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만화·영화. 만화영화가 아니다. 틈에 작은 점 같은 팥알이 있다. 팥을 좋아하는 작가가 두 장르 사이를 오가는 길에는 팥알들이 놓였다. 만화 이야기 작가로, 또 영화감독으로 ‘환절기’, ‘당신의 부탁’, ‘니나 내나’를 쓰고, 찍은 이동은 작가를 은평구의 한 팥 전문점에서 만났다.

저녁밥으로 팥빙수!
단팥빵, 팥죽, 팥칼국수, 팥빙수……. 팥이라면 가리는 것 없이 좋아한다는 이동은 작가가 팥빙수를 골랐다. 저녁이니까 팥빙수는 식후에 디저트로 드시고, 끼니 할 것을 말해달라고 하니 팥빙수도 열량이 있어서 괜찮다며, 어릴 때 집에서 일제 파란색 빙수기로 얼음을 갈아 팥빙수를 만들어 먹었던 이야기를 덧붙인다. 팥을 좋아한다길래 고릿적 취향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저녁밥이 팥빙수라니 여간 예사롭지 않다.
근래에 팥을 싫어하는 사람을 만나고 나서야 팥을 좋아하는 것도 기호이고 취향이라는 것을 알았을 정도로 작가는 좌고우면하지 않고 팥을 좋아해왔다. 부모님이 맞벌이하느라 챙겨줄 사람이 없던 어린 시절부터 매일 같이 슈퍼에서 왕단팥빵을 사 먹기 시작해 오늘의 ‘1일 1팥’에 이르고 있다고 하니 그 역사가 장구하다.

한 개의 단팥빵도 마다하지 않고
작가의 고향이 ‘석빙고 팥아이스바’의 고장 부산이어서인지 그의 작품들은 서울 아닌 지방 도시를 배경으로 할 때가 많다. ‘환절기’(대전·원주), ‘당신의 부탁’(청주), ‘하나의 경우’(원주), ‘최선을 다해 멸망 중입니다’(증평), ‘니나 내나’(진주·부산·파주)가 그렇다. 작가에게 그 까닭을 물으니, 서울에서는 이야기가 잘 떠오르지 않지만, 지방에 가면 ‘이런 곳에 이런 사람이 살 것 같다’라는 느낌이 온다고 한다. 규모에 압도된 ‘메가시티’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삶과 관계의 감각들이 비로소 드러나 보이는 것이리라.
작품 구상이나 자료 수집을 위한 취재 여행에서 있었던 에피소드를 물으니, 지역에서 맛볼 수 있는 세계 음식들에 관해 이야기한다. 이주 노동자와 결혼 이민자들이 정착하면서 그들 출신 국가의 다채로운 음식을 선보이는 가게들이 생겨났고, 이제는 서울 사람들의 편견을 깰 만큼 훨씬 지구화된 모습들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최근 작품 ‘최선을 다해 멸망 중입니다’에서 주인공 아영의 어머니를 태국 사람으로 설정한 것도 증평에 있는 태국 음식점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작가는 만화의 배경이 된 지역 이야기를 이어가다 대전에서 만난 최고의 팥빵 맛집이라며 ‘정인구 팥빵’ 이야기를 꺼냈다. 팥알은 둥글고, 돌고 돌아 다시 팥 이야기다. 내친김에 그곳의 빵이 인생 단팥빵이었는지 질문했더니 잠깐 망설이다가 “시네필에게 최고의 영화는 오늘 보는 영화이듯, 오늘 먹는 단팥빵이 제일 맛있는 단팥빵”이라는 답을 내놓는다. 곤란한 질문을 기술적으로 회피한다기보다는 팥을 대하는 그의 진지한 마음이 느껴지는 답이다.
팥 좋아하는 것이 주변에 알려져 팥빵 선물을 받을 때가 있는데, 어느 때인가 입맛에 맞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별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깨닫고 팥 자체를 좋아했던 초심을 잃지 말자고 다짐한 적 있다고 한다. 바다는 물을 마다하지 않는다고 했던가. 한 개의 단팥빵도 마다하지 않는 작가의 진심이 와 닿았다.
팥과 만화의 풍미
“팥을 물에 하루 종일 불린 다음에 강력한 불에 40분, 중간 불에 1시간 30분, 마무리로 30분. 한 줌의 앙꼬를 얻기 위해서 약 3시간 동안을 뜨거운 불 앞에 있어야 되는 그 고통을 알아?”
영화 ‘박수건달’에는 풀빵 팥소를 만드는 이의 수고로움에 대한 대사가 있다. 실제로 팥은 손이 많이 가는 재료다. 작가는 직접 팥을 삶고 다뤄보니 정말 쉽지 않았다면서, 팥을 제대로 다루는 가게의 주인장들에게서는 애써 친절하지 않은 모습과 고집, 장인 정신 같은 것이 보이는데 그런 집들을 좋아해 찾아다닌다고 말했다. 이날 인터뷰한 장소 또한 그런 곳이라고 덧붙였다.
화려한 꾸밈새보다는 잘 삶아내 식감과 풍미를 잘 살린 팥을 좋아하는 작가의 모습에서 그의 작품들이 언뜻언뜻 떠올랐다. ‘환절기’에서는 사고를 당한 아들이 그 옆의 친구와 동성 연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엄마가 나오고, ‘당신의 부탁’에서는 죽은 남편과 전처의 아들을 키우는 서른둘의 엄마가 아들의 생모를 만난다. ‘니나 내나’에서는 삼 남매가 17년 전 집을 떠난 엄마가 보낸 ‘보고 싶다’라고 적힌 엽서를 받으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렸다. 말 그대로 예사롭지 않은 가족 이야기인데, 소재를 드러내거나 감정을 이야기하는 데 튀거나 지나침이 없다. 이야기에 화려한 장식과 굳센 당위를 달지 않는 이동은 작가와 스토리를 차분하게 그려내는 정이용 작가의 조화가 작품의 풍미를 끌어올린다.
“따로 또 같이” 이동은·정이용의 ‘공동창작’
가요계의 서수남-하청일처럼 만화계에는 허영만-김세영이 있고, 그에 버금가는 것이 이동은-정이용 콤비다. 벌써 여덟 작품을 함께했고, 새로운 작품 또한 진행 중이다. 작년에는 황석영(2018), 한강(2024) 작가의 뒤를 이어 ‘하나의 경우’로 프랑스에서 제8회 에밀 기메 아시아 문학상을 받았다.

