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토드 필립스 감독의 영화 ‘조커(2019)’와 이어진 영화 ‘조커: 폴리 아 되’(2024)를 눈여겨봤다. 악당 설정에서 고전적 모델의 귀환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이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아이맥스 촬영만큼이나 가치가 있다. 악당 캐릭터의 설정은 우리가 사회의 근본적인 모순과 맞물린 중요한 화두지만, 간과된 면이 있다. 어느새 장르물의 악인 설정이 일반 영상 콘텐츠에 무비판적으로 확산됐고 K콘텐츠에 ‘피로증’까지 일으키는 상황이다.
먼저 악당(惡黨)과 악인(惡人)을 구분해보자. 악당은 악의 무리에 가깝다. 악의 무리는 상대적 관점에 규정될 수 있다. 주류 지배층 관점에서 견해나 세계관이 다른 소수집단을 악의 세력으로 규정할 때 형성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뭔가 동의할 수 있을 만한 가치와 의식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몰려들고 무리를 짓는 것이다. 최소한 그들끼리는 해치지 않고 도와야 유지 강화가 된다. 반면 악인(惡人)은 무리를 짓지 않고 혼자 자신을 위해 선택하고 행동한다. 그냥 나쁜 자이며 자신을 도와주려는 이들마저 헤친다. 쉽게 사이코패스를 생각할 수 있다. 사회구조나 모순과 관계없이 악한 자다.

영화 ‘조커’에서 주인공 아서 플렉은 지명도 있는 희극 배우가 되어 유명 토크쇼 진행자가 되는 것이 꿈이다. 그런데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뇌신경 장애로 안면 근육까지 조절이 안 되는 것. 웃지 않아야 할 때 웃음이 터져 나오기에 주변 사람들에게 상당한 오해를 받는다. 그나마 사회복지 시책 덕분에 약물 지원을 받아 버텨냈으나 복지 예산이 축소되면서 약물 지원이 끊긴다. 장애는 악화된다. 지하철을 타고 가던 중 웃음이 갑자기 터지는 바람에 건달들에게 집단 폭행을 당하게 되는데, 자신도 모르게 권총이 발사되고 급기야 살인자가 된다. 하지만 죽은 건달들이 금융계의 부유층이었던 탓에 아서는 부당한 세력에 항거한 영웅으로 추앙받게 된다. 조커, 악당의 탄생이다.
이제 K콘텐츠를 보자. 화성연쇄살인사건의 이춘재를 모티브로 삼은 ENA 드라마 ‘허수아비’의 연쇄살인범 이기환(정문성) 캐릭터는 말 그대로 악인이다. 여성이라면 외모나 나이 불문하고 강간 살인한다. 동생의 죽음을 자초하고도 죄의식조차 없다. 스토리 라인은 반전의 반전이라는 플롯의 복합성에 역량을 결집했다. 실제 이춘재는 초기 수사와 검거 실패로 점점 더 극렬한 살인마가 되어 갔는데, 드라마 ‘허수아비’는 그를 처음부터 끝까지 악인으로 그려 공분을 사게 했다. 나쁜 놈은 그냥 나쁜 놈인 것이다.
넷플릭스 ‘더 글로리’에서 박연진(임지연)은 처음부터 악인이고 계층적 토대가 이를 더 강화했을 뿐이다. 디즈니 ‘조각 도시’에서 안요한(도경수)은 다른 이의 삶을 조각내며 쾌감을 느끼는 사이코패스의 광기를 잔혹하게 보여줄 뿐이다.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 넷플릭스 ‘참교육’에서 고고생 조규철(이봉준)은 자신을 염려하고 보호하려는 담임교사를 잔인하게 살해하고 마약 유통과 착취 범죄를 양심의 가책 없이 이어가고 살인도 계속한다.
이런 콘텐츠에서는 불우한 가정환경이나 어린 시절 폭력을 당했다는 사회적 변인은 부각조차 되지 않는다. 자극적이고 폭력적인 장르물일수록 선과 악의 대결이 명확하고 빌런을 악인으로 만드는 경향이 크다. 이러한 콘텐츠를 즐겨 보는 수용자의 동기는 물론이고 게임 스토리텔링과 세계관이 반영되기 때문이다. 더불어 뇌 과학의 발달로 사회적 변인보다 뇌 작동 방식의 차이에 따른 사이코패스 유형이 부각된다.
하지만 이런 인물이 영상 콘텐츠에 너무 많이 등장하기 때문에 세상이 온통 사이코패스로 가득 찬 것 같다. 잔혹한 범죄는 저지르는 이들이 항상 따로 있는 것 같다. 하지만 현실의 범죄는 사이코패스, 즉 본래 악인이 아니라 그렇지 않은 이들이 저지른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범죄행위에는 복합적인 요인들이 작용한다.
이런 측면에서 최근 두 편의 드라마가 눈길을 끌었다. 드라마 ‘결혼의 완성’과 ‘아파트’는 빌런의 복합성이 사회적 현실과 대중적 몰입을 이끌어낸다.

