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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스타트업열전
‘추울수록 쑥쑥’ 히트펌프 타고 큰 베를린 기후테크 스타트업

타사 제품 구매상담부터 설치, 관리까지 아우른 ‘엔팔’, 기술자 직고용해 설치에 집중한 ‘테르몬도’

[비즈한국] 독일의 이번 여름이 더웠다지만 겨울에 비하면 그리 큰 걱정거리는 아니다. 독일의 여름은 짧고, 겨울은 유독 길게 느껴진다. 기상학적 겨울과는 별개로 오후 4시면 깜깜해질 정도로 해가 짧고, 흐리고 축축한 날이 많아 사실상 6~7개월을 겨울로 보는 게 일반적이다. 실제 임대차 관행상으로도 난방 기간(Heizperiode)은 10월 1일부터 4월 30일까지 총 7개월로 잡는 경우가 많다. 이 기간에는 집주인이 실내 20~22도 정도를 유지할 수 있게 난방을 보장해야 한다는 판례도 있다.

독일의 가장 보편적인 난방기는 하이쭝(Heizung)이라고 불리는 라디에이터다. 하이쭝 자체가 난방이라는 뜻이지만 사실상 라디에이터를 지칭하는 것으로 대명사화됐다.

하이쭝이 독일 가정에 본격적으로 퍼진 건 1960~70년대다. 1970년대 들어 신축 주택의 표준이 됐고, 1960년대 말만 해도 30%에 불과했던 서독 주택의 중앙난방 보급률은 1980년대 후반 4분의 3까지 올라갔다. 그 후로 약 반세기 동안 독일의 겨울을 책임져왔다.

원리는 한국의 난방과 비슷하다. 가스나 기름으로 보일러를 데우고, 온수를 각 방 벽면 등에 설치된 금속 재질 라디에이터로 보내 공기를 데우는 방식이다. 최근 지어진 일부 주택에는 우리나라처럼 바닥 난방까지 되도록 설치하는 경우도 많다. 독일에너지수자원산업협회(BDEW)에 따르면 가스와 기름으로 난방하는 주택은 지난해 기준 73.3%를 차지하고 있다.

독일의 주택 앞에 설치된 히트펌프 실외기. 사진=이정우 제공

히트펌프, 가스보일러 효율 3~4배

기후위기 속에 화석연료 의존을 줄이려는 움직임이 커지면서, 기름·가스보일러의 대안으로 떠오른 난방기가 히트펌프(Heat Pump)다.

히트펌프는 화석연료나 전기로 열을 직접 만들어내는 기존 보일러와 달리 공기 중의 열에너지를 포집해 필요한 곳으로 보내는 친환경 난방 장치다. 에어컨의 실내기와 실외기의 위치를 바꿔놓았다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외부 공기에서 미세한 열을 흡수한 뒤 압축기로 온도를 끌어올려 실내 난방과 온수로 공급한다. 제한적이긴 하지만 여름에는 실내 열을 밖으로 배출해 에어컨과 유사한 냉방 기능으로 쓸 수도 있다.

친환경 측면을 빼더라도 효율 역시 장점이다. 전기히터는 전기 1로 열 1을 만들고, 가스보일러는 가스 1로 열 0.9 남짓을 얻는다고 할 때, 히트펌프는 전기 1로 바깥 공기의 열 2~3을 끌어와 총 3~4의 열을 낸다. 효율이 300~400%에 이르는 셈이다.

두 달 전 히트펌프를 설치한 이웃 주민 크리스토프 쉴 씨는 “기존 가스보일러가 노후해 교체 시기가 된 데다 에너지 효율은 더 높고 비용까지 줄일 수 있다고 해서 히트펌프를 설치했다”며 “본격적인 겨울까지 조금 더 지켜봐야겠지만 지금까지는 만족하고 있다”고 말했다.

의무 사라졌는데, 판매는 더 늘어

독일 히트펌프 시장에 처음 불을 붙인 건 보조금이었다. 메르켈 정부는 2019년 기후보호 패키지를 내놓고 그해 12월 2050년 탄소중립 목표를 법에 담았다. 이어 2020년 1월부터 낡은 석유보일러를 히트펌프 같은 재생에너지 난방으로 바꾸면 설치비의 최대 45%를 지원했다. 이듬해부터는 난방과 수송에 쓰는 화석연료에 국가 탄소 가격을 매기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방아쇠가 당겨진 건 2022년 가스 위기였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가스값이 폭등하자 그해 히트펌프 판매는 전년보다 53% 늘었다.

