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바로가기본문바로가기
비즈한국비즈한국

기후재난 시대의 지혜, 올 여름엔 ‘에너지 휴가제’ 어때요?

발전소 증설하는 공급 중심 구조 탈피…노동자 휴가 활용한 사전 계획형 수요관리 부각

[비즈한국] 매년 여름철이 되면 한국은 전력 공급예비율 부족에 따른 대규모 정전, 즉 블랙아웃의 공포에 직면하곤 한다. 기후위기 심화로 폭염의 빈도와 강도가 눈에 띄게 증가하면서 에어컨을 비롯한 여름철 냉방 전력 수요가 한꺼번에 몰리기 때문이다. 그동안 정부와 전력 당국은 이 같은 위기가 찾아올 때마다 발전 설비를 추가로 건설하거나 대국민 절전 캠페인을 벌이는 등 공급을 늘리고 단편적인 절전을 호소하는 방식에 주로 의존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노동자들의 여름 집단 휴가를 늘려 전력 수요 자체를 조절하자는 ‘에너지 휴가제’가 새로운 기후-노동 통합 의제로 급부상하고 있다. 전기를 많이 쓰는 대형 공장들의 휴가 일정을 늘려 전력 사용을 낮추는 동시에 극심한 폭염으로부터 노동자의 건강권을 보장하자는 개념이다. 온실가스 감축과 전력망 안정, 그리고 노동자의 쉴 권리를 결합한 대안으로 평가받는다.

전국금속노동조합과 녹색연합이 주최한 ‘에너지 휴가제 토론회’에서 토론자가 발언하고 있다. 사진=김민호 기자

데이터가 보여준 ‘에너지 휴가’의 효과

전국금속노동조합과 녹색연합이 7월 8일 서울 중구 금속노조 회의실에서 연 에너지 휴가제 토론회에서 에너지 휴가의 실효성을 데이터로 볼 수 있었다. 흔히 일 년 중 가장 기온이 높은 8월 첫째 주가 되면 전력 수급이 한계에 다다를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 전력 공급예비율은 오히려 확연한 여유를 보이는 역설적인 패턴이 나타났다. 국내 대형 제조업체들이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여름 휴가에 들어가면서 공장 조업률이 급감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공장 등 산업용으로 쓰는 전력 소비 비중은 전체의 절반에 육박하며, 그 중에서도 자동차와 조선 등 대형 제조업의 비중이 높다. 따라서 전력 소비 규모가 거대한 대형 사업장들이 한꺼번에 문을 닫고 쉬면 전국의 전력 수요가 눈에 띄게 줄어드는 효과를 낳게 된다.

기록적인 무더위를 기록했던 2018년 7월 말과 8월 중순의 전력 수요 그래프는 이 같은 효과를 뚜렷하게 보여준다. 당시 7월 말, 40도 가까운 폭염에도 전력 공급예비율은 전 주에 비해 여유로웠다. 반면 현대중공업 휴가 복귀 후인 8월 13일은 기온이 하강했지만 예비전력이 10% 이하로 떨어졌다. 집단 휴가로 인한 대규모 산업 전력 부하 제거의 영향을 보여준다.

2018년 여름, 기온이 최고조로 높아진 7월 말보다 오히려 현대자동차와 현대중공업의 휴가기간 앞뒤로 전력 공급예비율이 낮았다. 대형 제조업 기업의 휴가가 전력 감소에 영향을 준다는 점을 보여준다. 사진=김현우 탈성장과대안연구소 소장 제공

김현우 탈성장과대안연구소 소장은 이들 대형 사업장과 연동된 협력업체들이 동시 휴가에 들어감으로써 피크 시간대에 약 5GW 안팎의 공급예비력이 추가로 확보된 것으로 추정했다. 이는 원자력 발전소 여러 기의 발전량과 맞먹는 수준으로, 정부가 전력 설비를 늘리지 않고 휴가 일정 조율만으로도 전력망 안정과 온실가스 감축을 달성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김현우 소장은 “이미 대형 제조업체들의 집단 휴가가 전력망을 안정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는 점이 데이터로 보인다”며 “기업 입장에서도 전력 수요반응(DR) 제도를 통해서 휴가 정산금을 얻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고 설명했다.

