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정부가 수립한 ‘제12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의 장기 전력수요 전망을 둘러싸고 수요 예측이 과잉됐다는 비판이 나온다. 불과 4개월 만에 첨단산업 부문의 2040년 추가 전력수요 잠재량이 약 6배 급증했기 때문이다. 정부는 국가 미래 먹거리 산업을 뒷받침하기 위한 선제적 인프라 확충이라고 설명하지만, 검증되지 않은 기업의 장밋빛 투자 의향을 여과 없이 반영했다는 비판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향후 수요가 적을 경우 무리하게 지어진 대형 발전소와 송전망이 고스란히 좌초자산으로 전락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메가프로젝트 반영에 2040년 목표수요 급등
이번 12차 전력수급기본계획(전기본) 전력수요 재전망의 핵심 배경은 지난 6월 29일 정부가 발표한 ‘대한민국 대도약 3대 메가프로젝트’다. 전력 당국은 호남권 산단 등 대규모 반도체 팹 조성 계획과 전국 권역별 기가와트(GW)급 AI 데이터센터 신규 구축 계획이 구체화되면서 이를 장기 전력수요에 대대적으로 반영했다.
이로 인해 지난 4월 3차 토론회 당시 제시한 전망치가 4개월 만에 큰 폭으로 수정됐다. 2040년 기준 시나리오 전력소비량 목표는 당초안 대비 28.8% 증가한 847.3TWh로 확정됐으며, 최대전력 수요 역시 기존 131.8GW에서 158.4GW로 20.2%(26.6GW) 급증했다.
특히 첨단산업 부문의 순증분(추가수요) 소비량은 4월 잠정 발표 당시 29.3TWh에서 170.5TWh로 약 6배 가까이 폭증했다. 반도체 추가수요에서만 최대전력 20.6GW가 늘어났고, AI 데이터센터 역시 순증분 소비량이 26.5TWh에서 84.9TWh로 3배 이상 늘어나며 최대전력 7.9GW가 추가됐다.
세부 수치를 살펴보면, 한국개발연구원(KDI)의 거시 경제성장률(GDP) 전망치 조정에 따른 증가분은 2040년 최대전력 기준 약 1GW에 불과하다. 26.6GW에 달하는 최대전력 순증가분의 대부분은 국가 경제 성장에 따른 자연스러운 수요 확대가 아니라, 3대 메가프로젝트 발표 이후 조사된 대기업들의 반도체(20.6GW) 및 AI 데이터센터(7.9GW) 신규 투자 의향을 ‘추가수요’라는 명목으로 대거 얹은 결과다.
경기 침체 등 불확실성 반영 안 돼
전문가들이 가장 크게 우려하는 대목은 현실적인 경기 변동성을 고려하지 않은 ‘상방 편향적 산정 방식’과 ‘중복 계상(더블 카운팅)’ 가능성이다. 전력 당국은 기준 시나리오와 상향(가속) 시나리오 두 가지만을 제시했을 뿐, 글로벌 경기 침체나 반도체 다운사이클, 인공지능(AI) 투자 거품 붕괴, 개별 기업의 투자 철회 및 지연과 같은 ‘하방(비관) 시나리오’는 제시하지 않았다.
정부의 계산 방식이 전력 수요를 두 번 겹쳐 센 ‘이중 계산(더블 카운팅)’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전력 당국은 국가 경제가 성장하며 자연스럽게 늘어나는 전기 수요에 기업들의 신규 투자 계획을 별도로 더해 최종 수요를 산정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반도체 등 첨단 산업은 이미 국내총생산(GDP) 성장을 이끄는 핵심 동력이어서, 전체 경제 성장률을 토대로 계산한 기본 전력 수요 안에 이미 상당 부분 포함됐을 수 있다. 결국 기본 성장분에 기업의 대규모 투자 계획을 통째로 또 얹음으로써, 같은 전력 수요를 중복으로 반영해 전체 예측치를 과도하게 부풀렸다는 지적이다.
김병권 녹색전환연구소 소장은 “3대 메가프로젝트는 냉정한 국가 정책 기획이라기보다 AI 호황과 반도체 초호황에 기댄 극소수 기업의 비즈니스 기대와 의지를 액면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며 “반도체가 지금처럼 계속 초호황 국면을 이어가거나 기업의 기대대로 증설이 지속된다는 보장이 전혀 없다”고 짚었다.
특히 데이터센터 수요에 대해 “3년 안에 8.4GW, 2035년까지 2단계 10GW를 더한다는 계획은 불확실성이 극도로 높다”며 “정부가 2단계 불확실성을 감안하겠다고는 하지만, 우선 반영했다는 1단계 물량조차 액면 그대로 건설되고 100% 가동될 수 있을지 철저히 재평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과잉 설비 ‘세금 먹는 하마’로 전락 우려

과잉 수요 예측을 바탕으로 지어진 발전 설비들은 실제 수요가 기대에 미치지 못할 경우 가동률이 급락해 좌초자산으로 전락할 위험이 크다.