난방법(Heizungsgesetz) 정쟁 또한 영향을 미쳤다. 2023년 올라프 숄츠 총리가 이끌던 이른바 ‘신호등 연정’(사회민주당·녹색당·자유민주당)은 건물에너지법을 개정했다. 2024년부터 새로 다는 난방기는 열의 65%를 재생에너지로 만들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사실상 히트펌프를 의무화한 셈이었다. 하지만 “정부가 우리 집 보일러까지 정해주느냐”는 반발이 거셌고, 연립정부를 흔든 대표적 갈등 소재가 됐다.

논란 속에 법 시행 전 서두르는 수요가 몰리며 2023년 판매는 35만 6000대로 역대 최고를 찍었다. 하지만 이듬해에는 불확실성에 결정을 미루는 집주인이 늘면서 19만 3000대로 반 토막이 났다.

독일 주택 난방 에너지원 비율. 이미지=이정우 제공

2025년 5월 출범한 프리드리히 메르츠 총리의 기민·기사련(CDU/CSU)과 사민당 연정은 이 규정을 없앴다. 새 ‘건물현대화법’(GModG)이 올해 7월 공포·시행되면서 65% 의무는 사라졌다. 집주인은 이제 가스·석유 보일러를 포함해 원하는 난방기를 고를 수 있다.

의무가 사라졌으니 히트펌프 판매가 꺾였을까. 올해 상반기 독일에서 팔린 히트펌프는 19만 5000대로 1년 전보다 40% 늘었다. 상반기 기준으로는 2023년 다음으로 많다. 작년에는 히트펌프가 처음으로 가스보일러를 제치고 독일에서 가장 많이 팔린 난방기가 됐다. 판매량은 29만 9000대, 전체 48%에 달했다.

한동안 히트펌프 열풍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이란 전쟁 장기화 등의 여파로 국제 가스 가격이 다시 오르고 있어서다.

올해 초만 해도 독일 가정용 가스요금은 에너지 위기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이었다. BDEW에 따르면 올해 1월 단독주택(연 2만 kWh 사용 기준) 가스요금은 1kWh당 11.1센트 정도로, 연간 약 2200유로 수준이었다. 그러나 2월 이란 전쟁이 터지면서 국제 가스 가격이 다시 치솟았다. 지난달 말 유럽 가스 가격의 기준인 네덜란드 TTF 선물은 2022년 12월 이후 처음으로 MWh당 100유로를 넘었다. 한 달 사이 30% 넘게 뛴 것으로, 1월 평균(MWh당 33.64유로)의 3배에 이른다. 이후 90유로 안팎으로 내려왔지만 여전히 연초보다 크게 높다.

가정이 체감하는 요금도 시차를 두고 따라 오르고 있다. 10월 말 신규 계약 기준 가스요금은 1kWh당 14센트 안팎으로, 1월보다 20% 넘게 올랐다. 가격 비교 사이트 베리복스(Verivox)는 연말연초 요금이 10~20% 더 오를 것으로 내다본다. 독일 연방네트워크청은 공급 자체는 안정적이라고 밝혔다. 가스가 끊길 걱정은 없지만, 비싸질 수는 있다는 의미로 읽힌다.

히트펌프는 안 만들지만 히트펌프로 큰다

난방비 부담이 커지면 집주인들은 대안을 더 적극적으로 따져볼 것이다. 하지만 새 난방기를 결정하고 설치하기까지는 비용과 시공이라는 장벽이 남는다. 베를린에서 시작한 엔팔과 테르몬도는 이 장벽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낮추고 있다.

엔팔은 태양광 패널 임대로 출발해 히트펌프 시장에 뛰어들어 급성장했다. 사진=enpal.com

엔팔(Enpal)은 2017년 태양광 패널 임대로 출발한 스타트업이다. 집주인은 목돈 없이 지붕에 패널을 올리고 매달 일정액을 낸다. 이 모델로 엔팔은 유럽 최대의 가정용 태양광 업체가 됐다.