둘 다 내향형인데, 조금 덜 내향형인 이동은 작가가 먼저 우물을 판다. 그가 작품을 기획하고, 원고 일정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는다. 이동은 작가가 이런저런 기획을 제안하면 정이용 작가가 검토해 선별하는 식이라고 한다. 둘이 서로를 보완하며 ‘케미’를 만들어낸다.
편의상 글·그림으로 둘을 나누기도 하지만, 작업 과정을 들여다보면 사실상 공동창작에 가깝다. 이동은 작가가 시나리오를 쓰면 정이용 작가가 콘티를 짜면서 표현과 대사, 감정선 등에 관해 치열하게 토론하며 조율한다. 이렇게 만화 초고가 완성되면 이동은 작가가 다시 대사를 조정한다. “따로 또 같이” 유기적인 창작 과정을 거치기에 책에는 ‘글 이동은 그림 정이용’이 아니라 ‘이동은·정이용 만화’로 적는다.
흥미로운 점은 영화감독이기도 한 이동은 작가는 만화적 표현을 염두에 두고, 만화가인 정이용 작가는 되레 화면 구성에서 영화적 시선과 구도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정이용 작가는 장면을 구성할 때 카메라 위치까지 고민한다고 하니 영화감독은 만화를 쓰고, 만화가는 영화를 그린다.

