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AI 얘기를 꺼내기 전까지는 투자자들이 끝까지 듣지 않는다.” 최근 유럽 스타트업 창업자들 사이에서 공공연하게 도는 말이다.
추이를 살펴보면 과장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유럽 테크 전문 매체 tech.eu에 따르면 2026년 상반기 유럽 스타트업 시장에 흘러든 자금은 총 441억 유로(약 72조 원)로 전년 같은 기간보다 31%나 늘었다. 그런데 투자를 받은 스타트업 수는 1740곳으로 6년 만에 가장 적었다. 더 많은 돈이, 더 좁은 문을 통해, 더 적은 곳으로 흘러든 것이다. 그 출구의 이름이 바로 AI다.

AI가 60% “쏠림 심화”
스타트업·VC 투자 데이터 분석 업체 피치북(PitchBook)이 지난달 발행한 ‘2026년 2분기 유럽 벤처 보고서’는 이 쏠림을 수치로 보여준다. 올해 상반기 유럽 VC 투자금의 60.2%가 AI 관련 기업으로 흘러들어갔다. 2025년 37.8%에서 불과 1년 만에 22%포인트 이상 뛴 수치다.
2분기 최대 딜들도 이 쏠림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구글 딥마인드에서 분사한 영국 신약 개발 AI 스타트업 아이소모픽 랩스(Isomorphic Labs)가 17억 8870만 유로(약 2조 9000억 원)를 조달했다. 자율주행 AI 기업 웨이브(Wayve)는 10억 8730만 유로(약 1조 7700억 원)를 유치했다. 강화학습 기반 AI 스타트업 이네파블 인텔리전스(Ineffable Intelligence)는 시드 라운드에서만 9억 4310만 유로(약 1조 5300억 원)를 모았다. 이 회사는 알파고를 탄생시킨 딥마인드 출신 데이비드 실버가 창업했는데, 인간이 만든 데이터 없이 스스로 학습하는 AI를 개발 중이다. 창업 초기 기업이 시드 단계에서 1조 원을 넘게 유치한 사례는 흔치 않다.

AI 외에 클린테크(청정에너지·녹색산업) 분야도 주목할 만하다. 상반기 클린테크는 74억 유로(약 12조 원)로 세 번째로 큰 섹터였고, 전년 동기 대비 59.1% 성장했다.
주목할 점은 금액보다 건수다. AI 딜이 전체 투자 건수의 약 40%를 차지할 만큼 AI 스타트업 숫자 자체가 늘었다는 것이 피치북의 분석이다. 돈뿐 아니라 생태계 저변이 AI로 이동하고 있다는 신호다.
말라가는 초기 시드 투자
돈이 몰리는 곳이 있으면 마르는 곳도 있다. 올해 1분기 유럽의 시드 단계 투자 건수는 전년 같은 기간 대비 44% 줄었다. 전체 딜 건수는 6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시드는 창업 초기 스타트업이 처음으로 외부 자금을 받는 단계다. 이 관문이 절반 가까이 좁아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시기에 앞서 언급한 이네파블 인텔리전스는 시드 라운드 한 번으로 1조 원을 넘겼다. 소수 기업이 역대급 대형 라운드를 독점하고, 나머지 창업자들은 투자자를 만나는 문턱조차 높아졌다는 뜻이다.

구조적인 이유도 있다. 유럽 VC 펀드의 평균 규모가 5000만 유로에서 6000만 유로로 커지면서 수백만 유로짜리 소액 초기 투자에 드는 심사 비용이 상대적으로 부담스러워졌다. 펀드가 클수록 소액보다 대형 라운드에 집중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지금의 파이프라인 공백이 2027~2028년 성장 단계 투자 가뭄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유럽선 영국 독주, 미국도 유럽 AI 베팅
지리적 쏠림도 심화됐다. 영국은 상반기 유럽 전체 투자액의 42%인 187억 유로(약 30조 5000억 원)를 홀로 끌어들였다. 독일(63억 유로), 프랑스(60억 유로)의 3배에 달한다. 브렉시트 이후 투자가 위축될 것이라는 전망과 달리 영국은 미국 자본과의 연결고리를 살려 AI 랠리의 최대 수혜지가 됐다. 앞서 언급한 아이소모픽 랩스, 웨이브, 이네파블 인텔리전스 모두 런던이 본거지다.
‘제조강국’ 독일과 ‘AI 주권’을 앞세우는 프랑스는 영국과의 격차를 좁히지 못하고 있다. 미스트랄 AI를 앞세워 유럽형 AI 독립을 선언한 프랑스도, 정부가 스타트업 육성 펀드를 25억 유로(약 4조 원)로 두 배 늘린 독일도, 민간 자금이 영국으로 흘러가는 흐름에는 어쩔 도리가 없다.

