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대중문화 콘텐츠가 역사를 다루는 방식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시대의 거대한 구조와 흐름, 큰 인물에 초점을 맞추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그 시대를 묵묵히 버티고 살아낸 갑남을녀, 필부필부를 조망하는 것이다. 앞엣것을 거시적, 숲을 보는 방식이라고 한다면, 뒤엣것은 미시적, 나무를 보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손에는 경박단소의 스마트폰을 들어도, 눈으로는 영웅과 위인이 등장하는 중후장대한 서사를 좇는 것이 오래된 통속이지만 운종가의 큰길이나 구중궁궐보다는 피맛길, 여염의 민가에 눈길을 주고 보듬어 그리는 이들도 있다.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장삼이사의 삶을 깊숙이 들여다보며 ‘정가네 소사’, ‘목호의 난: 1374 제주’, ‘의병장 희순’, ‘1592 진주성’ 등을 그려낸 정용연 작가를 경기도 부천의 뼈해장국 집에서 만났다.

홋카이도 산해진미보다 뼈해장국
부천시 원미구청 앞 골목에는 뼈해장국으로 호가 난 두 가게의 본점이 마주해 있다. 원래 한 집이 더 있어서 삼국지를 써 내려가다가 두 집이 남아 초한지가 되었다. 마침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작가 작업실에 입주한 정용연 작가가 뼈해장국을 소울푸드로 꼽길래 뼈다귀 전쟁이 이어지는 그 골목으로 향했다.
어린 시절, 소 잡는 살풍경을 목격한 뒤로 소고기를 멀리하는 작가가 외식할 때면 으레 찾는 것이 뼈해장국이다. 동료를 만날 때도, 집 근처 사패산을 오를 때도 뼈해장국을 먹는다. 얼마 전에는 동료 만화가인 김경호 작가(‘귀신장군 무동이’, ‘번데기즈’)와 서울 둘레길을 한참 돌다가 들른 사당역 뼈해장국집에서 인생 뼈해장국을 만났다고 하고, 작년에는 일본 홋카이도 여행길에서 산해진미를 눈앞에 두고도 뼈해장국이 너무 간절했다고 한다. 뼈해장국 먹으러 와서, 뼈해장국 앞에 두고, 뼈해장국 먹은 이야기, 그리웠던 이야기를 한참이나 했다.
이쯤 되면 날 때부터 뼈해장국을 먹었을 것 같지만, 정용연 작가가 뼈해장국을 처음 접한 것은 성인이 되어서 친구들과 어울릴 때였다. 뼈해장국과 술을 두고 친구들과 마주 앉으면 그리 좋을 수 없었다고 한다. 우정이 담긴 음식에 애정이 어린다.
소반 위에 차린 서사
정용연 작가에게 음식은 정이 담긴 매개체다. ‘정가네 소사’의 오디, 조기가 그렇고, ‘목호의 난: 1374 제주’의 빙떡, 단편 ‘봄’의 진달래 화전이 그렇다. 그것들에는 한여름의 우정과 연정, 이웃과 아버지에 대한 기억, 떠나보내는 정인에 대한 연모, 애틋함이 담겨 있다. 작가의 작품은 음식을 본격적으로 다루는 만화가 아니지만, 음식을 인간의 원초적인 삶과 감정이 담긴 요소로서 주요하게 다룬다. 그의 작품에서 음식과 그것을 먹는 행위는 등장인물의 서사와 관계성을 드러내는 핵심적인 장치다.
그러다 보니 음식 그릇을 이고 있는 상도, 상을 담은 공간도 꼼꼼하게 그릴 수밖에 없다. 2023년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의 다양성 만화 제작 지원사업에 선정된 작품 ‘약현’에서는 조선시대 배경으로 겸상하여 밥 먹는 장면을 그렸다가 고증 오류를 깨닫고 스스로 상을 물려 독상으로 다시 그려 넣었다. 인터뷰할 때 작가는 그때 보고 그린 상이 이것이라며 오래된 해주반 하나를 들고 왔더랬다. 황해도 해주에서 만들어졌다는 이 소반은 ‘1592 진주성’, 단편 ‘형수’의 식사 장면에도 등장한다.


