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바이오업계에 돈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정부는 신약 개발을 국가 전략산업으로 육성하기 위해 막대한 R&D(연구개발) 예산을 투입하고 있고, VC(벤처캐피털)를 비롯한 민간 자본도 유망 바이오기업에 대규모 투자한다. 최근에는 국민성장펀드 등 대형 정책금융까지 바이오 분야에 자금을 공급하고 있다.
그럼에도 후보물질을 발굴하거나 비임상·초기 임상 단계에 있는 바이오기업에서는 “돈이 없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임상 데이터나 글로벌 제약사와의 기술수출 같은 가시적인 성과를 내기 전에, 오히려 그 성과를 투자 조건으로 요구받고 있기 때문이다.
조헌제 한국신약개발연구조합 전무이사는 지난달 26일 열린 CPHI/HI Korea 2026 바이오헬스 정책포럼에서 “국가적으로는 바이오 분야에 돈이 넘친다고 하지만 정작 현장에서 쓸 수 있는 자금은 없다”며 “벤처 스타트업 영역으로 내려가면 지금 거의 고사 직전”이라고 토로했다.

VC 투자 절반은 후기 단계…초기는 20%에 그쳐
실제 자금의 흐름을 보면 초기기업이 체감하는 투자 한파는 더욱 선명하다.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에 따르면 2024년 기준 벤처기업 생애주기별 VC 투자액은 초기 단계 약 1조 원, 중기 1조 5000억 원, 후기 2조 9000억 원이었다.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초기 20%, 중기 30.3%, 후기 50.2%다. 전체 VC 투자금의 절반이 후기 기업으로 향한 반면 초기기업 몫은 5분의 1에 그쳤다.
초기 바이오 투자는 투자 호황기와 비교해도 크게 위축됐다. 국내 비상장 바이오·헬스케어기업의 시드 투자액은 2021년 439억 원에서 2024년 168억 원으로 약 62% 감소했고, 투자 건수도 같은 기간 103건에서 63건으로 줄었다.
시리즈A 투자 총액 역시 2021년 8632억 원에서 2024년 4012억 원으로 절반 이상 감소했다. 반면 2024년 시리즈B 투자 총액은 5158억 원이었다. 기업의 성장 단계에 따라 필요한 자금 규모가 다른 만큼 투자금액만 단순 비교할 수는 없지만, 자본의 무게중심이 기술과 사업성과가 구체화된 기업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정부 R&D도 후기 단계에 상대적으로 많은 자금이 투입되고 있다. 2024년 정부 R&D 투입액은 초기 단계 5조 6000억 원(27.6%), 중기 5조 1000억 원(25.9%), 후기 9조 3000억 원(46.5%)이었다.
손수정 STEPI 선임연구위원은 “정부의 R&D 생애주기와 민간 VC의 투자 생애주기 사이에는 성과가 실제 벤처기업과 민간자본으로 넘어가지 못하는 Gap Fund 사각지대가 존재한다”며 “실험실의 기술적 위험과 자본시장의 위험 회피가 중첩되면서 기술사업화의 핵심적인 전환 구간에서 자금 단절이 심화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승규 한국바이오협회 부회장도 지난 5월 문정바이오CEO포럼에서 “정부에서 아무리 많은 정책과 비전이 나오더라도 산업계가 피부로 느끼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며 “시리즈B 기업처럼 투자 공백에 직면한 곳들에 실질적인 자금이 공급될 수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논문·특허가 ‘투자 가능한 신약’ 되기까지
바이오에서 이런 자금 공백이 특히 크게 나타나는 이유는 연구실의 기술이 실제 투자 가능한 신약 자산으로 성장하기까지 긴 시간과 막대한 비용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연구실에서는 논문과 특허, 연구데이터를 통해 후보물질의 가능성을 확인한다. 하지만 시장에서 투자 가능한 자산으로 평가받으려면 명확한 적응증과 지식재산권(IP) 전략, 비임상·임상 데이터, 규제 및 시장진입 전략 등을 갖춰야 한다. 그 사이에는 중개연구와 비임상, 임상 1·2·3상이라는 긴 개발 과정이 놓여 있다.
손 위원은 “연구실의 과학적 발견이나 특허가 곧바로 투자 가능한 신약 자산이 되는 것은 아니며, 명확한 임상 데이터와 규제 전략을 갖추어 위험을 낮추는 과정이 핵심”이라고 설명했다.
후보물질의 효능과 독성을 검증하고 적응증을 정하는 것부터 제조공정 구축, 임상시험용 의약품 생산, 규제기관 제출자료 마련까지 각각 자금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 단계에서는 아직 사람에게서 효능이 확인되지 않은 만큼 성공 가능성을 장담하기 어렵다.