흥미로운 것은 자금의 출처다. 유럽 VC 딜에 참여한 미국 투자자 수가 영국 투자자 수와 같아졌다. 각각 약 1600명 수준이다. 실리콘밸리 자본이 대서양을 건너 유럽 AI 생태계에 직접 베팅하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 투자자 입장에서 유럽 AI 스타트업의 가격은 매력적이다. 피치북 데이터에 따르면 유럽 AI 스타트업의 평균 몸값(투자 전 기업가치 중간값)은 830만 유로(약 135억 원)에 그친다. 같은 기준으로 미국 AI 스타트업은 6420만 유로(약 1047억 원)다. 같은 돈으로 미국보다 유럽에서 지분을 훨씬 많이 살 수 있다는 뜻이다.
“AI 네이티브 아니면 펀딩 없다”
투자자들이 요구하는 AI는 단순히 AI 기능을 붙인 제품이 아니다. ‘태생부터 AI로 설계된 기업’이어야 한다. 업계에서는 이를 ‘AI 네이티브(native)’라고 부른다.
기존 소프트웨어나 서비스 기업들이 AI 기능을 추가해 피칭에 나서도 투자자 반응이 예전 같지 않다는 목소리가 현장에서 나온다. 반면 AI를 중심으로 비즈니스 모델 자체를 재설계한 기업들은 라운드 규모가 커지고 있다. 시드에서 1조 원 이상을 조달한 이네파블 인텔리전스가 극단적 사례다.
투자자들의 심사 기준도 달라졌다. 예전엔 “AI를 어떻게 활용하느냐”를 물었다면, 이제는 “AI 없이 이 사업이 존재할 수 있느냐”를 묻는다. 기존 서비스에 AI 기능을 얹은 회사보다, AI 자체가 사업 뼈대인 회사를 원한다는 뜻이다. 경쟁자가 쉽게 따라할 수 없는 독자적인 AI 기술이나 데이터 자산이 있는지가 핵심 체크포인트가 됐다. 기준이 높아졌다는 것은 진입장벽도 높아졌다는 뜻이다.
피치북은 유럽의 AI 투자 비중(60.2%)이 미국(87.7%)에 비해 아직 낮다는 점을 오히려 기회로 읽는다. 미국은 VC 투자금의 거의 전부가 AI로 몰리는 포화 상태에 가깝지만, 유럽은 아직 그 수준까지 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직 성장 여지가 있다는 해석이다.
한국도 AI 쏠림
한국도 이런 현상이 낯설지 않다. 스타트업 데이터 플랫폼 더브이씨(THE VC)에 따르면 2026년 1분기 국내 스타트업 투자 유치액은 2조 1800억 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55.4% 증가했다. 그런데 투자 건수는 17.4% 줄었다. 총액은 늘고 건수는 줄어든 유럽과 같은 패턴이다.

AI 쏠림 현상도 유사하다. 국내에서도 AI 관련 스타트업이 전체 투자금의 45% 이상을 받는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 시드와 시리즈 A를 합친 초기 투자 비중은 전체의 21.5%에 그쳤다. 초기 창업자에게 돌아가는 몫이 급격히 줄어드는 것은 한국도 마찬가지다.
정부 정책 기조도 이 방향을 뒷받침하고 있다. 정부는 AI 스타트업 육성을 핵심 과제로 제시하며 AI 특화 펀드 조성과 AI 스케일업 지원 프로그램을 확대하고 있다. 민간 VC들도 AI 섹터 집중 펀드를 잇따라 결성했다.
AI 쏠림은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투자 생태계의 구조 재편에 가깝다. AI를 핵심에 두지 않은 스타트업에게 이 시장은 갈수록 좁아지고 있다. 유럽과 한국 모두 같은 흐름 앞에 서 있다.
필자 이정우는 17년간 언론사 기자로 자동차, 2차전지, 중공업 등 주요 산업을 비롯해 국방, 외교, 환경, 교육, 보건복지 등 다양한 분야를 두루 담당했다. 특히 모빌리티 및 에너지 전환과 지속가능성 중심의 산업 구조 변화를 현장에서 취재했다. 현재 독일 베를린에 거주하며 스타트업 액셀러레이터 ‘123팩토리’의 파트너로 활동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