히트펌프 시장이 커지자 2023년 엔팔도 여기 뛰어들었는데, 지난해에는 핵심 사업 매출의 3분의 1을 차지할 정도로 급성장했다. 이에 힘입어 지난해 창사 이래 최대인 11억 유로 매출을 올렸다. 또 설치를 맡는 영업 부문에서 처음으로 연간 잉여현금흐름이 플러스가 됐다. 설치 사업만 놓고 보면 번 돈으로 비용을 감당했다는 뜻이다.

엔팔은 히트펌프를 만들어 파는 대신 주로 보쉬(Bosch) 등 타사의 히트펌프 구매 상담과 설치, 보조금 신청, 그리고 계약금 없는 장기 할부라는 사업모델로 성장하고 있다. 이미 태양광 패널을 올린 고객의 집에 배터리와 전기차 충전기, 히트펌프를 차례로 더하고, 자체 플랫폼 ‘엔팔.원(Enpal.One+)’으로 이 설비들을 묶어 전기를 언제 쓰고 저장하고 팔지를 관리한다. 새 고객을 찾는 대신 이미 신뢰를 쌓은 11만 5000여 가구의 고객들을 타깃으로 한 것이 적중한 셈이다.

테르몬도는 디지털 난방 설치 업체로 시공 인력을 회사 정규직원으로 고용한다. 사진=thermondo.de

2013년 창업한 테르몬도(Thermondo)는 출발점이 다르다. 엔팔이 고객 관계에서 시작했다면, 테르몬도는 공사 현장에서 시작했다. 집마다 제각각인 난방 공사를 공장 공정처럼 표준화하고 있는 ‘디지털 난방 설치업체’다. 고객이 온라인에 집 면적과 건축 연도, 기존 난방 방식 등을 입력하면 현장 상담을 거쳐 설치비까지 포함한 고정가 견적이 나온다. 보조금 신청은 회사가 대행하고, 설치는 보통 사나흘이면 끝난다.

이 약속을 지키는 건 직접 고용한 기술자들이다. 직원 1200여 명 가운데 600명 이상이 정규직 기술자다. 기술자 1명 부르기도 어려운 독일에서 시공 인력을 회사 안에 둔 것이다. 2024년에는 가스·석유 보일러 판매를 아예 중단하고 히트펌프에 집중했다. 지난해에는 5456대를 설치하며 호황을 맞았다. 13년간 적자였던 회사에 드디어 화색이 돌고 있다. 테르몬도 CEO 펠릭스 플로크는 올해 8월 “2026년은 테르몬도 역사상 첫 흑자 연도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기후테크, 발명에서 보급으로

독일 주택가의 풍경을 바꾸는 데에는 법만큼이나 에너지 가격이 큰 영향을 미친다. 난방법을 둘러싸고 정치권이 논쟁을 이어가는 동안 집주인들은 오래된 보일러를 바꿀 때가 됐는지, 앞으로 난방비를 얼마나 내야 할지 따졌다. 가스 가격이 다시 오르면 히트펌프를 검토하는 사람도 늘어날 수 있다.

하지만 좋은 기계를 고르는 것과 실제로 설치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히트펌프는 수만 유로의 초기 비용이 들고, 믿을 만한 시공 인력을 제때 구하기도 쉽지 않다. 엔팔은 금융을 붙여 초기 부담을 나누고, 테르몬도는 견적부터 시공까지 절차를 표준화해 집주인의 수고를 줄인다. 두 회사는 각자 다른 방식으로 히트펌프를 집 안에 들이는 과정의 장벽을 낮추고 있다.

쉴 씨 가족이 환경운동가라서 히트펌프를 고른 것은 아니었다. 오래된 보일러를 바꿀 때가 됐고, 비용을 아낄 수 있다는 설명이 선택에 영향을 줬다. 두 베를린 스타트업이 보여주는 기후테크의 기회도 여기에 있다. 새로운 기술을 발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미 있는 기술이 실제 소비자의 선택과 설치로 이어지게 만드는 일이다.

필자 이정우는 17년간 언론사 기자로 자동차, 2차전지, 중공업 등 주요 산업을 비롯해 국방, 외교, 환경, 교육, 보건복지 등 다양한 분야를 두루 담당했다. 특히 모빌리티 및 에너지 전환과 지속가능성 중심의 산업 구조 변화를 현장에서 취재했다. 현재 독일 베를린에 거주하며 스타트업 액셀러레이터 ‘123팩토리’의 파트너로 활동하고 있다.

이정우 칼럼니스트
writer@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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