드라마 ‘결혼의 완성’에서 노만희(김대성)는 초반부에는 단지 연쇄살인마로 보였다. 첫 범죄는 우발이었다. 옆집 여성을 괴롭히는 기둥서방을 우연히 살해하고 자수하려 한다. 하지만 옆집 여성 김경애(이상희)는 그에게 자수하지 말 것을 권한다. 이때부터 둘은 부부관계가 된다. 노만희는 김경애를 매우 사랑하는데 그 때문에 다시 범죄를 저지르게 된다. 이런 개인적인 관계 차원을 넘어 사회적 환경과 구조도 작동한다. 강태주(남궁민)와 고세윤(이설)을 둘러싼 납치 및 살해 음모에서는 태아줄기 세포를 둘러싼 병원 재단의 비리와 부원장 최치웅(우지현) 등의 사주가 영향을 미친다. 이 드라마는 악인이 원래부터 존재하기보다는 여러 가지 상황적인 조건과 변수가 맞물리는 점을 보여주기에 설득력을 갖는다.
드라마 ‘아파트‘에는 사이코패스와 사회 구조적인 요인, 그리고 그 주변 범죄자들의 양태가 등장한다. 즉 빌런의 세 층위가 있다. 우선 건설사 대표 이충원(박병은)은 냉혈한으로 살인 교사는 물론이고 직접 살인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충원은 ‘김부장’의 용역조직 출신 건설사 대표 주강찬(주상욱)과 비슷한 캐릭터다.
두 번째 층위는 이익을 찾아 몰려든 부정부패한 무리다. 이충원은 100억 원의 가입비를 조건으로 원클럽이라는 사모임을 만드는데 구성원은 경찰청장, 검찰총장, 대법관, 민정수석, 공영일보 사장 등이다. 그들은 아파트 건설로 생길 막대한 이익을 노린다.
세 번째 층위는 이런 사이코패스와 부정부패한 무리에게 이용당하는 조폭집단과 리더다. 나름 의리를 지키는 무리 가운데 보스 박해강(지성)은 장기수선충당금을 횡령해 부모 같은 형님 박용만(정진영)을 구하려고 하지만, 아파트 동대표와 입주민회의 회장을 거치면서 오히려 불의를 바로잡고 정의를 실현하려 한다. 일종의 ‘반(半)영웅’이 된다.

이제 콘텐츠 속 빌런은 단순히 사이코패스만 부각하는 단순한 설정으로는 주제의식은 물론 대중적인 몰입도 주지 못한다. 그렇다고 사회적 구조나 환경만 부각하면 당사자주의에 부합하지 않는다. 악인이 있는 현실도 간과할 수 있다. 악행을 둘러싼 이해관계와 조직화는 엄연한 현실이다. 이런 점을 종합적으로 다룰 때 범죄에 대비하거나 실질적인 대안을 모색하는 데 K콘텐츠가 기여할지 모른다. 범죄는 특정 사이코패스만 저지르는 것도, 소시오패스만의 문제도 아니다. 현실의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필자 김헌식은 20대부터 문화 속에 세상을 좀 더 낫게 만드는 길이 있다는 기대감으로 특히 대중문화 현상의 숲을 거닐거나 헤쳐왔다. 인공지능과 양자 컴퓨터가 활약하는 21세기에도 여전히 같은 믿음으로 한길을 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