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최근 클라이밋 런치패드(ClimateLaunchpad 2026)의 아시아·태평양 지역 세미파이널(Regional Semi-Final) 심사위원으로 참여할 기회가 있었다. 클라이밋 런치패드는 Climate KIC가 2014년 시작한 세계 최대 규모의 그린 비즈니스 아이디어 경진대회다. 현재 50개 이상의 국가에서 운영되고 있으며, 창업가들이 아이디어를 사업모델로 발전시키고 글로벌 시장으로 확장할 수 있도록 부트캠프, 코칭, 피칭 프로그램 등을 운영한다. 지금까지 이 프로그램 출신 스타트업들이 유치한 투자금도 5억 유로(8100억 원)를 넘어선다.

유럽 기후혁신의 연결 플랫폼, Climate KIC
클라이밋 런치패드의 운영 주체인 Climate KIC를 이해하면 이 대회의 성격도 조금 더 선명해진다. Climate KIC는 2010년 유럽연합(EU) 산하 유럽혁신기술연구소(EIT)가 기후변화 분야의 ‘지식·혁신 공동체(Knowledge and Innovation Community)’로 설립한 조직에서 출발했다. 대학과 연구기관, 기업, 스타트업, 정책기관을 한데 묶어 연구와 기술이 실제 시장과 사회의 변화로 이어지도록 만드는 것이 애초의 역할이었다.
Climate KIC는 15년간 EIT의 지원 아래 성장한 뒤 2025년 재정적·운영적으로 독립해 현재는 네덜란드에 기반을 둔 비영리 공익기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EU 기관 자체는 아니지만, 유럽의 기후정책을 현장에서 실행하고 다양한 주체를 연결하는 대표적인 기후혁신 기관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았다. 그 규모와 역할도 일반적인 스타트업 액셀러레이터와는 다르다.

EIT에 따르면 Climate KIC는 지난 15년 동안 2300개가 넘는 스타트업의 성장을 지원했고, 이들 기업은 약 11억 유로(1조 7800억 원)의 투자를 유치하고 1만 5000개의 정규직 일자리와 790개의 신제품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스타트업 육성은 Climate KIC 활동의 한 축일 뿐이다. 현재는 국가와 도시, 지역정부, 산업계, 금융기관, 대학과 시민사회를 연결해 기후중립과 기후회복력이라는 목표를 실제 정책과 투자, 사업으로 전환하는 역할에 더 큰 무게를 두고 있다. Climate KIC가 스스로를 단순한 ‘클린테크 지원기관’이 아니라 유럽의 기후혁신 기관이자 커뮤니티로 정의하는 이유다.
대표적인 사례가 EU의 ‘2030 기후중립·스마트도시 미션’을 지원하는 넷제로시티(NetZeroCities)다. EU는 2030년까지 기후중립을 달성할 선도도시를 육성하기 위해 유럽 35개국에서 112개 도시를 선정했는데, Climate KIC가 33개 기관으로 구성된 컨소시엄을 이끌며 이 도시들의 전환을 지원한다. 단순히 친환경 기술을 도입하도록 돕는 사업이 아니다. 교통과 에너지, 건물, 자원순환은 물론 도시의 정책과 행정, 금융, 시민 참여까지 함께 바꾸는 것이 목표다. 기후위기를 기술 하나의 문제가 아니라 도시 전체의 시스템을 전환해야 하는 문제로 바라보는 유럽식 접근이 가장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사업 가운데 하나다.

