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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 튀긴’ 아이디어가 만든 라면의 도시, 구미

35만명 찾는 지역축제 성공에 CNN도 관심…농심 이어 오뚜기까지 ‘라면 클러스터’ 조성

편집자 주
대한민국의 경제는 서울에서만 움직이지 않는다. 한 도시의 공장과 시장, 축제와 골목, 기업의 투자와 사람들의 선택은 지역의 생계를 지탱하고 새로운 산업의 가능성을 만든다. 비즈한국은 지역이 무엇으로 먹고사는지, 어떤 산업이 도시의 정체성을 바꾸는지, 그 변화가 일자리와 인구, 삶의 질로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살펴본다. 균형발전은 모든 지역을 똑같이 만드는 일이 아니라, 각 지역이 가진 자원과 산업, 역사와 개성을 바탕으로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비즈한국] 인스턴트 라면의 존재 가치는 오래 보관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찬장 구석에서 몇 달을 버티고, 전쟁과 재난 때는 만능 비상식량이며, 자취생에게는 언제나 든든한 한 끼가 된다. 라면은 애초에 신선하지 않아도 되도록 만들어진 음식이다.

경상북도 구미시에는 이러한 보편적 인식을 정면으로 뒤집는 사람들이 있다. 라면에도 신선함이 있으며, 튀긴 지 며칠 안 된 면은 일반 유통 제품과 고소함부터 다르다고 믿는다. 매년 11월이면 수십만 명이 이 차이를 확인하기 위해 구미역 앞에 줄을 선다. 지난해에는 사흘 동안 35만 명이 이곳을 찾았다.

올 1월에는 미국 CNN 취재진도 구미시를 찾았다. CNN은 구미라면축제와 농심 구미공장을 취재해 지난 5월 12일 전 세계에 소개했다. 보도의 핵심은 구미가 라면을 통해 지루한 산업도시의 이미지를 벗고 문화도시로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최근에는 또 하나의 낭보가 이어졌다. 오뚜기라면이 구미에 2000억 원을 투자해 수출용 라면공장을 짓겠다며 경상북도·구미시와 투자양해각서를 체결한 것. 전자제품의 도시 구미시는 어떻게 라면의 도시로 거듭나게 됐을까.

전자제품 성지에서 라면을 대량 생산

1991년 구미국가산업단지는 대한민국 전자산업의 중심지였다. 텔레비전과 브라운관, 전자회로기판(PCB)이 도시를 상징하던 시절, 이곳에 라면공장이 들어섰다. 전자산업 중심의 산단에 식품업체가 진출하는 것은 당시로서는 흔치 않은 풍경이었다.

농심의 구상은 단순한 공장 이전이나 입지 선정에 그치지 않았다. 1985년 라면시장 1위에 오른 농심은 세계 시장 진출을 염두에 두고 기존과 다른 공장을 계획했다. 1991년 구미 1공단 1만 2700평 부지에 170억 원을 투자해 생산부터 물류까지 컴퓨터로 제어하는 무인 자동화 공장을 세운 것. 전자제품의 도시에서 전자제품을 만들듯 라면을 생산하겠다는 발상이었다. 지극히 아날로그적인 음식인 라면이 구미에 뿌리를 내린 방식은 역설적으로 당시 최첨단 생산 방식이었다.

농심 구미공장 전경. 1991년 전자 중심의 구미국가산단에 들어선 이 공장은 하루 600만 봉지를 생산하는 국내 최대 라면 생산기지로 성장했다. 사진=농심 제공

공장은 이후에도 계속 진화했다. 농심은 1999년 구미공장을 첨단 생산시설로 확충하고, 분당 최대 600개를 생산할 수 있는 고속라인을 도입했다. 현재는 산업용 로봇과 자체 개발한 AI 기술이 수십 개 공정에 적용돼 있다.

밀가루가 반죽이 되고, 면대로 눌린 뒤 꼬불꼬불한 면발로 잘려 쪄지고 튀겨져 완제품이 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고작 35분이다. 인공지능이 포장 불량과 중량 편차를 찾아낸다. 국내에서 유통되는 신라면의 80%, 짜파게티의 90%가 이 공장에서 생산된다. 