여기에 신약 개발에 필요한 시간과 자본의 시간이 서로 다르다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손 위원은 “기술이 성숙하는 시간과 자본이 기다릴 수 있는 시간, 규제가 기술을 이해하고 신뢰를 부여하는 시간, 시장이 채택하는 시간이 너무나 다르다”며 “특히 바이오 분야에서 그 차이가 매우 심하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STEPI는 기술 성숙, 자본 회수, 규제기관의 신뢰 형성, 시장 채택에 필요한 시간이 서로 어긋나는 것을 바이오 기술사업화의 주요 ‘시간 차이’로 지목했다.
기술이 시장에 나오기까지는 짧게는 10년, 길게는 수십 년이 필요하다. 유전자가위(CRISPR)는 첫 기전 발견부터 치료제 승인까지 30년 넘게 걸렸고, mRNA 백신 플랫폼도 기초연구가 실제 제품으로 이어지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반면 VC 등 민간 자본은 평균 7년 전후인 펀드 만기 안에 투자금을 회수해야 한다.
비용 부담도 만만치 않다. 손 위원은 “상위 20개 바이오제약사를 기준으로 임상비용과 실패 프로젝트 비용을 모두 합쳤을 때 하나의 자산이 디스커버리에서 출시까지 가는 데 약 26억 7000만 달러(3조 5714억 원)가 필요하다”며 “신약 하나가 시장에 출시되기까지 약 3조~4조 원 규모의 자원이 투입되는 셈”이라고 말했다.
“기술수출하면 투자” 사라진 중간 사다리
초중기 바이오기업이 투자 현장에서 마주하는 현실은 더욱 절박하다. 윤상순 싸이런테라퓨틱스 대표는 지난달 25일 CPHI/HI Korea 2026 콘퍼런스 패널토론에서 “원래 투자 단계상 시리즈A는 비임상이나 극초기 연구를 원활히 진행하기 위해 자금을 수혈받는 단계임에도 최근 국내 VC들은 글로벌 빅파마와 기술수출 계약 같은 가시적인 성과를 먼저 내야만 투자해주겠다는 앞뒤가 맞지 않는 요구를 한다”고 지적했다.
VC 입장에서도 바이오 투자는 쉽지 않다. 투자 이후 IPO나 기술수출 시기를 예측하기 어렵고 후속 투자 유치에 실패할 경우 기존 투자금까지 장기간 묶일 수 있다. 결국 불확실성이 큰 초기기업보다 회수 가능성이 가시화된 기업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바이오기업 대표 A 씨는 “현재 VC 자금의 상당 부분이 기술성평가를 통과했거나 기술이전 요건을 갖추는 등 성과가 눈에 보이는 프리IPO와 상장 임박 단계에 집중되고 있다”며 “초중기 기업은 투자금을 회수하기 어렵다 보니 FI(재무적 투자자) 투자가 사실상 끊긴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그는 “FI가 들어오지 않으니 바이오벤처들은 제약사 등 SI(전략적 투자자)를 유치하는 데 집중할 수밖에 없다”며 “하지만 제약업계도 약가 인하 등 경영 불확실성이 커 적극적인 투자를 기대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문제는 기업이 프리IPO 단계까지 올라가기 위해서도 그 전에 대규모 자금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A 씨는 “상장 요건이나 기술이전 실적을 갖춘 프리IPO 단계로 넘어가려고 해도 그전에 수백억 원의 개발비가 투입돼야 하는데 지금은 그 중간 과정을 메워줄 후속투자 사다리가 사실상 끊겼다”고 말했다.
투자자가 검증된 기업을 선호하는 것은 합리적인 선택이다. 하지만 모든 투자자가 성과가 확인된 기업으로 이동할 경우 정작 그 성과를 만들어낼 단계까지 기업을 끌어올릴 자본이 사라지는 문제가 발생한다.

수천억 정책자금도 성과 보이는 기업으로
민간 투자와 별개로 정부가 대규모 정책금융 공급에 나섰지만 이 역시 일정 수준 이상 개발성과를 확보한 기업으로 쏠리고 있다.
국민성장펀드는 지난 5월 폐렴구균 백신 글로벌 임상 3상을 진행 중인 SK바이오사이언스에 3000억 원 규모의 대출을 승인했다. 지난 6월에는 다수의 글로벌 기술이전 실적을 보유한 리가켐바이오사이언스의 5000억 원 규모 자금조달에 참여했다. 마이크로바이옴 기업 HEM파마 역시 국민성장펀드 등이 참여한 540억 원 규모 투자 유치에 성공했다.
리가켐바이오는 이미 다수의 기술이전과 글로벌 임상을 진행하고 있으며, HEM파마도 코스닥 상장 이후 분석서비스와 건강기능식품 사업에서 매출을 내고 생산시설을 확장하는 단계에 있다.