김영하 원작 만화와 신작 무언극 작업 중
가을이면 햇팥이 나온다. 지금 이 무더위를 견디며 영글어가는 팥처럼, 준비하는 신작이 없는지 물었더니 교정본을 확인 중인 작업과 제작 중인 작업이 있다고 한다.
2년 전쯤 김영하 작가의 작품을 그래픽 노블로 만드는 프로젝트를 제안받았고, 작가의 작품을 모두 읽고서 단편소설 ‘아이를 찾습니다’를 골랐다. 2015년에 제9회 김유정문학상을 수상한 이 작품은 두 돌짜리 아이를 마트에서 잃어버린 부모와 그 아이를 유괴했다가 나중에 자살한 여자, 그리고 납치당했다가 친부모에게 돌아왔지만 적응하지 못한 채 사고를 치고 다니는 아이가 겪는 아이러니한 지옥도를 보여준다. 역시나 이동은 작가가 만화 시나리오를 썼고, 정이용 작가가 그림을 그렸다.
현재 제작 중인 작품은 대사가 없는 무언극으로, 지난해 캐나다 퀘벡의 작가 레지던시에 다녀온 이동은 작가의 경험이 녹아들었다. 의사소통에 제약이 있는 공간의 경험이 언어로 소통할 수 없는 상황에서의 관계에 대한 고민으로, 대사 없이 진행되는 넌버벌(Non-verbal)의 작품으로 이어졌다. 처음에는 배경이 되는 나라조차 가린 무국적 세계로 구상했지만, 그와 같은 설정이 도리어 미국이나 백인 중심의 풍경을 연상하게 하는 경우가 많아 한국의 특정되지 않는 도시를 배경으로 하기로 했다.
번역 없이 언어와 문화권을 넘어 소통할 수 있는 작품을 꿈꾸는 작가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문득 오스트레일리아 이민자의 적응기를 무언극으로 그린 숀 탠(Shaun Tan)의 ‘도착(The Arrival)’이 떠오른다. ‘도착’은 각자의 사연을 안은 채 서로 말도 안 통하는 새 공간에서 자리를 잡으려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한마디 말없이 그려낸 그래픽노블이다. 그동안 ‘환절기’와 ‘진, 진’ ‘하나의 경우’ 등이 프랑스와 폴란드 등에서 번역 출판됐는데, 무언극의 신작은 더 많은 해외 독자들에게 더 쉽게 가닿을 수 있을 것이다. 이동은, 정이용 두 작가가 보여줄 언어를 넘어선 공감대가 어떤 모습일지 자못 기대가 된다.

※이동은 작가는
1978년생으로 부산에서 태어났다. 성균관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했는데, 본래 영화를 공부하고 싶었지만, 법대나 상대를 으레 지망해야 하는 당시 분위기 탓에 영화과나 신문방송학과로 진학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다행히 경제학 공부가 재미있었는데, 인간의 행동을 수요와 공급, 수학적 모델로 분석하는 방식에 흥미를 느꼈다.
대학 시절 단편 영화를 만들었고 작은 영화제에서 상을 받은 적도 있지만, 영화계로 인연이 바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한동안 일반 회사에 다녔고, 영화사 투자팀, 극장 프로그래머 등을 거쳐 시나리오와 창작 쪽으로 오게 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을 “회사를 그만두고 작가가 되었다”라는 식의 드라마틱한 서사로 소개하는 것에는 조심스럽다. 원래 글을 쓰고 영화를 만들던 사람이 호구지책으로 다른 일을 하다가 다시 돌아온 쪽에 가깝다고.
2013년 ‘당부’로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고, 같은 해에 원래 알고 지내던 정이용 작가와 함께 ‘환절기’를 만화로 만들어 만화 스토리 작가로 만화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2015년에는 극영화연출전공으로 명필름랩 1기생이 되었다. 이후에는 단편만화 ‘캠프’를 비롯해 ‘하나의 경우’, ‘진, 진’, ‘요요’, ‘니나 내나’, ‘당신의 부탁’, ‘최선을 다해 멸망 중입니다’ 등의 이야기를 썼고, ‘환절기’, ‘당신의 부탁’, ‘니나 내나’를 영화로 만들었다.
그는 첫 만화 ‘환절기’에서부터 그래왔듯이 장르 정체성을 드러내기 위해 극적인 장치를 부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물들을 각자의 일상에 있는 평범한 사람들로 설정하며 자세히 들여다보게 만든다. 그래서 그의 만화에서는 걷고, 먹고, 차에서 나란히 앞을 보는 평범한 일상이 중요하다.
이동은 작가는 자신을 ‘차분하고 조용하게 원하는 것들을 자박자박 만들어가는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크지 않은, 사소하고 지나가면서 만날 수 있을 법한 대상들에게 시선을 두어온 작가의 창작관이 오롯이 드러난다. 이십여 년 넘게 지나는 길에 우연히 만난 간판들을 사진으로 찍어 블로그에 수천 장 아카이브 하고 있다는 취미 또한 그러한 태도의 연장선에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