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독일 남서부 바덴뷔르템베르크주에 있는 하이델베르크는 한국인에게 ‘고성(古城)이 있는 낭만적인 대학도시’로 먼저 알려져 있다. 네카어강을 따라 형성된 구시가지, 언덕 위의 하이델베르크성, 철학자의 길은 매년 수많은 관광객을 불러들인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다른 주요 도시들과 달리 대규모 폭격을 피한 덕분에 역사적인 도시 경관도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 있다.

오늘날 하이델베르크를 움직이는 힘은 관광만이 아니다. 인구 약 16만 명의 이 도시는 독일을 대표하는 과학·의료 연구 거점이자 유럽의 주요 생명과학 클러스터다. 독일암연구센터(DKFZ), 유럽분자생물학연구소(EMBL), 하이델베르크대학과 대학병원, 막스플랑크연구소, 글로벌 제약기업과 바이오 스타트업이 밀집해 있다.
하이델베르크의 경쟁력은 개별 기관의 명성에만 있지 않다. 기초연구에서 나온 발견이 병원과 임상 현장으로 이동하고, 다시 기업의 신약·진단기술·의료기기 개발로 이어지는 연결 구조가 도시 안에 형성돼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1386년 시작된 학문의 도시
하이델베르크의 도시 이름이 문헌에 처음 등장한 것은 12세기 말이다. 이후 팔츠 선제후의 거점 도시로 성장했으며, 1386년 선제후 루프레히트 1세가 하이델베르크대학을 설립했다. 공식 명칭인 루프레히트카를스 하이델베르크대학교(Ruprecht-Karls-Universität Heidelberg)는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다. 하이델베르크대학은 오늘날에도 독일을 대표하는 연구중심대학으로 평가받는다.
오래된 대학이 있는 도시가 모두 혁신 클러스터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하이델베르크의 특징은 수백 년 동안 축적된 의학·자연과학 연구 기반 위에 전후 국제 연구기관과 현대적인 의료 인프라가 더해졌다는 점이다.
도시의 연구 기능은 구시가지의 대학 건물에만 머물지 않는다. 네카어강 건너편의 노이엔하이머 펠트(Neuenheimer Feld)에는 대학 자연과학 및 의학 캠퍼스, 대학병원, 독일암연구센터와 여러 연구기관이 모여 있다. 이곳에서는 대학 교수와 임상의, 연구자, 기업 관계자가 물리적으로 가까운 거리에서 일한다. 바이오 산업에서 특히 중요한 기초연구와 임상 현장의 간극을 줄이는 데 유리한 환경이다.

독일 최대 바이오 생명과학 클러스터 BioRN
하이델베르크와 라인네카 지역의 생명과학 생태계를 대표하는 기관은 바이오알엔 라이프사이언스 클러스터(BioRN Life Science Cluster)다. 1996년 출범해 올해로 30주년을 맞은 BioRN은 대학이나 연구소가 아니라, 지역의 기업·연구기관·병원·투자자·창업지원기관을 연결하는 클러스터 조직이다.
라인네카 지역에는 약 1200개의 생명과학 기업, 15개 이상의 주요 연구기관, 약 1만 4000명의 과학 인력이 있다. 그리고 매출 기준 세계 10대 제약기업 가운데 7곳이 이 지역에 거점을 두고 있다. BioRN 자체 회원도 180개 이상이다. BioRN 회원 네트워크에는 하이델베르크대학, 하이델베르크대학병원, EMBL, DKFZ 같은 연구·의료기관뿐만 아니라 애브비(AbbVie), 바스프(BASF), 바이엘(Bayer), 베링거인겔하임(Boehringer Ingelheim)과 같은 대기업이 참여한다. 바이오테크 기업, 임상시험수탁기관(CRO), 의약품 위탁개발생산기업(CDMO), 투자사, 특허·규제·사업개발 전문회사도 함께한다.

