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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스타트업열전
독일 대기업 SAP, ‘18개월’ 신생 스타트업 인수한 까닭

표 형식 데이터용 AI 개발하는 ‘프라이어 랩스’에 투자…스타트업과 대기업의 ‘타이밍’ 주목

[비즈한국] 독일 소프트웨어 기업 SAP가 지난 7월 17일 독일 인공지능 스타트업 프라이어 랩스(Prior Labs) 인수를 완료했다. 2024년 말 설립된 회사가 약 18개월 만에 유럽 최대 소프트웨어 기업의 품에 안긴 것이다.

거래 금액은 공개되지 않았다. 다만 SAP는 향후 4년간 프라이어 랩스에 10억 유로(1조 6700억 원) 이상을 투자해 기업의 정형 데이터를 연구하는 세계적인 인공지능 연구소로 성장시키겠다고 밝혔다. 프라이어 랩스는 SAP에 편입된 뒤에도 기존 브랜드와 연구조직, 고객관계, 프라이부르크 본사와 베를린·뉴욕 사무소를 유지한다. 연구 결과와 인공지능 모델을 공개하는 오픈소스 전략도 계속 이어갈 계획이다.

독일 소프트웨어 기업 SAP가 인공지능 스타트업 프라이어 랩스(Prior Labs)를 인수했다. 사진=엑스

설립 18개월 만에 인수됐다고 하면 아이디어 하나로 단숨에 성공한 회사처럼 보인다. 하지만 프라이어 랩스의 시간을 법인 설립일부터 계산해서는 이 회사를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

회사의 시작보다 빨랐던 기술의 시작

프라이어 랩스의 핵심 기술은 ‘탭PFN(TabPFN)’이라는 표 형식 데이터용 인공지능 모델이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엑셀 파일이나 기업의 고객·회계·생산·재고 데이터처럼 행과 열로 구성된 정보를 분석하는 기술이다.

현재 인공지능 시장의 관심은 문장이나 이미지, 영상을 생성하는 거대언어모델에 집중돼 있다. 그러나 기업이 실제로 운영되는 기반에는 여전히 표와 숫자가 있다. 어떤 고객이 서비스를 해지할지, 어느 거래처의 결제가 늦어질지, 제품 수요가 얼마나 발생할지, 공급업체에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있는지 등을 예측하려면 기업이 쌓은 정형 데이터를 분석해야 한다.

기존에는 새로운 데이터가 들어올 때마다 데이터 전문가가 별도의 머신러닝 모델을 선택하고 학습시키는 과정이 필요했다. 탭PFN은 수많은 합성 데이터로 미리 훈련된 하나의 모델을 이용해 새로운 데이터에서도 곧바로 예측을 수행하는 방식을 택했다.

설립 18개월 만에 글로벌 소프트웨어 기업 SAP에 인수된 프라이어 랩스. 표 형식 데이터용 인공지능 모델 ‘탭PFN(TabPFN)’을 개발, 운용한다. 사진=priorlabs.ai

이 기술의 출발점은 2022년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교 연구팀이 발표한 논문이었다. 이후 개선된 탭PFN 연구 결과는 2025년 과학저널 네이처(Nature)에 게재됐다. 연구진은 최대 1만 개 샘플로 구성된 소규모 표 데이터에서 탭PFN이 기존 머신러닝과 자동화 머신러닝 모델보다 빠르고 높은 예측 성능을 보였다고 밝혔다.

연구팀은 기술을 상용화하기 위해 2024년 말 프라이어 랩스를 설립했다. 법인 등록은 2024년 12월이다. 이듬해 2월에는 유럽 벤처캐피털 발더턴 캐피털(Balderton Capital)이 주도한 프리시드 라운드에서 900만 유로(150억 원)를 유치했다. 투자에는 SAP 공동창업자 한스 베르너 헥터가 설립한 헥터 재단(Hector Foundation) 등도 참여했다.

설립한 지 1년 남짓 지난 2026년 5월 SAP와 인수 계약을 체결했고, 규제기관 승인을 거쳐 7월 거래가 마무리됐다. 프라이어 랩스에 따르면 인수 발표 당시 탭PFN 오픈소스 모델의 다운로드 수는 300만 건을 넘어섰고, 수백 건의 독립적인 학술연구에서 활용됐다. 회사는 짧은 기간 안에 매출을 크게 키우기보다 새로운 인공지능 기술 영역을 먼저 정의하고, 연구자와 개발자들이 사용하는 표준에 가까워지는 전략을 택했다.

프라이어 랩스는 설립 18개월 만에 인수됐지만, SAP가 확보한 것은 18개월 동안 만들어진 기술이 아니다. 대학 연구실에서 시작해 논문, 오픈소스, 외부 연구자의 검증으로 이어진 최소 4년의 연구 결과다.

