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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아무리 잘 만들어도 팔려면…”
글로벌 CRO가 짚은 K-바이오 숙제

기술력·임상 인프라 갖췄지만 해외 허가는 또 다른 문턱…개발 초기부터 규제·사업화 전략 세워야

[비즈한국] 좋은 신약 후보물질을 개발했다고 곧바로 해외에서 팔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미국과 유럽에서 허가를 받으려면 현지 기준에 맞춰 임상시험을 설계하고, 약의 안전성과 효과를 입증해야 한다. 개발 초기부터 어느 시장에 진출할지, 어떤 자료를 확보할지 정해야 하는 이유다.

최근에는 국내 제약·바이오기업들이 처음부터 해외 진출을 염두에 두고 신약을 개발하면서 글로벌 CRO(임상시험수탁기관)의 역할도 커지고 있다. CRO는 제약사를 대신해 임상시험을 설계하고 운영하며, 시험에서 얻은 데이터를 관리·분석하는 전문기업이다. 해외 CRO들도 한국 기업과 협력할 기회를 찾고 있다.

이탈리아에 본사를 둔 글로벌 CRO OPIS가 최근 적극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다.  OPIS는 지난달 13~15일 서울 중구 롯데호텔에서 열린 ‘2026 KoNECT 국제 콘퍼런스(KIC)’에 이어 같은 달 28~30일 서울 코엑스에서 개최된 ‘바이오플러스-인터펙스 코리아 2026(BIX 2026)’에서도 전시부스를 운영했다. 국내 제약·바이오기업과 협력 기회를 모색하기 위한 행보다.

OPIS는 1998년 이탈리아에서 설립된 CRO로, 2022년 4월 한국지사를 설립했다. 회사 측에 따르면 전 세계적으로 1500건 이상의 임상시험 수행 경험을 보유했으며 임상개발 전반에 걸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지오반니 트롤레세 OPIS 부사장은 비즈한국과 인터뷰에서 한국 제약·바이오산업의 성장 가능성을 높이 평가했다. 트롤레세 부사장은 “한국은 우수한 임상 인프라와 혁신적인 개발기업을 기반으로 글로벌 임상개발의 중요한 거점이 될 수 있다”며 “한국을 단순한 지역 영업 거점이 아니라 한국 기업과 유럽, 미국, 아시아 글로벌 시장을 연결하는 전략적 파트너로 보고 있다”고 밝혔다.

글로벌 CRO 기업 OPIS는 지난달 13일 서울 중구 롯데호텔에서 열린 ‘2026 KoNECT 국제 콘퍼런스(KIC)’에 전시부스를 마련해 고객사 유치에 나섰다. 지오반니 트롤레세 OPIS 부사장(왼쪽 끝)은 한국 제약바이오기업의 경쟁력을 설명하면서도 신약 후보물질 임상개발을 위한 전략 고도화를 주문했다. 사진=최영찬 기자

임상시험 세계 6위 한국…이제는 해외 허가와 판매까지

트롤레세 부사장은 한국이 우수한 의료 인프라와 숙련된 의료진, 수준 높은 임상시험기관을 갖추고 있다고 평가했다. 특히 항암제와 바이오의약품, 희귀질환 치료제 등을 개발하는 기업들이 미국과 유럽 등 해외 시장 진출에 적극적으로 나선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는 일본과 중국을 비교 대상으로 제시하며 한국의 경쟁력을 설명했다. 트롤레세 부사장은 “일본은 성숙한 제약산업과 큰 시장 규모를 갖췄고, 중국은 방대한 환자 기반과 바이오산업 규모에 강점이 있다”면서 “한국은 임상시험 인프라와 기술력, 신속한 의사결정이 경쟁력”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한국은 글로벌 임상시험 수행 국가 상위권에 올라 있다. 국가임상시험지원재단에 따르면 2024년 전 세계 제약사 주도 의약품 임상시험에서 한국의 점유율은 3.46%로 미국·중국·호주·스페인·독일에 이어 6위를 기록했다. 도시별 순위에서는 서울이 점유율 1.32%로 중국 베이징(1.40%)에 이어 세계 2위를 차지했다.