BioRN의 역할은 단순한 네트워킹 행사 개최에 그치지 않는다. 기업의 기술 수요에 맞는 연구자와 스타트업을 찾는 ‘BioRN Scout’, 해외 기업의 독일·유럽 진출을 지원하는 소프트랜딩, 스타트업 지원과 투자자 연결 등을 제공한다. 초기 바이오 기업이 사용할 수 있는 공유형 습식 실험실인 바이오랩스 하이델베르크(BioLabs Heidelberg)도 BioRN이 주도해 유치했다.
바이오 스타트업에게 실험실은 일반 사무공간과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고가의 장비와 안전설비를 직접 마련해야 한다면 사업을 시작하기도 전에 상당한 자본이 필요하다. 공용 실험실은 초기 고정비를 줄이는 동시에, 비슷한 단계의 기업과 연구자, 투자자를 한 공간에 모으는 역할을 한다. BioRN은 연구기관을 나열하는 조직이라기보다 연구 결과가 창업과 투자, 기술이전으로 이동하도록 연결하는 일종의 생태계 운영자에 가깝다.
EU 공동 연구기관, 유럽분자생물학연구소의 역할
유럽분자생물학연구소(European Molecular Biology Laboratory, EMBL)는 하이델베르크 생명과학 생태계의 국제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기관이다. EMBL은 여러 회원국이 공동으로 운영하는 정부 간 연구기관으로, 하이델베르크에 본부와 주요 연구시설을 두고 있다.
현재 하이델베르크를 비롯해 영국 힝스턴, 프랑스 그르노블, 독일 함부르크, 이탈리아 로마, 스페인 바르셀로나 등 6개 거점을 운영한다. 연구 분야는 세포생물학, 유전체학, 구조생물학, 생물정보학, 이미징, 조직생물학 등 현대 생명과학의 핵심 영역을 폭넓게 아우른다.
EMBL의 역할은 논문을 생산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첨단 연구장비와 데이터 인프라를 과학계에 제공하고, 연구자 교육과 국제 공동연구를 수행한다. 기술이전 자회사인 엠블렘(EMBLEM)은 EMBL에서 나온 지식재산을 관리하고 기업 라이선싱과 스타트업 설립을 지원한다. 기초연구와 사업화를 연결하는 별도의 전문조직이 있다는 점도 하이델베르크 생태계의 중요한 특징이다.

암 연구에서 임상까지 연결하는 독일암연구센터
독일암연구센터(Deutsches Krebsforschungszentrum, DKFZ)는 독일 최대 생의학 연구기관이다. 헬름홀츠협회 소속으로 암의 발생 원인과 위험요인, 예방, 진단, 치료법을 연구한다. 3000명 이상의 인력이 근무하며 세포·종양생물학, 유전체학, 면역학, 영상 및 방사선종양학, 역학과 암 예방 등을 연구한다. DKFZ는 특히 연구 결과를 환자 치료로 연결하는 중개연구를 핵심 기능으로 삼고 있다.
이를 상징하는 기관이 국립종양질환센터(National Center for Tumor Diseases, NCT) 하이델베르크다. DKFZ와 하이델베르크대학병원 등이 협력해 연구자와 임상의가 정밀진단, 임상시험, 새로운 암 치료법을 함께 개발한다. 연구소에서 발견한 바이오마커나 치료 표적이 실제 환자에게 적용될 가능성을 병원과 공동으로 검증할 수 있는 구조다.
한국 바이오 스타트업의 관점에서 DKFZ와 대학병원은 단순히 명성이 높은 연구기관이 아니다. 새로운 암 진단기술이나 치료제 후보가 유럽 시장에 진입하려면 임상적 필요성, 환자 검체 접근, 현지 의료진과의 검증, 규제전략이 필요하다. 하이델베르크에서는 이러한 과정을 지원할 연구자, 병원, 임상 전문가와 사업화 파트너를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서 찾을 수 있다.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의학교육의 전통
흔히 하이델베르크대학병원을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병원’이라고 부르지만, 더 정확하게는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의 의학 교육 전통을 계승한 대학병원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적절하다. 하이델베르크대학 의학부의 역사는 1388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이델베르크대학 및 해부학 교실을 배경으로 한 대표적인 영화 ‘아나토미’로 대중에게는 잘 알려져 있다.
