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오디세이’ 암표가 30만 원을 호가했다. 여기에는 3시간 분량의 영화 전체를 아이맥스 필름으로 촬영했다는 점이 주효하게 작용하고 있다. 아이맥스 영화는 가격이 좀 비싸도 반드시 아이맥스 전용관에서 봐야 한다는 문화적인 강박 심리가 있기 때문이다. 놀란 감독이 일반 상영관에서 봐도 충분하다고 밝혔는데도 말이다. 사실 일반 상영관에서 보지 않고 아이맥스 상영관에서 본다면 영화의 차이를 알기 쉽지 않을 것이다. 일반 상영관에서 보고 영화가 정말 마음에 든다면 그때 아이맥스 상영관을 찾아도 늦지 않다. 영화의 감동이 아이맥스 상영관에서 나오는 것은 아닐 테니.

그럼데도 아이맥스를 먼저 찾는 데에는 한국 특유의 문화 심리가 작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명장 감독의 대작은 고(高)사양으로 봐야 한다는 심리다. 여기에 아이맥스 상영관의 특화된 음향 시설이 한몫하는 듯하다. 희소성의 가치도 작용한다. 다른 사람들은 잘 접할 수 없는 대상을 경험한 것에 더 성취감을 느끼고 과시하게 되는 것이다. 필요하다면 비용과 시간을 더 들여서라도 소비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가치 소비 관점에서 볼 수도 있겠다. 또 소셜미디어의 영향으로 인증샷 문화가 더 심화되어 이러한 행태가 더 가속되는 면이 있다.
한편으로 스마트폰이나 OTT로 맛볼 수 없는 몰입감을 느끼기 위해 아이맥스 상영관을 찾는 관객도 있다. 이들은 오디세이 같은 영화가 온라인 동영상 플랫폼으로 빨리 이동하지 않길 바랄 것이다. OTT에서는 아이맥스 필름 촬영본의 질감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영화들은 홀드백 제도에 따라서 의무상영일을 두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결국 극장에 오래 남는 영화들은 제작-배급-극장-관객이 원하기 때문에 계속 스크린에 걸릴 수 있다. 극장의 역할과 기능이 없어졌다는 것은 바로 이런 영화들이 줄어들어서다. 영화가 개봉관에 걸려 있을 때 봐야 한다는 심리는 극장 관객 숫자를 급격하게 올리는 핵심 요인이다. 이는 ‘스파이더맨: 브랜드 뉴 데이’도 마찬가지다. 극장에서 관람할 만한 영화이기에 극장 관객 수가 급증했다. 단순히 전작에 이어진 시즌이 궁금해서 예매가 몰린 수준을 벗어났다.
다만 ‘스파이더맨: 브랜드 뉴 데이’는 가성비 영화이고, ‘오디세이’는 가심비 영화다. 가성비 영화는 당장의 효용성에 더 무게를 준다. 재미있다거나 통쾌하다는 평가가 가능할 것이다. 가심비 영화는 마음에 여운이나 깊은 울림을 주기 마련이다. 이는 다른 파생 콘텐츠 소비로 이어진다. 관련 도서 판매가 여기에 해당한다. 영화 ‘오디세이’ 역시 원작인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 관련 책들의 판매가 급증했다.

영화 가격이 비싸다고 하는 것은 1차적으로 가성비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 값을 치르느니 차라리 온라인 동영상 플랫폼 콘텐츠를 이용하겠다는 반응이 여기에 해당한다. 가성비가 좋은 영화라도 가심비까지 만족시키는 것은 쉽지 않다. 한국 영화계가 살아나려면 가성비 영화를 넘어 가심비 영화를 많이 만들어야 한다. 다만 그 방법이 ‘스파이더맨: 브랜드 뉴 데이’나 ‘오디세이’ 같은 대작만은 아니라는 점을 ‘호프’와 ‘군체’가 보여주었다. 단종앓이를 낳은 ‘왕과 사는 남자’도 다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한 영화가 영화관 전체를 주무르는 상황은 바람직하다고 할 수 없다.
손익분기점을 넘기는 영화가 많을수록 영화 생태계가 살아난다고 할 수 있다. 즉 가성비 영화가 많아야 하는데, 거기에 가심비까지 추구하면 더 좋을 것이다. 올해 개봉한 국내 영화 중 손익분기점을 넘긴 작품은 ‘왕과 사는 남자’(손익분기점 약 260만 명, 누적 관객수 약 1691만 명), ‘살목지’(손익분기점 약 80만 명, 최종 관객수 약 324만 명), ‘군체’(손익분기점 약 300만 명, 누적 관객수 약 595만 명) 셋뿐인데, 이 가운데 ‘살목지’와 ‘군체’는 가심비와는 거리가 있다.
한편 가격이 비싸도 지갑을 열 수 있는 영화를 기대하는데 AI 영화는 이런 영화 축에도 낄 수 없다. AI 콘텐츠를 자기 돈 내고 보는 소비자는 거의 없다. ‘오디세이’는 아이맥스 수작업에 현장 올로케이션으로 한 땀 한 땀 쌓아올렸기에 가심비 경지에 올랐다. 발터 벤야민이 언급한 기술복제 시대에 진품의 ‘아우라(Aura)’까지는 아닐지라도 대체 불가의 가치에 지갑이 열리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필자 김헌식은 20대부터 문화 속에 세상을 좀 더 낫게 만드는 길이 있다는 기대감으로 특히 대중문화 현상의 숲을 거닐거나 헤쳐왔다. 인공지능과 양자 컴퓨터가 활약하는 21세기에도 여전히 같은 믿음으로 한길을 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