국내 제약·바이오기업의 해외 진출 양상도 달라지고 있다. 유한양행이 개발한 폐암 치료제 ‘렉라자’는 2024년 리브리반트와 병용요법으로 미국 식품의약국(FDA) 승인을 받은 데 이어 올해 9월에는 HLB의 미국 자회사 엘레바가 담관암 치료제 ‘리픽투’의 FDA 허가를 획득했다. HK이노엔도 미국 파트너사를 통해 위식도역류질환 치료제 ‘케이캡’의 FDA 품목허가를 신청했다. 셀트리온과 삼성바이오에피스 등 바이오시밀러 기업들도 글로벌 임상개발과 해외 허가를 통해 세계 시장에서 주도권 경쟁을 벌이고 있다.

이처럼 국내 기업들이 해외 시장 진출을 넘어 글로벌 신약 허가와 시장 경쟁에 본격적으로 나서면서 임상개발 접근 방식에도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 OPIS 측의 분석이다.

박창숙 OPIS코리아 사업개발(BD) 총괄 이사는 “과거에는 국내 임상시험 결과를 확보한 이후 해외 진출을 검토하는 경우가 많았다면 이제는 개발 초기부터 미국과 유럽의 규제 요건, 해외 임상시험 설계, 기술이전 가능성 등을 함께 고려하는 기업이 늘고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국내 바이오텍들이 초기 임상시험을 통해 안전성과 초기 유효성, 적정 용량 등에 관한 근거를 확보한 뒤 이를 후속 개발과 기술이전, 투자 유치로 연결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는 평가다.

이에 따라 다국가 임상시험 운영뿐 아니라 임상시험 설계, 해외 규제기관 대응, 데이터 관리 및 통계분석 등 개발 전반에 걸친 지원 수요도 중요해지고 있다.

OPI코리아도 이러한 수요에 대응해 국내 기업과의 협력 범위를 확대하고 있다. 올해 1월에는 국내 임상시험 검체분석 기업 지씨씨엘(GCCL)과 글로벌 임상시험 사업 협력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다만 국내 기업과 체결한 임상시험 수주계약 건수와 구체적인 수행 현황은 고객사와의 기밀유지 의무 등을 이유로 공개하지 않았다.

지난달 28일 서울 코엑스에서 개최된 ‘바이오플러스-인터펙스 코리아 2026(BIX 2026)’에 참석한 박창숙 OPIS코리아 BD 총괄 이사. 국내 바이오기업과 협업 확대를 희망하고 있다. 사진=최영찬 기자

“기술력과 실행력이 강점”…글로벌 임상개발 전략은 보완 과제

박 이사는 한국 기업의 강점으로 높은 기술력과 빠른 실행력을 꼽았다. 제한된 자원과 일정 속에서도 혁신적인 후보물질을 개발하고 주요 의사결정에 신속하게 대응하는 역량을 갖췄다는 평가다.

그는 “한국 기업들의 임상개발 역량은 과거에 비해 상당히 발전했다”며 “임상시험을 수행하는 수준을 넘어 초기 개발 단계부터 글로벌 시장과 규제기관의 요구사항을 고려해 개발 전략을 수립하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글로벌 신약 개발을 위해서는 국가별 규제 차이와 임상시험 설계의 국제적 수용성, 다국가 프로젝트 관리, 임상 데이터의 일관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특히 박 이사는 신약 개발 초기부터 글로벌 개발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임상시험계획을 세울 때부터 목표 시장의 규제 요건과 허가 전략을 고려해야 불필요한 임상시험 반복이나 추가 비용을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