오늘날 하이델베르크대학병원(Universitätsklinikum Heidelberg, UKHD)은 진료와 연구, 의학교육을 함께 수행하는 독일의 대표적인 대학병원이다. 특히 암, 희귀질환, 신경과학, 심혈관질환과 복잡한 중증질환 분야에서 강점을 갖는다. DKFZ를 비롯한 외부 연구기관과 공동 연구를 수행하고, 개발된 치료법을 병원에서 검증한다.
하이델베르크의 강점은 연구기관이 병원 주변에 ‘존재한다’는 데 그치지 않는다. 연구소와 병원이 NCT 같은 공동 조직을 만들고, 연구자와 임상의가 하나의 과제를 함께 수행하며, 성과를 기술이전이나 창업으로 연결한다. 과학과 의료, 산업을 하나의 연속된 가치사슬로 보는 접근이다.
만하임과 루트비히스하펜까지 연결되는 생활권
하이델베르크 생명과학 클러스터는 도시 행정구역 안에서 끝나지 않는다. 하이델베르크에서 기차로 약 15분 거리에 만하임이 있고, 라인강 건너에는 세계 최대 화학기업 가운데 하나인 바스프(BASF) 본사가 자리한 루트비히스하펜이 있다. 세 도시는 라인네카 광역경제권이라는 하나의 생활·산업권을 형성한다.
만하임은 의료기술과 임상 분야에서 하이델베르크를 보완한다. 특히 하이델베르크대학에는 하이델베르크 의학부와 만하임 의학부라는 두 개의 의과대학이 있다. 만하임 의학부는 만하임대학병원(Universitätsmedizin Mannheim)과 긴밀히 결합돼 연구와 의학교육을 수행한다.
하이델베르크대학병원과 만하임대학병원은 운영 구조가 구분돼 있지만, 양쪽 의학부가 모두 하이델베르크대학에 속하고 광역권 안에서 연구·교육·임상 협력을 수행한다. 결과적으로 하나의 대학이 서로 다른 강점을 가진 두 의료 거점을 확보한 셈이다.
지역 간 연결을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가 파이브에이치티 케미스트리 앤드 헬스(5-HT Chemistry & Health)다. 루트비히스하펜에 기반을 둔 5-HT는 화학과 헬스케어 분야의 기업·스타트업·투자자·연구기관을 연결한다. 바스프, SAP, 라인네카 광역권과 만하임·하이델베르크·루트비히스하펜의 창업지원기관들이 주주로 참여하고 있다.

이 구조에서 하이델베르크는 대학과 기초·임상연구, 만하임은 의료기술과 산업 응용, 루트비히스하펜은 화학·소재 산업이라는 서로 다른 강점을 제공한다. BioRN과 5-HT 같은 중간 조직은 도시와 산업 간의 경계를 넘어 필요한 파트너를 연결한다.
하이델베르크에 선 한국 바이오 스타트업들
지난 9월 17일 하이델베르크 비즈니스개발센터(Business Development Center)에서는 ‘K-바이오텍 이노베이션 데이(K-Biotech Innovation Day)’가 열렸다. IBK창공 대구, 와이앤아처, 일이삼팩토리가 주최하고 BioRN이 현지 파트너로 참여한 행사였다.
이날 한국 바이오·메드테크 스타트업들은 BioRN 생태계의 연구기관, 임상·사업개발 전문가와 기업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기술을 소개했다. 참가기업들은 임상·공동연구 파트너, 유통 파트너, 기술이전과 라이선싱 기회, 전략적 사업 협력을 주요 수요로 제시했다.
먼저 아바타 테라퓨틱스(AAVATAR Therapeutics)는 인공지능을 활용해 특정 조직에 더욱 정확하고 안전하게 유전자를 전달할 수 있는 AAV 캡시드를 설계하는 유전자치료제 플랫폼 기업이다. 이날 현장에서 가장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에이트 스튜디오(AIT STUDIO)는 인공지능 기반 보행 분석을 통해 환자의 움직임과 기능 상태를 정량화하는 디지털 헬스케어 기업이다. 프라운호퍼 연구소뿐만 아니라 유럽 최대 대학 병원인 베를린 샤리테대학병원에 PoC를 위한 장비 구매 계약을 이끌어 낼 정도로 현지 기관의 관심이 대단했다.
