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 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붓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한국 사람이라면 대부분 이 문단을 알 거다. 이효석 작가가 1936년 발표한 단편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한 장면으로, ‘메밀꽃 필 무렵’은 교과서 수록 작품 중에서도 인기 있는 작품이었으니까. 이 작품을 읽으면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붓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인 봉평의 메밀꽃밭 풍경이 궁금해질 수밖에 없는데, 메밀꽃이 피기 시작하는 8월 말부터 9월경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이 복작복작해지는 이유다.

평창군 봉평면은 ‘메밀꽃 필 무렵’의 배경이자 이효석 작가의 고향. 봉평면에선 1999년부터 이효석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기 위해 ‘평창 효석문화제’를 연다. 올해는 지난 9월 4일 시작해 9월 13일에 끝나는 일정. 지역주민들이 직접 운영하는 축제 분위기는 소박하다. 메밀꽃밭으로 향하는 흥정천 징검다리를 건너, 깡통열차를 타고 메밀꽃밭을 둘러보고, 메밀껍질풀장에 숨겨진 황금메밀을 찾으며 즐거워하다, 이효석 문학관과 효석달빛언덕에서 작가의 생애를 둘러보는 식.
이 시기 봉평을 찾는 이들이 가장 많이 하는 행위는 흐드러지게 핀 메밀꽃밭에 폭 파묻혀 ‘인생샷’을 남기는 것일 테다. 이곳을 찾는 방문객들의 연령대가 꽤 높은 편이라, 당신이 조금 젊은 편이라면 단체 사진을 찍어달라는 요청을 숱하게 받을 수 있다. 물론 세상 즐거워하는 어르신들의 표정을 보고 있으면 절로 허리를 굽혀가며 여러 각도로 사진을 찍게 될 게 분명하다. 그러면서 또 곱씹게 된다. 잊지 말자, 오늘이 나의 가장 젊은 날임을.
이효석 작가가 35세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떴기 때문인지, 이효석 문학관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봉평을 찾은 이상 필수다. 입장료가 있으나 축제 기간 동안은 무료. 이효석의 육필 원고와 사진 등 자료로 그의 발자취를 살펴볼 수 있고, 언덕배기에 위치해 있어 봉평면을 한눈에 살펴보기 용이하다. 인근에 위치한 효석달빛언덕도 함께 찾을 것. 2018 평창동계올림픽 예술창작 특구사업의 일환으로 문을 열었는데, ‘메밀꽃 필 무렵’에 등장하는 달빛의 상징성을 바탕으로 다양한 예술 체험이 가능한 공간으로 구성되었다.
해설사와 걷는 문학 산책, 이효석문학상 작가 북콘서트 등 축제 기간 여러 행사들이 있지만, 이번 참에 봉평을 찾을 거라면 오일장이 열리는 9월 12일을 추천한다. 매월 ‘2’와 ‘7’이 들어가는 날에 서는 전통 오일장으로, 메밀을 비롯해 감자, 버섯, 산더덕 등 다양한 특산물이 판매된다. 실해 보이는 산더덕을 사갈까 한참 고민하게 된다. ‘메밀꽃 필 무렵’에서 주인공인 장돌뱅이 허생원이 아들일 것으로 추측되는 동이를 만난 것도 이 봉평 장터다. 메밀부침과 메밀전병 만드는 모습도 볼 수 있고, 자리 잡고 앉아 막걸리 한 사발 들이켜는 재미도 놓칠 수 없다. 특히 2021, 2023, 2026 대한민국 주류대상에서 수상한 ‘봉평메밀막걸리’(한스팜)는 꼭 한 번 맛보자. 같은 라인에 ‘평창감자막걸리’도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깔끔하고 목 넘김이 좋은 메밀막걸리에 한 표.
장으로 들어가는 마을 어귀 곳곳에서 ‘메밀꽃 필 무렵’의 장면을 묘사한 벽화나 당나귀 조각상 등을 만날 수 있어 이곳이 진정 이효석과 메밀꽃의 고장임을 실감할 수 있다. 규모가 크고 볼거리가 많은 건 아니지만, 메밀전에 막걸리 한 잔 걸친 뒤 음료 하나 사서 메밀꽃밭 잘 보이는 벤치에 앉아 메밀꽃 감상하며 평온한 가을날을 만끽하다 보면 세상이 아름답게 보일 거다. 옆에 연인(드라마 ‘도깨비’로 잘 알려진, 메밀꽃의 꽃말)이 없어도 괜찮다.
시간 여유가 넉넉하다면 저녁까지 머무르며 소설에서 유려하게 표현한 달빛 아래 흐드러진 메밀꽃을 감상하고 와도 되고, 아니면 먼저 평창군 오대산에 위치한 천년고찰 월정사를 둘러보고 난 후 봉평을 찾아도 좋겠다. 오전 일찍 우리나라 3대 전나무 숲길 중 하나로 꼽히는 월정사 전나무 숲길을 걷고 난 뒤 봉평에서 메밀골동면과 메밀전을 먹고 메밀꽃 감상으로 마무리하는 일정, 자연과 문학이 어우러진 감성 충만한 하루로 좋지 아니한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