공장의 하루 라면 생산능력은 약 600만 봉지다. 봉지면과 용기면, 스낵을 모두 합친 하루 최대 생산량은 665만 개에 이른다. 지난해에는 라면 12억 3000만 개를 생산해 생산액 8840억 원을 기록했다. 경상북도 주민 모두가 하루에 한 개씩 1년 내내 먹어도 남는 양이다.

CNN 카메라도 이 같은 모습을 집중적으로 담았다. 직원 약 600명이 AI 센서와 스마트 카메라가 적용된 고도화된 자동화 라인을 운영하고, 공장에서 생산된 라면이 도시의 문화적 구심점으로 확장되는 현장을.

그러나 공장은 오랫동안 말 그대로 공장에 머물렀다. 담장 안에서는 라면이 생산됐고, 담장 밖의 도시는 반도체와 전자산업 경기에 따라 웃고 울었다. 공장과 도시 사이의 담장을 허문 것은 2022년 한 공문원에게서 나온 뜻밖의 아이디어 하나였다.

10장짜리 기획서가 도시의 운명을 바꾸다

2022년 구미시청의 한 공무원이 사업 설명서를 제출했다. 분량은 10장. 핵심 아이디어는 “공장에서 생산한 지 2~3일이 채 안 된 갓 튀긴 라면을 맛볼 수 있는 축제”였다. 수십억 원짜리 용역 보고서도, 유명 기획사의 제안서도 아닌 평범한 공무원의 기획안이다.

쉽게 말해 인스턴트식품에 일종의 ‘산지 직송’ 개념을 적용한 셈이다. 얼핏 우스꽝스럽게 들릴 수 있는 이 발상은 다른 도시가 쉽게 따라 할 수 없는 구미만의 훌륭한 독자 콘텐츠가 됐다. 사실 갓 튀긴 라면을 판매하려면 실제로 라면을 튀기는 공장이 가까이에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마음 먹으면 하루 안에 차로 배달될 정도로 땅덩이가 좁은 우리나라에선 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이러한 엉뚱한 발상은 묘한 설득력을 가졌다.

구미라면축제는 국내 유일의 라면 테마 축제로, 농심 구미공장에서 갓 튀긴 라면을 맛볼 수 있다는 발상으로 2022년 시작해 매년 11월 구미역 일원에서 열린다. 첫해 1만 명 수준이던 방문객은 지난해 35만 명으로 불어났다. 2024년 구미라면축제 모습. 사진=구미라면축제 홈페이지

2022년 첫해 축제 방문객은 약 1만 명이었다. 2025년에는 최종 집계 기준 35만 명이 찾았다. 4년 만에 방문객이 무려 35배로 늘었다. 숫자만 놓고 보면 단순한 지역축제를 넘어 라면을 활용한 대규모 소비·유통 실험에 가까울 정도로 성장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지난해 11월 7일 개막 첫날에만 약 9만 명이 몰렸다. 길이 475m의 라면 조리 구역에서는 수십 명의 조리사가 다양한 라면 음식을 선보였다. 사흘 동안 이색 라면 5만 4000여 그릇과 갓 튀긴 라면 48만 봉지가 판매됐다.

축제가 얼마나 성공했는지 보여주는 지표는 방문객 수만이 아니다. 이른바 짝퉁이 생겼다. 한 민간 사업자가 구미라면축제의 명성에 편승해 지난해 5월 부산 기장군에서 ‘2025 세계라면축제’를 열었다. 결과는 참담했다. 졸속 운영과 더위로 ‘라면잼버리’라는 조롱을 받았고, 주최 기관이라던 업체는 대금을 지급하지 않은 채 잠적했다. 폭우로 행사장이 물바다가 되는 와중에 방문객들의 환불 요구가 빗발쳤고, 운영자는 도피 끝에 검거됐다.