비체담(BICHEDAM)은 천연물 소재를 기반으로 경구 투여형 치료제를 개발하는 바이오 기업이다. 한의사 출신 문호빈 대표는 한의원을 접고 생약 기반 약물 개발에 헌신할 정도로 열정을 갖고 이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현지에서 GSK와 같은 글로벌 제약기업의 관심을 받았고, 프랑크푸르트 괴테대학교의 스포츠 의학 연구소와 공동 연구개발을 논의했다.
비욘드디엑스(BeyondDx)는 인공지능과 다중오믹스 데이터를 결합해 질병을 조기에 발견하는 진단기술 기업이다. CJ, SK케미칼, 종근당 등 국내 대기업 제약사에서 치료제 연구개발(R&D)을 시작으로 사업 전략, 전략 기획, 사업 개발 등을 거친 정소진 대표가 창업했다. 이날은 김현표 이사가 독일 현지의 공동 연구개발 파트너를 찾기 위해 열정적으로 피칭에 임했다.

엘엠엔틱바이오텍(LMNTIC Biotech)은 미세 자기영동 기술을 이용해 혈액 속 순환종양세포를 분리·분석하는 액체생검 플랫폼 기업이다. 공동창업자 김서림 CSO는 8년간의 독일 생활을 바탕으로 지역에 대한 깊은 이해로 노련하게 네트워킹을 만들었다.
기술 분야는 서로 달랐지만 이들 기업에는 공통된 과제가 있었다. 한국에서 확보한 연구 결과와 제품을 유럽 시장에서 어떤 임상적 문제와 연결할 것인지, 누가 기술을 검증하고 공동 연구할 것인지, 그리고 어느 국가에서 첫 번째 사업화 사례를 만들 것인지에 답해야 한다는 점이다.
바이오 기업의 해외 진출은 전시회 참가나 현지 법인 설립만으로 되지 않는다. 좋은 기술이 있어도 현지 의료진과 연구자가 그 기술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공동 검증 결과가 만들어져야 한다. 이후 규제와 임상, 투자, 라이선싱 또는 유통으로 이어지는 긴 과정이 기다리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BioRN에서의 발표는 유럽 진출의 완성이 아니라 출발점이다. 발표 이후 어떤 연구자와 후속 논의를 이어가고, 어느 병원과 작은 검증 프로젝트를 시작하며, 그 결과를 현지 사업개발로 연결할지가 더 중요하다.
하이델베르크에는 세계적인 대학과 병원, 연구기관이 있다. 그러나 그 이름만으로는 오늘날의 바이오 클러스터를 설명하기 어렵다. 하이델베르크의 진짜 경쟁력은 연구기관과 병원, 스타트업, 제약회사, 투자자가 서로 만날 수 있는 구조가 오랜 시간 축적됐다는 점이다.
BioRN은 필요한 파트너를 찾아 연결하고, BioLabs는 초기 기업에 실험 공간을 제공한다. EMBL과 DKFZ는 세계적 수준의 연구와 기술을 생산하고, 대학병원은 이를 임상 현장과 연결한다. 인접한 만하임과 루트비히스하펜은 의료기술과 화학·소재 산업의 기반을 보탠다.
한국에도 우수한 병원과 연구기관, 바이오 기업이 밀집한 지역이 적지 않다. 그러나 세계적인 바이오 클러스터가 되기 위해서는 기관의 수보다 연구 결과가 병원과 기업으로 이동하는 경로, 해외 기업이 적절한 파트너를 찾는 창구, 작은 공동 검증을 실제 계약과 투자로 발전시키는 운영 역량이 필요하다.
필자 이은서는 한국에서 법학을 전공했고, 베를린에서 연극을 공부했다. 예술의 도시이자 유럽 스타트업 허브인 베를린에 자리 잡고 도시와 함께 성장하며 한국과 독일의 스타트업 생태계를 잇는 123Factory를 이끌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