연구자 두 명과 M&A 전문가의 조합

프라이어 랩스는 창업자 구성에서도 유럽 딥테크 스타트업의 특징이 드러난다. 공동창업자인 프랑크 후터(Frank Hutter)는 프라이부르크대학교 머신러닝 교수로, 인공지능이 스스로 적절한 모델과 설정을 찾도록 하는 자동화 머신러닝 분야의 대표적인 연구자다. 독일 다름슈타트공과대학교에서 공부한 뒤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유럽연구위원회 연구지원금을 세 차례 받았다. 현재는 대학을 휴직하고 프라이어 랩스의 연구를 이끌고 있다.

프라이어 랩스의 세 창업자 사우라즈 감비르, 프랑크 후터, 노아 홀만(왼쪽부터). 사진=발더턴 캐피털

노아 홀만(Noah Hollmann)은 탭PFN 논문의 제1저자이자 프라이어 랩스의 공동창업자다. 의학과 컴퓨터공학을 함께 공부하며 의료와 과학 분야에 쌓인 정형 데이터를 인공지능으로 분석하는 문제에 집중해왔다. 즉 회사의 핵심 제품이 창업 이후 외부에서 도입된 것이 아니라, 창업자가 직접 수행한 연구에서 출발했다.

세 번째 공동창업자인 사우라즈 감비르(Sauraj Gambhir)는 기술 연구자가 아니라 투자와 인수합병 전문가다. 그는 캐나다 RBC 벤처스(RBC Ventures)의 조직이 약 20명에서 400명 이상으로 성장하는 과정에 참여했고, 이후 네덜란드 ING벤처스(ING Ventures)에서 시리즈 A부터 D단계까지 투자와 기업 매각 업무를 담당했다. 프라이어 랩스에서는 투자유치, 사업개발, 운영과 성장을 맡았다.

좋은 기술이 있다고 자연스럽게 좋은 회사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연구 결과를 제품으로 전환하고, 투자자를 설득하고, 고객에게 적용하며, 대기업과의 거래를 마무리하는 과정에는 서로 다른 역량이 필요하다. 프라이어 랩스는 학술적 권위를 가진 교수, 기술을 직접 개발한 연구자, 투자와 인수합병 경험을 가진 사업가가 처음부터 한 팀을 이뤘다.

인수 이후 프라이어 랩스는 공동대표 체제로 전환했다. 감비르가 사업을, 후터가 연구를 맡는다. 연구와 사업을 분리하면서도 어느 한쪽을 다른 한쪽의 부속 기능으로 만들지 않겠다는 선택으로 보인다.

11년 걸린 린아이엑스와 18개월 걸린 프라이어 랩스

SAP가 스타트업을 인수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21년에는 베를린에서 설립된 업무 프로세스 관리 기업 시그나비오(Signavio)를 인수했다. 2023년에는 기업이 보유한 소프트웨어와 IT 시스템의 전체 구조를 분석하는 린아이엑스(LeanIX)를 인수했고, 2024년에는 직원들이 새로운 기업용 소프트웨어를 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워크미(WalkMe)를 약 15억 달러에 인수했다.

독일 소프트웨어 기업 SAP 본사. SAP는 프라이어 랩스 이전에도 여러 스타트업을 인수했다. 사진=sap.com

최근에는 SAP 내부와 외부의 데이터를 연결하는 데이터 플랫폼 기업 드레미오(Dremio)도 인수했다. 각각 분야가 다른 소프트웨어 기업이지만, 이를 연결하면 SAP가 만들려는 그림이 보인다.

시그나비오는 기업의 업무가 실제로 어떻게 운영되는지를 분석한다. 린아이엑스는 기업이 어떤 애플리케이션과 IT 시스템을 사용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워크미는 직원들이 새로운 시스템을 실제 업무에 도입하도록 돕는다. 드레미오는 여러 곳에 흩어진 데이터를 연결한다. 여기에 프라이어 랩스가 기업 데이터에서 미래를 예측하는 기능을 더한다.

특히 린아이엑스와 프라이어 랩스의 차이가 흥미롭다. 린아이엑스는 2012년 독일 본에서 설립돼 2023년 SAP에 인수됐다. 설립부터 인수까지 약 11년이 걸렸다. 인수 당시 전 세계 고객이 1000곳이 넘었다. 무엇보다 린아이엑스는 인수 전부터 약 10년 동안 SAP 및 시그나비오의 전략적 파트너였다. SAP는 린아이엑스의 제품과 조직을 장기간 관찰했고, 공동 고객과 제품 연동을 통해 결합 가능성을 확인한 뒤 회사를 인수했다.

반면 프라이어 랩스는 충분한 매출과 고객 기반을 쌓을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SAP가 판단한 것은 현재 회사 규모보다 그들이 가진 기술이 앞으로 기업용 인공지능 시장에서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것인지였다.