다국가 임상시험을 통합적으로 관리하는 역량도 보완 과제로 꼽았다. 여러 국가에서 동시에 임상시험을 하려면 국가별 규제 요건과 의료기관 운영 방식뿐 아니라 계약, 예산, 데이터 관리 등을 종합적으로 조율해야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2023년 국제학술지 ‘JCO 글로벌 온콜로지(JCO Global Oncology)’에 발표된 연구에 따르면 아시아·태평양 12개 국가·지역, 74개 의료기관에서 진행된 대장암 환자 대상 연구자 주도 임상 3상 ‘ASCOLT’는 국가별 규제와 행정 절차로 인해 임상시험 준비에만 약 2년이 걸렸다. 이 과정에서 100건 이상의 계약과 49건의 연구윤리심의가 필요했으며 중국에서는 규제 변경으로 현지 환자 모집과 데이터 공유가 18개월간 중단되기도 했다.

이처럼 다국가 임상시험은 국가별 규제와 운영 환경에 따라 전체 개발 일정에도 영향을 받을 수 있다. 따라서 개별 임상시험의 성공 여부뿐 아니라 전체 신약 개발 과정에서 해당 시험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고려하는 장기적인 관점이 필요하다.

박 이사는 “한국 기업들이 이러한 부분을 글로벌 전문기관과 협력해 보완한다면 기술적 경쟁력을 실제 글로벌 사업 성과로 연결할 가능성이 더욱 커질 것”이라고 평가했다.

1998년 이탈리아에서 설립된 CRO OPIS는 신약뿐만 아니라 의료기기 등에서도 임상시험 수행 경험을 보유하고 있다. 사진=OPIS 홈페이지 캡처

유럽 임상 강점은 규제·연구 네트워크…CRO 협력도 개발 전략이 관건

트롤레세 부사장은 글로벌 신약 개발 과정에서 유럽 임상시험이 갖는 강점으로 규제 체계와 의료기관 및 연구자 네트워크를 꼽았다.

유럽연합(EU)은 임상시험 규정(CTR)에 따라 임상시험정보시스템(CTIS)을 통한 신청 체계를 운영하고 있다. 이를 활용하면 여러 회원국에서 진행하는 다국가 임상시험의 허가 신청을 단일 창구로 제출하고 각국 규제기관의 심사 절차를 연계할 수 있다.

특히 종양학과 혈액학, 면역학, 신경계 질환 및 희귀질환 분야에서는 전문성을 갖춘 대학병원과 연구기관을 활용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희귀질환이나 특정 바이오마커를 보유한 환자를 대상으로 하는 임상시험에서는 연구기관별 환자 접근성과 연구자 네트워크가 더욱 중요해진다.

트롤레세 부사장은 임상시험 수행 국가를 선정할 때 단순한 비용 비교보다는 환자 모집 가능성과 연구기관의 경험, 규제 일정, 데이터 품질, 전체 개발 일정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글로벌 CRO와 협력에서도 이러한 요소들을 고려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단순히 임상시험을 수행하는 데 그치지 않고, 확보한 데이터를 후속 개발과 기술이전 협상, 품목허가 준비에 활용할 수 있도록 전략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만 트롤레세 부사장은 “기술이전과 사업개발 성과는 임상 결과뿐 아니라 후보물질의 특성, 특허, 시장성, 개발 전략 등 다양한 요인의 영향을 받는다”고 설명했다.

그는 한국 기업들이 이미 충분한 기술적 잠재력을 갖추고 있지만, 글로벌 시장에서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개발 전략을 더욱 고도화할 필요가 있다고 평가했다.

이어 “앞으로는 개발 초기부터 글로벌 규제 및 사업화 전략을 통합하고, 임상 결과가 다음 개발 단계와 상업적 가치로 연결되도록 하는 역량이 더욱 중요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최영찬 기자

제약바이오 분야 출입하고 있습니다. 많이 듣고 많이 공부해 정확하게 쓰도록 하겠습니다.

chan111@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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