작가가 일삼아 취미 삼아 하나둘 모으기 시작한 소반이 어느덧 7개가 됐다. 해주반, 나주반, 호족반, 개다리소반, 통영반, 강원도반 등 지역마다 특색을 달리하는 소반들을 보면 저마다의 고유한 조형미를 느낄 수 있다고 한다. 늘 고증과의 전쟁을 벌여야 하는 역사물을 그리다 보니 실수도 있었지만, 그 실수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디테일을 한층 더 챙겨 나가는 꼼꼼함을 갖추게 되었다.
작가는 언제가 될지 아직 모르지만, 기회가 주어진다면 자신이 모은 소반과 집기들, 각각의 수집 일화를 갈무리해 전시해보고 싶다고 했다. 작가가 차린 소반 위의 서사들이 얼마나 다정할지 알기에 그 전시의 기획을 꼭 맡겨달라고 말했다.
이름 없는 사람들의 미시사를 그린다
일찍이 1991년 주간만화에 ‘하데스의 밤’을 발표하며 작가로 데뷔했지만, 정용연 이름 석자를 만화계에 크게 알린 것은 2012년 ‘정가네 소사’를 출간하면서부터다. 이후 우리만화연대 만화 무크지 ‘보고(BOGO)’에 실은 ‘목호’(이후 ‘목호의 난: 1374 제주’로 출간), ‘의병장 희순’, ‘1592 진주성’ 등의 단행본과 ‘용서인’ ‘괴력난신’ ‘청파역’ 등의 중단편을 꾸준히 발표하며 역사 소재 만화를 그렸다.
작가는 넉넉지 못한 집안에서 태어나, 대학에 바로 진학하지 못하고, 데뷔 이후에도 공장과 건설 현장, 영업을 비롯한 여러 일을 하며 살아온 자기 경험이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 주목하게 했다고 말한다.

‘정가네 소사’에 담긴 작가의 자전적인 가족사, ‘작은 역사’가 근현대사의 거대한 톱니바퀴와 맞닿아있다면, ‘목호의 난: 1374 제주’에서는 원 간섭기 당시 학살당한 제주 사람들의 이야기가 돌고 도는 해류를 따라 4·3, 강정마을로 이어진다. 작가는 임진왜란 때 호남 곡창으로 향하는 길목을 지켜낸 충무공 김시민과 진주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 ‘1592 진주성’의 후기에 “모두가 주인공”이라는 말을 남겼다. 작가는 뼈대 있는 이들은 아니지만, 역사의 뼈대를 나눠 짊어진 이들, 이름이 남지 않은 무명씨와 무명소졸, 역사의 진정한 주인들을 그렸다. 거대 서사와 담론이 옹졸하게 지워버린 우리네 이야기들 말이다.
커다란 전투 장면도 스케치업이나 AI 도움 없이 스푼펜으로 잉크를 찍어 하나하나 그려내는 작가의 작업에서 항우장사 같은 영웅의 활약은 찾아보기 어렵다. ‘목호의 난: 1374 제주’의 새별오름 전투 장면이나 범섬 포위 장면, ‘1592 진주성’의 전투 장면들은 압도적이지만, 그 장면들을 이끌어가는 힘은 최영과 김시민에서 나오지 않는다. 모두가 하나뿐인 목숨을 걸고 싸우는 전쟁에서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굳센 한 걸음이 성패를 가른다.

정용연 작가는 현재 지원사업 작업과 공모전 출품, 미완성 원고의 완결을 병행하고 있다. 아직 세상에 내보일 기회를 기다리는 작품이 다섯 권 분량은 된다고 하는데, 이 작품들을 완결 짓는 것이 현재의 목표라고 한다. 작가는 작가로서 버텨내고 있다고 말했지만, 먼 산의 기화요초가 아닌 지금 여기의 우리 이야기를 그리는 작가의 작업을 기다리는 독자들이 많다. 그의 스푼펜이 오래도록 바쁘길 기대한다.
점심에 만나 저녁참까지 이야기 나눈 작가와의 인터뷰를 복기하다가 작가가 존경하는 단원 김홍도의 작품 ‘점심’을 찾아보았다. ‘단원풍속도첩’에 수록된 이 그림을 보면 고된 노동을 마치고 보리밥과 막걸리를 먹고 마시는 남자들과 그 옆에서 아이에게 젖먹이는 엄마에 이르기까지 이름 없는 민초들이 저마다의 모습으로 점심을 먹고 있다. 시선에는 의도가 담긴다. 단원이 땅을 일구고, 아이를 기르고, 함께 밥과 술을 나누는 이름 모를 이들의 흔하디흔한 풍경을 응시한 까닭을 정용연 작가를 만난 점심이 알려주었다.
만화는 상업적 재미가 강한 작품보다 문학적이고 절제된 그림과 이야기를 좋아한다. 좋아하는 만화가로는 ‘고독한 미식가’를 그린 다니구치 지로와 ‘나사식’의 츠게 요시하루를 꼽는다. 일본의 옛 극화나 예술만화에도 관심이 많다. 가장 존경하는 작가로는 다니구치 지로를 꼽는데, 만화 기술이 뛰어나서만이 아니라 평생 자기만의 세계를 묵묵히 이어간 태도를 높이 평가한다. ‘카무이전’의 시라토 산페이, ‘아키라’의 오토모 가츠히로도 무척 좋아한다고 한다. “그런 사람들의 활동에 비하면 발끝에도 못 미치고 살아 있지만 여전히 만화는 그리고 있습니다.” 정용연 작가가 던지는 겸양의 말속에 꾸준함에 대한 동경이 묻어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