린아이엑스가 오랜 협력 관계를 거쳐 인수된 ‘관계 축적형’이라면, 프라이어 랩스는 새로운 기술 분야의 선두를 조기에 확보한 ‘기술 선점형’에 가깝다.

유럽 스타트업 인수에는 시간이 걸린다

프라이어 랩스의 18개월은 일반적인 유럽 스타트업 인수 과정과 비교해도 이례적이다. 유럽 스타트업 전문 매체 시프티드(Sifted)가 유럽 기술기업의 인수합병 443건을 분석한 결과, 스타트업 설립부터 인수까지 평균 7년이 걸렸다. 인수 직전 투자단계는 시드와 시리즈 A가 가장 많았고, 분야별로는 기업용 소프트웨어 인수가 가장 활발했다.

유럽 기업의 인수합병이 가장 많이 일어나는 곳은 기업용 소프트웨어 분야다. 사진=sifted

유럽에서는 대학이나 연구기관에서 좋은 기술이 나와도 회사로 독립하고, 제품을 만들고, 첫 번째 산업 고객을 확보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국가마다 다른 법률과 규제, 파편화된 시장, 미국보다 작은 성장자금 시장도 기업의 확장 속도를 늦춘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에 따르면 2008년부터 2021년까지 유럽 유니콘 기업의 약 30%가 EU 밖으로 본사를 옮겼다. 유럽 스타트업 인수의 60% 이상도 비EU 기업이 차지한다. 유럽은 연구와 초기 창업에는 강하지만, 기업을 글로벌 규모로 성장시키고 유럽 기업이 다시 인수하는 순환구조에서는 여전히 약점을 보인다.

이 때문에 SAP의 프라이어 랩스 인수는 한 기업의 투자를 넘어서는 의미를 갖는다. 프라이부르크대학교에서 시작된 기술이 미국 대기업으로 넘어가는 대신 독일 기업에 인수됐고, 연구조직도 유럽에 남았다. SAP는 스타트업을 기존 사업부 안에 완전히 흡수하기보다 독립된 연구소로 유지하면서 자본, 기업 데이터와 글로벌 고객망을 제공하기로 했다.

인공지능과 딥테크 인수에서는 기술만큼 연구자를 남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연구조직을 일반 사업부에 편입해 단기 매출과 기존 제품 일정만 요구하면, 회사를 인수한 이유였던 연구 속도와 핵심 인력이 사라질 수 있다. 프라이어 랩스를 독립 조직으로 두는 것은 인수 후 통합보다 연구팀의 자율성을 우선한 선택이다.

스타트업을 사는 대기업, 대기업을 활용하는 스타트업

대기업의 스타트업 인수는 부족한 기술을 외부에서 사오는 단순한 거래가 아니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내부 연구개발을 압축하고, 새로운 분야의 핵심 인재와 시장의 신뢰를 한꺼번에 확보하는 방법이다.

SAP의 인수 사례를 보면 대기업이 스타트업을 바라보는 두 개의 시간이 존재한다. 린아이엑스처럼 장기간 공동 고객과 제품 연동을 경험하며 검증하는 시간이 있고, 프라이어 랩스처럼 기술 변화가 너무 빨라 기다리는 것 자체가 위험하다고 판단하는 시간이 있다.

스타트업 입장에서도 대기업은 단순한 최종 구매자가 아니다. 공동개발과 기술검증, 제품 연동을 통해 기술이 실제 산업에서 작동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파트너이며, 장기적으로는 투자자나 인수자가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처음부터 회사를 팔기 위해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대기업의 미래 전략에서 자사가 어떤 빈자리를 채우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한국 기업에도 시사점은 분명하다. 유럽 대기업과의 실증사업을 단발성 매출로만 보지 말고 제품 연동과 공동 고객, 반복적인 협업으로 관계를 축적해야 한다. 동시에 딥테크 기업은 짧은 법인 연혁보다 논문, 특허, 공개 벤치마크와 제3자 검증을 통해 기술의 오랜 계보를 증명해야 한다. 결국 인수는 스타트업이 회사를 팔고 싶을 때가 아니라, 대기업이 그 기술을 보유하지 않는 것이 더 큰 위험이라고 판단하는 순간 발생한다. 설립 18개월 만에 SAP의 선택을 받은 프라이어 랩스가 보여준 것도 바로 그 순간이다.

필자 이은서는 한국에서 법학을 전공했고, 베를린에서 연극을 공부했다. 예술의 도시이자 유럽 스타트업 허브인 베를린에 자리 잡고 도시와 함께 성장하며 한국과 독일의 스타트업 생태계를 잇는 123Factory를 이끌고 있다.

이은서 칼럼니스트

필자 이은서는 한국에서 법학을 전공했고, 베를린에서 연극을 공부했다. 예술의 도시이자 유럽 스타트업 허브인 베를린에 자리 잡고 도시와 함께 성장하며 한국과 독일의 스타트업 생태계를 잇는 123Factory를 이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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