기후변화 ‘적응’ 분야에서도 Climate KIC의 역할은 크다. EU의 기후변화 적응 미션을 대표하는 패스웨이투레질리언스(Pathways2Resilience) 역시 Climate KIC가 이끌고 있으며, 2026년 기준 유럽 100개 지역과 지방정부가 장기적인 기후회복력 전략을 만드는 데 참여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이 다루는 대상은 홍수나 폭염 같은 기후위험뿐 아니라 물 관리, 공공 인프라, 보건, 토지 이용, 지역경제 등으로 넓다. 결국 Climate KIC가 하는 일은 좋은 친환경 기술 몇 가지를 골라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과 정책, 금융, 제도, 시민의 행동이 함께 움직이도록 ‘전환의 판’을 설계하는 데 가깝다.
이런 배경 때문에 Climate KIC가 스타트업을 바라보는 시선도 기술 중심에 머물지 않는다. 이 조직이 강조하는 핵심 개념은 ‘시스템 혁신(system innovation)’이다. 뛰어난 기술 하나가 존재한다고 해서 기후문제가 저절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며, 그 기술이 고객에게 선택되고 시장에서 확산되고 정책과 투자로 뒷받침되어 실제 행동의 변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ClimateLaunchpad는 바로 이러한 Climate KIC의 철학이 가장 초기 단계의 창업가들에게 적용되는 프로그램이라고 볼 수 있다.
이번 세미파이널에서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것은 누가 최종 라운드에 올라가는지, 그리고 유럽에서 시작된 기후 스타트업 프로그램이 초기 기업을 어떤 기준으로 바라보는지였다. 클라이밋 런치패드 운영본부에서는 심사 이전에 심사위원을 위한 가이드라인 자료를 제공했고, 참여 심사위원들에게 사전 브리핑을 했다. 이 세션에서 지속적으로 강조한 점은 “Judge on potential, not maturity”였다.
기업이 지금 얼마나 완성돼 있는지가 아니라 앞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임팩트의 가능성을 보라는 것이다. 첨단기술만을 선호해서도 안 된다. 프로그램은 스스로를 ‘특정 기술과 해결 방식에 치우치지 않는다(solution agnostic)’고 규정한다. 복잡한 첨단기술이든 단순한 자연 기반 솔루션이든 중요한 것은 얼마나 큰 기후 임팩트를 만들어낼 가능성이 있는가다.
실제 평가표 역시 꽤 흥미롭다. 심사위원은 기업을 여섯 가지 기준으로 평가한다. 시장 및 사업 잠재력, 일자리와 사회적 임팩트, 혁신 또는 기술 잠재력, 기후 임팩트, 경영진의 역량, 피치의 완성도다. 기술력은 여섯 항목 중 하나일 뿐이다.
지역 세미파이널에 오른 한국 스타트업 3곳
올해 한국에서는 세 개 기업이 지역 세미파이널까지 진출했다.
첫 번째 친구하자(Chingoohaja)는 한국 파이널에서 1위를 차지한 기업으로, ‘돌바 AI(Dolva AI)’라는 AI 엔진을 개발하고 있다. 돌바 AI는 노인의 일상적인 대화를 분석해 인지 변화의 징후를 장기적으로 모니터링한다. 음성·언어·상호작용을 분석하고, 요양시설이나 원격의료 사업자 등 기존 돌봄 서비스 제공자가 API 형태로 사용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회사는 삼성전자로부터 관련 기술 및 지식재산권을 이전받았으며, 일회성 검사가 아니라 일상 속 변화를 지속적으로 포착하는 인프라를 지향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회사가 의료·돌봄 서비스를 어떻게 ‘기후 비즈니스’로 설명했는가다. 고령자가 보다 오랫동안 독립적인 생활을 유지하도록 돕는다면 자원 집약적인 장기 요양 서비스의 필요 시점을 늦출 수 있고, 이를 통해 의료·돌봄 시스템에서 발생하는 탄소배출도 감소할 수 있다는 논리다. 회사는 자체 임팩트 모델을 통해 대상 인구의 1%에 도달했을 경우 약 20만 5000톤의 CO₂e 감축 가능성을 제시했다.
기후테크라고 하면 태양광이나 배터리, 탄소포집 기술을 먼저 떠올리기 쉽지만 클라이밋런치패드에서는 이런 접근도 심사의 대상이 된다.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 전형적인 기후기술인가’가 아니라 기후 임팩트로 연결되는 인과관계를 얼마나 설득력 있고 측정 가능하게 설명할 수 있는가이기 때문이다. 기후 위기에서 가장 취약한 계층이 노령층이라고 한다면, 이들을 위한 솔루션이야 말로 기후 위기 시대 가장 필요한 기술이다.
두 번째 기업 트로바이(Trobai)의 카본옵스 AI(CarbonOps AI)는 조금 더 직접적이다. 조선업 부품 공급망에서 한 개의 부품을 구매한다고 가정해보자. 가격만 비교하면 싼 제품을 선택하면 된다. 그러나 실제 산업 현장에서는 가격뿐 아니라 규격, 인증, 납기, 공급망 그리고 탄소배출량까지 동시에 고려해야 한다.
카본옵스 AI는 여러 문서에 흩어진 요구사항을 AI가 읽고, 비용·납기·규정준수·탄소배출을 함께 검토한 뒤 실행 가능한 구매 옵션을 추천하는 솔루션이다. 가장 친환경적인 제품이 규격을 충족하지 못하거나 지나치게 비싸다면 현실적인 선택이 될 수 없다. 따라서 회사가 목표로 하는 것은 단순히 ‘탄소가 가장 적은 제품’이 아니라 실제 구매 가능한 선택지 가운데 더 낮은 탄소배출을 만드는 옵션을 찾아주는 것이다.

