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무수혈 치료’라고 하면 흔히 종교적인 이유로 수혈을 거부하는 환자를 위한 특수한 의료를 떠올린다. 저출생·고령화로 헌혈 가능 인구가 감소하면서 부족한 혈액을 아끼려는 방법이라는 인식도 있다.
하지만 의료계에서 말하는 환자혈액관리(PBM)는 단순히 수혈하지 않는 치료를 의미하지 않는다. 수술 전 빈혈을 교정하고 수술 과정에서 출혈을 최소화하는 한편, 수혈이 필요한 경우 환자의 상태와 예후를 고려해 적정하게 시행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순천향대학교 서울병원은 2000년 3월 무수혈 센터를 개소해 국내에서도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이러한 진료체계를 운영해왔다. 병원에 따르면 지금까지 수술은 6000회 이상 했고, 최소수혈·무수혈 관련 임상 경험과 연구 성과를 공유하는 심포지엄을 매년 개최하고 있다.
박선영 순천향대 서울병원 무수혈 및 환자혈액관리센터장(마취통증의학과 교수)은 비즈한국과의 인터뷰에서 “처음에는 의사들의 소모임으로 시작해서 무수혈센터를 열었고, 시작한 지 이미 20년이 넘었다”며 “환자혈액관리센터로 명칭을 바꾼 지 10년 정도 됐는데 거의 국내에서 처음으로 센터로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순천향대 서울병원은 PBM의 목적을 수혈량 자체를 줄이는 데 두기보다 빈혈을 교정하고 불필요한 수혈을 줄여 환자의 치료 결과를 개선하는 데 두고 있다.
박 센터장은 “혈액이 부족하다는 사회적 문제도 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의학적·학문적 근거와 환자의 예후”라며 “수혈이 단순히 부족한 피를 채워주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감염 및 합병증 발생, 장기적인 예후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출혈과 수혈을 적극적으로 줄이는 관리 체계가 시작됐다”고 말했다.
수혈 줄이는 것 넘어 환자 예후 관리…23만 명 분석서 합병증 20% 낮춰
PBM의 효과는 국제 연구에서도 보고된다. 2019년 국제학술지 ‘애널즈오브서저리(Annals of Surgery)’에 게재된 메타분석은 17개 연구의 수술환자 23만 5779명을 분석했다. 수술 전 빈혈 관리, 혈액 손실 최소화, 환자별 상태를 고려한 수혈 전략 등을 적용한 결과 PBM 도입 후 적혈구 수혈률은 39% 감소했다. 전체 합병증은 20%, 사망률은 11% 낮았고, 병원 재원기간은 평균 0.45일 짧았다.
수혈 기준도 달라지고 있다. 2023년 AABB(미국혈액은행협회) 국제 가이드라인은 성인 2만 599명이 참여한 45개 무작위대조시험을 검토해 혈역학적으로 안정적인 입원 성인은 혈색소(Hb)가 7g/dL 미만일 때 적혈구 수혈을 고려하는 제한적 전략을 권고했다. 심장수술 환자는 7.5g/dL, 정형외과 수술이나 기존 심혈관질환이 있는 환자는 8g/dL 수준을 선택할 수 있다.
박 센터장은 “과거에는 Hb 10g/dL 이하이면 무조건 수혈해야 한다는 가이드라인이 있었지만 대규모 임상 연구를 거치면서 기준이 낮아졌다”며 “다만 관상동맥질환이 있거나 급성 출혈이 진행 중인 고위험군 환자는 조금 더 높은 수치를 유지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즉 수혈 자체를 피하는 것이 목적은 아닌 셈이다. 환자에게 필요하면 수혈하되 혈색소 수치 하나만으로 결정하지 않고 환자의 상태와 출혈 여부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불필요한 수혈을 줄이는 방향으로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
수술 출혈부터 채혈까지 줄인다
순천향대 서울병원은 PBM을 특정 진료과의 수혈 판단에 국한하지 않고 수술 전·중·후 전 과정의 다학제 진료체계로 운영하고 있다. 병원 자료에는 응급의학과, 심장내과, 소화기내과, 산부인과, 흉부외과, 신경외과, 정형외과, 비뇨의학과, 마취통증의학과, 진단검사의학과 등 여러 진료과가 함께 참여하는 구조가 제시돼 있다.
