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2024년 여름, 일본의 하라 에리카는 KLPGA 한화클래식에 초청 선수로 참가하기 위해 한국에 왔다. 하라 에리카는 외모와 실력을 갖춘 일본여자프로골프 슈퍼스타이자 현재 LPGA 신인왕 포인트 1위를 달리고 있는 선수다. 하라 에리카와 같은 조에 편성된 선수는 당시 KLPGA에서 가장 큰 팬덤을 가진 선수였다. 1번 홀에서 그 선수가 소개될 때 기다렸다는 듯 중년 남자의 구령이 들렸다. “하나, 둘, 셋!” 그러자 주변에 있던 많은 갤러리가 “000 파이팅!”을 우렁차게 외쳤다.
나는 그때 하라 에리카의 표정을 봤다. 하라 에리카는 살짝 미소를 보이면서도 이런 광경과 응원은 처음이라는 듯 사뭇 놀라는 눈치였다. 큰 눈이 더 커졌었다. 하라 에리카의 이런 반응은 18홀 라운드 중에 여러 번 반복됐다. 그렇다. 이것이 한국의 갤러리다. 한국의 응원 문화다. 물론 모든 갤러리의 이야기는 아니다. 특정 선수 팬클럽 응원단의 이야기다.

본래 엄숙함과 정적, 절제된 응원 매너를 우선 덕목으로 삼던 클래식 스포츠 골프가 한국 특유의 ‘집단적 팬덤 문화’와 결합하면서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독창적이고 열정적인 ‘응원 생태계’가 구축되었다. 이제 앞에 K를 붙이는 것이 한참 처진 뒷배를 타는 느낌이지만 가히 K 골프 응원이라고 불러도 모자람이 없는 상황이다.
물론 애리조나에서 열리는 PGA 투어 피닉스 오픈 16번 홀, 콜로세움에서는 온그린에 성공한 선수에게는 환호가, 그렇지 못한 선수에게는 다른 대회에서는 들을 수 없는 야유가 쏟아진다. 타이거 우즈와 샘 라이더가 이 홀에서 홀인원을 기록했을 때는 관중들이 수많은 맥주 캔과 음료수병을 던져 15분간 경기가 중단된 적도 있다. 하지만 이런 광란의 골프 응원 문화도 한국의 골프 팬덤 응원 문화와는 다르다.
선수의 고유 상징색으로 통일한 단체 티셔츠와 모자, 선수 얼굴이 크게 인쇄된 대형 플래카드와 풍선, 갤러리 텐트촌 한구석에 들어선 팬클럽의 커피차와 굿즈 나눔 부스, 그리고 선수가 버디를 기록할 때마다 골프 코스를 울리는 절도 있는 단체 구호까지 오직 한국 골프 대회, 특히 여자 대회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이다.
KLPGA가 남자 투어(KPGA)나 여타 해외 여자 투어를 제치고 독보적인 중계권료, 기업 협찬금, 대회 수를 자랑할 수 있는 근본적인 바탕은 바로 이 팬덤이다. 갤러리는 단순히 주말 경기장을 찾는 일회성 ‘관람객’에 머물지 않는다. 이들은 선수의 경기 일정에 맞춰 전국 방방곡곡의 골프장에 동행하는 충성도 높은 ‘핵심 소비자’다. 기업 입장에서는 수천 명의 열성 팬클럽이 결집하고 미디어 노출 효과가 극대화되는 현장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팬덤이 불러온 구름 관중은 기업의 스폰서십 참여를 유도하고, 이는 곧 대회 상금 증액과 투어 규모의 확대라는 선순환 구조로 이어진다.
이러한 팬덤 문화는 선수와 팬 간의 강력한 감정적 유대감과 연대의식을 만든다. 과거의 스포츠 관람이 ‘잘하는 선수에게 보내는 박수’ 수준이었다면, KLPGA의 팬덤은 ‘선수와 함께 성장하는 서사’를 공유한다. 팬들은 자신이 응원하는 선수가 신인 시절부터 톱 플레이어로 성장하는 과정을 함께한다. 선수의 성적과 기록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지금 이 대회가 이 선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응원 문구에서 고스란히 나타난다.
선수가 컷 탈락의 시련이나 슬럼프에 빠졌을 때, 필드 바깥에서 팬클럽이 보내는 떡과 커피차 서포트, 애정을 가득 담은 응원 문구는 선수에게 재기의 용기를 주는 강력한 정신적 버팀목이 된다. 응원하는 선수가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릴 때, 팬들은 마치 자신의 손으로 트로피를 잡은 듯 눈물을 흘리며 깊은 감정적 몰입과 보상을 경험한다.
과거 골프장 갤러리는 주로 중장년층 남성이나 직접 골프를 치는 비즈니스 골퍼들에 국한되어 있었다. 그러나 아이돌 응원 방식을 도입한 KLPGA 팬클럽 문화는 여성 팬들로 확대되었고, 그중 일부는 골프를 안 하는데도 그 선수가 좋아서 갤러리로 오는 사람도 있다. 마치 좋아하는 가수의 콘서트장에 가듯 말이다.