같은 라면 축제인데 왜 한쪽은 35만 명을 모으고 한쪽은 수사 대상이 됐을까. 답은 ‘공장 못지않은 체계적 운영’에 있다. 구미라면축제는 QR코드·키오스크 주문 시스템으로 대기 줄을 없앴고, 취식 공간을 이용객 특성에 맞춰 나눠 운영했다. 여러 맛을 한 번에 즐길 수 있는 ‘반띵 메뉴’를 도입했고, 가장 비싼 메뉴도 9000원을 넘지 않는다. 해마다 반복되는 지역축제 바가지 논란을 정면으로 겨냥한 설계다. 지난해 기준 방문객의 48%가 외지인이었고, 지역 음식점과 소상공인이 참여해 약 15억 원 규모의 소비 창출 효과를 거뒀다.

교통 인프라도 거들었다. 2024년 말 대경선 광역철도가 구미역에 들어오면서 접근성이 좋아졌고, 지난해 축제는 첫날에만 직전 해 전체 방문객의 절반 이상이 다녀갔다. 외국인 10개 팀이 참가한 ‘글로벌 라면요리왕’ 대회에는 돼지국밥 라면과 동남아식 볶음라면이 등장했고, K팝을 좋아해 한국에 왔다가 축제 소식을 듣고 버스로 두 시간을 달려온 스웨덴 교환학생도 있었다. 농심은 글로벌 시장용으로 개발 중이던 ‘신라면 김치볶음면’을 이 축제에서 처음 공개했다. 지역축제가 다국적 식품기업의 신제품 데뷔 무대가 되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4년에 불과했다.

오뚜기 2000억 원 투자, ‘라면 클러스터’의 시작

올여름 구미의 라면 산업은 또 다른 전기를 맞았다. 오뚜기라면과 구미시는 13일 구미2국가산단 옥계 지역에 2000억 원을 투자해 수출용 라면 생산공장을 건설한다는 협약을 맺었다. 신규 고용 규모는 약 120명 수준이다. 오뚜기는 빠르게 늘어나는 K-라면 수출 물량을 소화할 생산기지가 필요했고, 새로운 공장 부지로 경쟁사 농심의 주요 생산거점인 구미를 선택했다. 요즘 용어를 동원하면 이른바 ‘라면 클러스터’의 시작점으로 보기 충분하다.

구미시는 이번 투자를 라면축제를 통해 높아진 도시 인지도와 산업 기반이 기업 투자로 이어진 사례로 자체 평가했다. 산업이 축제를 만들고, 축제가 도시 브랜드를 키우며, 높아진 브랜드 가치가 다시 산업을 불러들이는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졌다는 설명이다.

오뚜기라면이 13일 경북도·구미시와 2000억 원 규모의 수출용 라면공장 신설 투자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사진=오뚜기 제공

물론 오뚜기가 라면축제 때문에 구미를 선택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공장 부지는 교통과 물류, 용수와 전력, 인력 수급, 산업단지 지원 조건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결정된다. 라면축제는 투자 결정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기보다 구미가 가진 식품산업 기반과 도시 인지도를 보여주는 상징으로 해석된다.

구미시는 이제 라면을 계절 행사에서 도시의 상설 정체성으로 끌어올리는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구미역에는 라면 체험 콘텐츠를 갖춘 홍보관이 들어섰고, 오는 11월 6일부터 사흘간 열리는 올해 축제는 글로벌 라면존과 외국인 참여형 콘텐츠를 확대해 국제 행사급으로 치러질 예정이다.

박정희와 수출, 브라운관의 도시였던 구미는 이렇게 라면의 도시가 됐다. 시작은 어느 공무원의 10장짜리 기획서였다. 오래 보관하려고 만든 음식에 굳이 ‘갓 튀긴’이라는 가치를 붙인 역발상이, 수십억 원짜리 컨설팅 보고서보다 도시를 더 특색있게 변모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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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갓 튀긴’ 아이디어가 만든 라면의 도시, 구미
봉성창 기자

기업이 말하는 성장의 언어와 그 뒤에 놓인 현실의 간극을 집요하게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날카롭고 균형 잡힌 시선으로 산업의 현재와 다음을 기록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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