수술기법의 발전도 PBM 확산에 영향을 미쳤다. 박 센터장은 “로봇수술이나 내시경 등 최소침습수술이 보편화되면서 수술 중 출혈량이 비약적으로 줄었다”며 “과거에는 암 수술이나 대형수술에서 체내 혈액의 10~20%가 빠져나가는 것이 흔했지만 지금은 100~200cc 이하의 출혈로 끝나는 수술이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순천향대 서울병원이 지난 19일 개최한 무수혈 수술 혁신 세미나에서는 각 진료과의 실제 사례도 소개됐다.
흉부외과에서는 심폐기를 사용하지 않고 심장이 뛰는 상태에서 시행하는 무정지 관상동맥우회술(OPCAB)을 통해 출혈과 수혈 가능성을 낮춘다. 신경외과에서는 0.7~1cm 크기의 구멍 두 개를 이용하는 양방향 내시경 척추수술(BESS)로 절개와 근육 손상, 출혈을 줄인다. 비뇨의학과에서는 고온의 수증기로 비대해진 전립선 조직을 축소하는 리줌(Rezum) 수술 등을 활용하고 있다.
채혈도 관리 대상이다. 혈색소를 확인하기 위해 반복 채혈하는 것 자체가 빈혈을 악화시키는 ‘의인성 빈혈’을 유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순천향대 서울병원은 손가락 센서로 혈색소 변화를 확인하는 비침습적 연속 혈색소 모니터링 장비를 수술실에서 운용하고 있다.

“전담인력·지혈제 등 정부 지원 필요”
정부도 의료기관의 적정수혈 상황을 모니터링하고 있다. 직접적인 경제적 보상이나 페널티는 아직 없지만 병원별 수혈 수준이 수치화되는 것 자체가 의료현장의 행동을 바꾸고 있다는 게 박 센터장의 설명이다. 박 센터장은 “직접적인 가산수가나 베네핏(혜택)은 아직 많지 않지만 정부 차원에서 모니터링하고 수치화한다는 것 자체만으로 의료진과 병원이 훨씬 적극적으로 관리하게 된다”고 말했다.
다만 PBM을 운영할 인력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정부의 지원이 아쉽다는 목소리를 냈다. 박 센터장은 “PBM을 제대로 운영하려면 의료진 및 원내 교육, 혈액 사용 전담 모니터링 인력이 필수적”이라며 “이 인력과 시스템을 유지할 수 있도록 수가 보전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출혈을 줄이기 위한 약제 접근성도 요구된다. 해외에서는 피브리노겐 농축제뿐 아니라 여러 혈액응고인자를 농축한 프로트롬빈복합체농축제(PCC) 등이 출혈이나 항응고제 효과의 긴급 역전 등에 활용된다. 필요한 응고인자를 농축해 투여해 신선동결혈장(FFP) 등 혈액제제 사용을 줄일 수 있는 선택지다.
반면 국내에서는 PCC와 같은 응고인자 농축제의 선택지가 제한적이다. 경보제약은 2022년 스위스 옥타파마로부터 4인자 PCC인 ‘옥타플렉스(Octaplex)’의 국내 판권을 확보했지만 아직 국내 허가를 준비하는 단계다. 미국에서는 동일 제품이 ‘발팍사(Balfaxar)’라는 이름으로, 유럽과 캐나다에서는 옥타플렉스로 이미 허가돼 사용 중이다.
박 센터장은 “피브리노겐이나 농축 지혈 복합제 등 출혈 시 피를 직접 주지 않고도 지혈을 도울 수 있는 약제가 필요한데 제약사 입장에서도 수익성이 낮아 수입이나 허가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지 않다 보니 해외에서는 널리 쓰이는 지혈 약제를 국내 임상 현장에서 쓰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며 “어쩔 수 없이 혈액제제인 혈장을 써야 하는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PBM은 무수혈 치료에서 출발했지만 이제는 특정 환자군에 한정된 치료 개념을 넘어 일반 환자의 빈혈과 출혈, 수혈 전 과정을 관리하는 진료체계로 확대되고 있다. 저출생·고령화로 혈액 수급 문제가 커질수록 혈액 공급 확대와 함께 불필요한 수혈을 줄이고 환자 상태에 맞게 혈액을 적정하게 사용하는 PBM의 중요성도 커질 전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