세 번째 기업 히트AI(HeatAI)는 또 다른 문제를 건드린다. 각국 정부는 건물의 히트펌프 설치와 에너지 효율 개선에 막대한 공공예산을 투입한다. 그런데 설비가 설치된 뒤 정말 에너지 소비가 줄었는지, 탄소배출이 얼마나 감소했는지를 객관적으로 입증하는 일은 의외로 쉽지 않다.
히트AI가 판매하려는 것은 단순한 건물 모니터링 대시보드가 아니다. 건물 운영 데이터를 분석해 공공 기후사업의 실제 성과를 감사 가능한 수준의 증거, 즉 ‘audit-grade evidence’로 만드는 서비스다. 초기 고객도 일반 건물주가 아니라 정부 에너지 기관으로 설정했다.

20여 차례 이상 이해관계자를 인터뷰하고 10회 이상 파일럿 및 전문가와 논의하면서 회사의 제품 방향도 바뀌었다. 처음에는 고객이 더 좋은 모니터링 기술을 원한다고 생각했지만, 실제 고객이 필요로 하는 것은 감사와 검증에 사용할 수 있는 운영 성과의 증거였다. 그래서 제품의 중심을 모니터링에서 데이터 품질 검증, 계산 규칙, 감사 추적이 가능한 증거 체계로 전환했다.
세 회사는 얼핏 보면 전혀 다르다. 하나는 고령자 돌봄 AI이고, 하나는 조선·제조업 구매 솔루션이며, 하나는 건물 에너지 정책을 위한 검증 인프라다. 그러나 공통점이 있다. 탄소를 측정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실제 의사결정을 바꾸려 한다는 점이다. 누구를 먼저 돌봐야 하는지, 어떤 부품을 구매해야 하는지, 정부가 지원한 에너지 사업이 실제 효과를 냈는지에 관한 판단을 데이터로 바꾸려 한다.
이번 심사를 보며 다시 확인한 것도 바로 이 지점이었다. 유럽의 기후 스타트업 생태계에서 ‘기후 영향(Climate Impact)’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우리 기술이 친환경적이다”라는 선언을 의미하지 않는다. 누가 고객이며 그들의 필요를 검증했는가, 기후 임팩트를 어떻게 측정하는가, 사업모델은 어떻게 지속가능한 매출을 만드는가, 어느 시장으로 확장할 수 있는가, 사업 및 임팩트 모델에서 어떤 가정을 하고 있는가를 의미한다. 결국 좋은 기후기술을 찾는 것이 아니라 기술·시장·고객·비즈니스 모델·기후효과가 하나의 논리로 연결된 기업을 찾는 과정에 가깝다.
또 하나 눈여겨볼 점은 이번에 올라간 한국 기업 세 곳의 출발점이다. 이들은 모두 대형 글로벌 액셀러레이터나 대기업 사내벤처 출신이 아니다. 광운대학교 산학협력단이 운영하는 DDM청년창업센터 유니콘, 강북청년창업마루 등 서울의 지역 창업허브를 거쳐 성장해온 스타트업들이다.
한국의 지역 창업센터는 종종 공간을 제공하고 초기 창업자를 교육하는 정도의 인프라로 인식된다. 그러나 이번 사례는 지역 단위의 작은 창업허브에서 성장한 기업도 사업모델과 글로벌 피치를 충분히 다듬는다면 세계 50여 개국의 초기 기후기업이 경쟁하는 프로그램에서 평가받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특히 기후테크는 처음부터 거대한 연구시설이나 수백억 원의 투자금이 필요한 것만은 아니다. 현장에서 발견한 문제를 새로운 방식으로 정의하고, 고객을 만나 검증하고, 그것이 실제 탄소감축이나 사회적 변화로 이어지는 경로를 설계하는 것 역시 중요한 기후 혁신이다. 한국에서도 이제 기후 스타트업을 바라보는 질문이 “어떤 기술을 가지고 있는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갈 필요가 있다. 누가 이 기술을 돈을 내고 사용할 것인가, 그 사용으로 어떤 의사결정이 달라지는가, 그 변화가 얼마만큼의 기후 임팩트를 만드는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로.
유럽에서 시작된 글로벌 기후혁신 프로그램의 무대에서, 한국의 작은 지역 창업허브에서 성장한 기업들이 자신들의 기술을 ‘측정 가능한 기후 비즈니스’의 언어로 설명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꽤 의미 있는 변화다.
필자 이은서는 한국에서 법학을 전공했고, 베를린에서 연극을 공부했다. 예술의 도시이자 유럽 스타트업 허브인 베를린에 자리 잡고 도시와 함께 성장하며 한국과 독일의 스타트업 생태계를 잇는 123Factory를 이끌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