기후솔루션에 따르면 11차 전기본에 반영된 신규 LNG 발전소의 경우 2038년 기준 이용률이 11% 수준에 그칠 것으로 전망된다. 가동 시간이 하루 2~3시간에 불과한 설비를 무리하게 추가하면, 발전기가 멈춰 있어도 사업자에게 고정비 성격의 용량요금을 지급해야 해 전력 공급 비용이 상승한다. 송전 제약과 수요 불일치를 겪고 있는 동해안 민간 석탄화력발전소에 대해 지급하지 못한 미정산 대금이 1조 원을 넘어선 사례는 과잉 투자가 낳은 대표적인 부작용으로 꼽힌다.
한가희 기후솔루션 에너지시장정책 팀장은 “이용률이 10%대에 불과할 발전소를 무리하게 지어놓으면, 투자가 무산되거나 가동률이 떨어져도 그 비용을 한전이 보전해줘야 한다”며 “이는 결국 200조 원대 부채를 안고 있는 한전의 재무 부담을 가중시키고, 장기적으로 국민들의 전기요금 인상이나 세금 부담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또한 “한전이 적자를 메우기 위해 대규모 한전채를 발행하면 금융시장의 자금을 흡수해 민간 자본시장 경색을 유발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과도하게 부풀려진 수요 전망은 대형 발전 설비 건설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쓰일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정부가 2040년 목표 수요를 높여 잡으면서 이것이 신규 원전 및 대형 LNG 발전소 신설의 명분이 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2011년 순환정전 사태로 이후 전기본은 발전 설비 계획을 항상 과다 반영하면서 수요 예측에 실패했다. 이런 상황에서 전기본에 따른 원전과 LNG 등 대규모 발전 설비는 계획대로 들어서 대형 발전 이해관계자의 이익으로만 돌아갔다는 비판도 나온다.
김병권 소장은 “3대 메가 프로젝트 자체가 매우 과도한 기획이며, 현재의 수요 예측은 최근의 AI 호황에 기댄 시나리오”라며 “당연히 이는 기존 원자력발전 가동연장이나, 신규 원자력발전, 신규 가스발전, 신규SMR 등 이해관계자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문제는 전력 공급의 부족이 아니라 ‘전력 공급 과잉’으로 인해 전력망의 물리적 안정성이 떨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태양광과 핵발전소는 실시간으로 출력을 유연하게 조절하기 어려운 ‘경직성 전원’에 해당한다. 냉난방 전력 수요가 낮은 봄·가을철 낮 시간대에 태양광 발전량이 급증하는 데 더해 원전까지 고정 출력으로 계속 가동되면, 전력 공급이 수요를 초과해 계통 주파수와 전압이 흔들려 대규모 정전 위험이 커진다.
현재 전력 당국은 계통 붕괴를 막기 위해 호남 등 지방의 재생에너지 발전기부터 강제로 전원을 차단하는 ‘출력제어’를 시행하고 있다. 그러나 대형 기저발전기가 추가로 들어서면 출력제어가 더욱 빈번해져 국내 재생에너지 사업자들의 수익성이 악화하고 보급을 위축시키는 결과를 나을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성원기 강원대학교 명예교수는 “태양광과 핵발전소라는 경직성 전원이 충돌하면 봄·가을철 전력망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어렵다”며 “대형 발전기 위주의 계획을 멈추고, 에너지저장장치(ESS) 등 국내 재생에너지 산업을 키우는 방식으로 재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투명성 높이고 교차 검증해야
전문가들은 이러한 위험을 막기 위해 전기본 수립 절차의 투명성을 대폭 높이고 국가 책임 위주 계획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제언한다.
우선 수요 예측 모형과 데이터를 외부에 투명하게 공개해 사회적 교차 검증을 가능하게 해야 한다는 주문이 나온다. 한가희 팀장은 “정부의 전기본 수립 과정에서 심각한 문제는 투명성이 지나치게 떨어진다는 점이다”며 “현재 발표된 수치가 과다 산정이 되었는지, 혹은 과소 산정이 되었는지 외부 전문가들이 합리적으로 평가하고 따져볼 수 있는 정보가 공개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대기업의 대규모 전력 수요를 국가가 100% 도맡아 공공 인프라로 지어주는 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김은성 사단법인 넥스트 부대표는 “기업들이 제시한 사업 추진 계획을 국가가 전량 수요로 잡아 발전 설비를 지었는데, 정작 공급 시점이 됐을 때 수요가 미치지 못하면 그 위험과 비용은 고스란히 국민이 부담하게 된다”며 “미국 등 선진국처럼 대규모 전력을 필요로 하는 하이퍼스케일러 기업이 자체적으로 발전소와 계통망을 건설하도록 유도하고, 정부는 인허가를 신속히 처리해주는 등 제도적 지원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국가 리스크를 줄여야 한다”고 제언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