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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명 숨졌는데 10초 만에 기각 선고”
아리셀 대법 판결, 유족은 오열했다

1심 징역 15년서 대폭 감형된 2심 4년 판결 확정…유족 측 변호인 “보상했다고 감형해주면 법 무용지물”

[비즈한국] 근로자 23명이 숨져 최악의 산업재해 참사로 기록된 화성 아리셀 공장 중대재해 사고에 대해 대법원이 경영진과 법인, 검사의 상고를 모두 기각하고 원심 형량을 그대로 확정했다.

대법원 1부(주심 천대엽 대법관)는 20일 중대재해처벌등에관한법률(중대재해처벌법) 위반 등의 혐의로 기소된 사업총괄책임자 박순관 아리셀 대표이사에게 징역 4년을 선고한 2심 판결을 확정했다. 함께 재판에 넘겨진 안전보건관리책임자인 아들 박중원 아리셀 총괄본부장에게는 징역 7년과 벌금 100만 원, 주식회사 아리셀 법인에는 벌금 8억 원이 각각 확정됐다. 이로써 1심과 2심에서 다툰 주요 피고인들의 형량이 매듭지어졌다.

이날 재판부는 별다른 이유를 설명하지 않고 10초도 안 돼 기각 주문을 낭독하고 퇴정했다. 방청석을 지키던 유가족들은 오열했다. 시민단체는 “23명의 목숨을 10초 만에 선고하고 도망친 판결”이라며 사법부를 강도 높게 규탄했다.

아리셀 참사로 사망한 고 엄정정 씨의 어머니 이순희 씨(앞줄 가운데)가 10월 20일 선고를 마친 후 대법원 법정을 나오고서 울분을 터뜨렸다. 사진=김민호 기자

법정 안팎 뒤덮은 통곡과 탄식

선고 절차가 진행된 대법정 안팎은 순식간에 통곡과 탄식으로 뒤덮였다. 재판부가 사건의 사회적 파장이나 법리적 판단에 대한 상세한 구두 설명 없이 10초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에 상고 기각 주문만을 읽고 퇴정하자, 2년 넘게 법정을 지켜온 유가족들은 깊은 허탈감과 분노를 쏟아냈다.

참사 희생자 고 엄정정의 어머니 이순희 씨는 “어떻게 대한민국 법이 이것밖에 안 되나? 23명이 죽었다. 외국인이라고 이렇게 차별할 수가 있나”며 “중국에 있는 가족들한테 어떻게 말하면 될지 모르겠다”고 울분을 표했다. 고 이해옥의 사촌언니 여국화 씨는 “솔직히 오늘 마음을 비우고 왔지만 너무 성의 없이 기각이 됐다. 그 순간에 너무 화가 나서 욕밖에 안 나왔다”며 “23개의 별이 된 돌아가신 가족들한테 미안하고, 우리가 여기까지밖에 할 수 없어서 미안하고, 중대재해처벌법을 만들려고 애써주신 우리 산재 피해 가족들한테도 미안하다”고 말했다.

특히 유가족들이 체결한 배상 합의가 법정에서 기업 경영진의 형량을 깎아주는 감형 사유로 작동한 점에 대해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나왔다. 유족 측 법률대리인인 신하나 변호사는 “합의를 이유로 감형해주면, 억울함을 머금고 생계 등의 이유로 어쩔 수 없이 합의한 유족들은 죄책감에 시달리게 된다”며 “또 진짜 피해자는 사망한 사람인데 사망한 사람의 피해를 어떻게 보상할 수 있나? 사측의 진정한 반성과 용서도 없었고 2차 가해까지 지속적으로 발생했는데, 단지 합의서에 사인했다는 이유만으로 파격적인 감형을 해주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반발했다.

경영책임자 법리 첫 정리와 ‘비상구 무죄’ 논란

이번 판결은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이후 사업장의 안전보건관리체계와 경영책임자의 법적 책임을 판단한 중요 선례로서의 성격을 띤다. 대법원은 박순관 대표이사가 회사의 사업을 대표하고 총괄하는 권한과 책임을 가진 자로서, 중대재해처벌법상 단독 의무 및 책임의 주체인 ‘경영책임자등’에 해당한다고 판단한 원심 법리를 확정했다.

또한 위험물질을 다루는 작업장에서 급박한 위험에 대비한 안전 매뉴얼을 갖추지 않고 안전보건관리체계를 제대로 구축·이행하지 않은 경영책임자의 부작위가 23명의 대규모 사망으로 이어진 중대재해와 상당인과관계가 성립한다고 본 원심의 법리 판단을 수긍했다.

그러나 유족과 시민사회가 끊임없이 지적해온 무죄 판단 부분 역시 그대로 받아들여 적지 않은 논란을 남겼다. 검찰은 사고 당시 공장 2층 작업장의 비상구 설치 및 비상통로가 유지되지 않은 사안을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혐의로 기소했으나, 법원은 안전보건규칙상 비상구 규정이 명확하지 않고 죄형법정주의 원칙상 피고인에게 불리하게 확장 해석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원심의 무죄 판단을 인정했다.

아리셀 산재 피해 가족협의회와 아리셀 중대재해참사 대책위원회가 10월 20일 대법원 선고 후 대법원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김민호 기자

아리셀 중대재해참사 대책위원회와 유족 측 법률대리인단은 대법원 선고 직후 기자회견을 열고 이번 판결이 산업 현장의 안전 규범을 치명적으로 후퇴시켰다고 강력히 비판했다. 송성영 대책위 공동대표는 “오늘 대법원의 판결은 고인들을 두 번 죽이고 유가족을 또다시 고통속으로 몰아넣는 악마의 판결이다”며 “노동자의 생명은 기업의 이익과 거래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기에 안전은 선택 사항이 아니라 기업의 의무다. 사고가 발생한 뒤 보상하면 책임을 줄일 수 있다는 인식이 생기면 중대재해처벌법의 예방적 기능을 무용지물로 만든다”고 지적했다.

신하나 변호사는 대법원이 상식적인 안전 원칙을 배제했다고 성토했다. 신 변호사는 “불이 나면 특히 위험한 물질을 다루는 작업장과 건축물에서 언제든지 피난할 수 있는 비상구와 비상통로가 있어야 하는 것은 상식적인 일이다”며 “주심인 천대엽 대법관은 2020년 ‘삼성 거제중공업 크레인 사건에서 ’산업안전보건법을 사업장 상황과 목적에 맞게 규범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판결을 직접 내렸던 주인공이다. 6년간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라고 되물었다.

대책위와 변호인단은 대법원이 법정에서 구체적인 판결 이유조차 설명하지 않은 만큼, 송달될 판결문 전문을 면밀히 분석해 후속 법적 조치에 착수하겠다고 밝혔다. 변호인단은 판결문 검토 결과 대법원의 판단에 중대한 사실오인이나 헌법상 기본권을 침해한 법리 왜곡이 명백히 드러날 경우, 헌법재판소에 ’재판소원‘을 정식으로 제기해 사법부 판결의 위헌성을 끝까지 따져 묻겠다는 입장을 내놨다.

김민호 기자

중화학공업·에너지 분야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지속가능한 사회와 삶에 관심이 많습니다.

goldmino@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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