한 주요 K팝 아티스트가 등장할 것에 더 관심이 간다. K팝의 정체성이 팬 문화이기 때문에 팬을 시상식의 주인공으로 삼는 것이 그래미 시상식과 구별되는 패노메논의 독자성이다. 더 이상 빌보드 1등과 그래미 수상에 얽매이지 않는, 우리가 중심이 된 시상식 문화를 만들어간다는 점에서 이것은 문화 전쟁의 서막일 수도 있다.
4대 기획사뿐만 아니라 중소기획사나 신생 기획사 아티스트들도 적극 참여할 수 있도록 연대와 소통, 네트워크를 심화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산업계 이해관계자가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 팬 중심의 K팝 정체성을 지키고 그에 따라 주체적인 입지를 구축하는 것이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필자 김헌식은 20대부터 문화 속에 세상을 좀 더 낫게 만드는 길이 있다는 기대감으로 특히 대중문화 현상의 숲을 거닐거나 헤쳐왔다. 인공지능과 양자 컴퓨터가 활약하는 21세기에도 여전히 같은 믿음으로 한길을 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