열성 팬덤의 존재는 TV 시청률과 각종 영상의 클릭 수, 골프단 공식 유튜브 및 SNS 채널의 활성화로 직결된다. 팬들은 자신이 응원하는 선수의 하이라이트 영상을 자발적으로 생산·유포하고 숏폼 콘텐츠를 만들어 소비한다. 이는 방송사와 협회, 마케팅 대행사에게 무궁무진한 2차 콘텐츠 생산의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 맞다. 한국만의 골프 팬덤 문화는 KLPGA 흥행에 기여한 열정적인 엔진임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이러한 한국만의 골프 팬덤 문화는 좋은 점만 있는 걸까? 꼭 그렇지만은 않은 듯하다.
열정을 넘어서 일부 과열된 팬클럽은 본인이 응원하는 선수의 플레이에만 몰입한 나머지 다른 선수들을 위한 기본적인 골프 에티켓을 소홀히 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응원하는 선수의 샷이 끝나자마자 소음을 내며 자리를 뜨거나 동반 플레이어가 샷을 준비하고 있음에도 이동을 시작하는 행위다. 심지어 경쟁 선수의 스윙 중에 고의로 소음을 냈다고 의심받았던 사례도 있다.
팬들의 지나친 애정과 관심은 때로 어린 프로 선수들에게 감당하기 힘든 무게로 압박한다. 팬클럽의 대규모 응원 속에서 성적이 나오지 않을 때 선수가 느끼는 자괴감과 자책감은 상당하다. 또한 현장이나 온라인 골프 커뮤니티에서 서로 다른 선수의 팬클럽 간에 벌어지는 날 선 신경전과 악성 댓글, 비방전은 건강한 경쟁의 의미를 퇴색시킨다.
특정 스타 플레이어의 팬클럽 수백 명이 인파를 이뤄 이동할 경우, 소수로 현장을 찾은 일반 갤러리는 관람 동선이 막히거나 시야 확보에도 큰 불편을 겪는다. 코스 전체가 선수들의 팬클럽 전용 구역처럼 변질될 경우, 팬클럽에 속하지 않은 관람객이나 조용하게 관람을 즐기려고 하는 갤러리는 이들의 열정적인 응원에 피로감을 느낀다. 가끔은 골프 코스의 갤러리가 일반 갤러리와 팬클럽 갤러리로 나뉜 느낌이다. 팬클럽 갤러리의 열정적인 응원 때문에, 깜짝 놀라는 큰 소리의 응원 구호 때문에 갤러리로 가기 싫다는 말도 나오기 시작했다. 팬클럽 회원들은 본인이 응원하는 선수가 샷을 할 때 다른 갤러리에게 마치 진행 요원처럼 정숙을 요구하기도 하고, 경기 중에 발생하는 룰 판정에 레퍼리를 향해 항의를 제기하는 사례도 가끔 발생한다.
KLPGA의 팬덤 응원 문화는 한국 골프 산업을 키운 독보적 자산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이 독특한 문화가 지속 가능하려면 ‘팬덤의 열정’과 ‘골프 본연의 품격’이 나란히 동행하며 서로 조화를 이뤄야 한다.
가장 효과적인 것은 팬덤, 팬클럽 내부의 자정 노력이다. 응원하는 선수가 아닌 동반 플레이어에 대한 배려, 박수와 응원, 팬클럽 회원 외의 갤러리에 대한 배려의 마음과 실천의 노력이 따라야 한다. 팬클럽의 품격이 곧 선수의 품격이다.
협회와 대회 주최 측은 대형 팬클럽이 몰리는 인기 조의 경우 진행 요원을 대폭 늘리고 팬클럽이든 그렇지 않든 이동과 관람이 원활하게 이뤄질 수 있도록 아이디어를 짜야 한다. 선수들은 팬클럽을 향해 단순히 감사함을 표하는 데 그치지 않고, “동반 선수와 다른 갤러리들을 위해 조금만 더 조용히 응원해 달라”, “다른 선수의 굿샷에도 크게 박수 쳐 주세요”라는 식의 선한 영향력을 발휘해야 한다. 선수가 직접 전하는 메시지는 그 어떤 진행 요원의 지침보다 강력하다.
야구 경기에서 응원하는 팀의 저지를 입고 단체 응원을 하는 모습은 그렇지 않은 관중들로부터도 지지를 받는다. 지켜야 할 것들을 지킬 때 그렇다. 하얀색, 노란색, 파란색 형형색색의 셔츠를 입은 팬클럽의 응원도 다른 사람들의 응원을 받기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왜 그들이, 어떤 것 때문에 팬클럽의 응원 방식에 대해 눈살을 찌푸리는지부터 알아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