국민성장펀드는 초기 바이오만을 지원하기 위해 만들어진 정책금융은 아니다. 국가전략산업의 대형 프로젝트와 성장기업에 대규모 자금을 공급하는 것이 주요 역할인 만큼 후기·성장 단계 기업에 자금을 공급하는 것 자체를 문제라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현재까지 공개된 대표적인 바이오 지원 사례가 글로벌 임상 3상, 대규모 기술수출, 상장과 사업화 등 일정 수준 이상의 성과를 확보한 기업이라는 점은 초중기 바이오기업이 체감하는 자금 상황과 대비된다.
A 씨는 “국민성장펀드나 바이오백신펀드 등 대규모 정책자금이 만들어졌지만 이미 자금조달 능력이 있거나 성과가 가시화된 기업에 자금이 공급되는 모습을 보면서 초중기 바이오벤처가 체감하는 혜택은 많지 않다”며 “정책자금은 일반적인 시장 논리만으로 자금이 잘 흐르지 않는 고위험 혁신기술의 공백을 보완하는 역할도 해야 하지만 현장에서는 그런 기능을 충분히 체감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정부가 초기 신약개발을 지원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국가신약개발사업에는 후보·비임상 단계에서 임상으로 넘어갈 물질을 발굴하는 사업부터 임상 1·2상, 기술사업화와 제조·생산 단계까지 지원 프로그램이 마련돼 있다.
다만 R&D 지원금과 기업의 성장자금은 역할이 다르다. 정부 연구과제는 정해진 연구목표에 맞춰 사용하는 자금인 반면 기업은 인건비와 특허 유지, 임상 준비, 생산, 사업개발, 해외 파트너링 등 연구 외 영역에서도 계속 자금이 필요하다.
정부 R&D로 탄생한 기술이 민간 투자자가 받아들일 만큼 충분히 검증될 때까지 기업이 버텨야 하는 중간 구간이 존재하는 것이다. 높은 실패 위험과 정보 비대칭 때문에 일반 투자자의 기술평가가 어렵고, 제약사나 전문 CVC가 먼저 투자한 뒤에야 후속 VC와 기관투자가 따라오는 바이오산업의 특성도 이 같은 공백을 키운다.

“열매만 거두고 씨앗은 안 뿌린다”
초중기 투자 공백이 우려가 되는 것은 단지 몇몇 바이오벤처의 생존 문제로 끝나는 게 아니라 신약 개발 생태계 근간이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초기에는 수많은 기업과 후보물질이 존재하지만 비임상과 임상 1·2·3상을 거치는 과정에서 대부분이 탈락한다. 소수의 신약이 최종적으로 시장에 도달하려면 그 아래에 훨씬 많은 초기 후보물질이 존재해야 한다.
윤 대표는 “신약 개발 생태계라는 거대한 피라미드가 유지되려면 가장 밑바닥에서 묵묵히 후보물질을 발굴하고 헌신하는 초기 스타트업들이 반드시 살아남아야 한다”며 “모든 바이오벤처가 당장 눈앞의 빅딜을 터뜨리는 톱티어일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
A 씨도 현재 상황을 ‘과거에 심어놓은 열매만 거두는 것’에 빗댔다. 그는 “결국 미래를 위한 씨앗은 안 뿌리고 과거에 심어놓았거나 이미 열매를 맺고 있는 것만 거두어들이면서 모내기조차 하지 않는 실정”이라며 “신약 개발도 피라미드 구조처럼 밑바탕에 초중기 기업과 파이프라인이 많이 깔려 있어야 위로 올라갈 성과가 나온다”고 말했다. 이어 “지금처럼 씨를 뿌리지 않으면 3~5년 뒤에는 위로 올라갈 기업과 파이프라인 자체가 고갈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초기 바이오기업이라고 해서 모두 살아남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기술적 가능성이 떨어지는 후보물질이 연구와 임상을 거치며 탈락하는 것은 신약 개발 과정의 일부다. 하지만 충분한 검증 끝에 기술이 실패하는 것과, 검증할 자금조차 구하지 못해 연구가 중단되는 것은 다른 문제다.
현재는 과거 투자 호황기에 자금을 확보한 기업들이 임상에 진입하고 기술수출 성과를 내면서 국내 바이오 파이프라인이 계속 이어지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아래에서 새로운 후보물질과 기업이 충분히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몇 년 뒤 후기 임상과 글로벌 기술수출에 도전할 기업 역시 줄어들 수밖에 없다.
정부 R&D도 있고 민간 VC 자금도 있으며 국민성장펀드 같은 대규모 정책금융도 있다. 그럼에도 산업계에서 ‘현장에서 쓸 돈이 없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결국 자금의 절대 규모보다 어느 단계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위험을 감수하는 자금이 공급되느냐가 중요하다.
연구실에서 탄생한 기술이 임상 데이터와 글로벌 계약을 갖춘 투자 가능한 자산으로 성장하기까지 가장 불확실한 구간을 버틸 자본이 사라진다면, 지금 바이오산업이 거두는 열매 뒤에서 몇 년 뒤 수확할 혁신의 씨앗부터 말라갈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