해외에서도 이와 유사한 형태의 기후 휴무에 대한 논의와 실천이 구체화되고 있다. 대만 정부는 극심한 고온 현상이 발생할 경우 총 전력 소비를 줄이고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해 과거 태풍 때 시행하던 휴무제를 벤치마킹한 ‘고온 휴무 제도’의 입법을 추진 중이다. 영국 역시 노동조합총연맹(TUC)과 환경 단체들이 연대해 폭염 속 노동자 보호를 위한 ‘폭염 파업(Heat Strike)’ 캠페인을 펼치며 기후 휴직 제도를 요구한 바 있다.

큰 틀에선 공감…‘휴식의 양극화’ 및 임금 문제 고민해야

그러나 에너지 휴가제를 현장에 실제로 전면 도입하기 위해서는 현실적인 쟁점과 과제가 적지 않다.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가 금속노조 대의원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80% 이상이 에너지 휴가제 도입의 필요성에 깊이 공감했다. 노동자들은 탄소 배출을 줄인다는 거시적 명분 외에도 개인과 가족의 여유 시간을 확보해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다는 직관적인 효용에 높은 기대를 보였다. 하지만 실제 제도 정착을 저해하는 현실적인 우려 사항 역시 제기됐다.

가장 큰 불안 요소는 대기업과 중소 영세 하청 사업장 간 ‘휴식의 양극화’ 현상이다. 조직화되고 자금 여력이 있는 대기업 사업장은 휴가 확대나 조업 조정이 상대적으로 쉽지만, 경영 여건이 열악하고 교섭력이 약한 영세 하청 사업장 노동자들은 제도에서 배제되어 격차가 오히려 심화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또 하나는 제조업 현장의 독특한 임금 체계와 고용 불안 문제다. 한국 제조업은 상대적으로 기본급은 낮고 연장·특근 수당 중심이어서 노동시간이 줄어들면 곧바로 총급여 감소로 직결된다. 실제로 소득 보전을 위해 휴가를 반납하고 특근을 자처하는 노동자가 많은 상황에서, 임금 보전 대책 없는 휴가 확대는 현장의 저항을 부를 수 있다.

토론회에서 이상섭 금속노조 포항지부 부지장은 “자동화, 전동화, 디지털화가 진행되는 상황에서 노동자는 자리를 비운 사이 그 자리가 대체되거나 불안정 노동이 들어오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느낀다”며 “제도가 실질적으로 진전되려면 노사 간 협상을 넘어 사회적 논의와 합의, 또는 정치적이고 제도적인 압박이 반드시 수반돼야 한다”고 말했다.

따라서 에너지 휴가제가 성공적으로 자리 잡으려면 단순히 노사의 휴가 증대 합의를 넘어 정부와 사회의 촘촘한 구조적 정책 설계가 동반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중소기업에 지원을 제공하고, 원청과 하청 사업장이 함께 가동을 멈추고 안전하게 쉴 수 있도록 사회연대적 단체협약 모델을 개발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반도체나 석유화학 공장처럼 24시간 연속 공정이 불가피해 일시에 쉬기 어려운 업종의 경우, 여름철 전력 피크 시기에 정기 보수 일정을 집중 배치해 순차적으로 조업을 조정하는 식의 업종별 맞춤형 설계도 요구된다.

여형범 충남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에너지 휴가제가 전력 수요관리에 기여하는 것만 제시할 경우 노동자의 참여 동기와 사회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어려울 수 있다”며 “휴가 기간에 작업장 녹색화 및 지역사회 기후실천과 연계되는 다양한 활동을 집중 기획하고 실행하는 ‘노동자 기후주간’으로 확장해 나가는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민호 기자

중화학공업·에너지 분야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지속가능한 사회와 삶에 관심이 많습니다.

goldmino@bizhankook.com
저작권자 ⓒ 비즈한국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형광펜 추가
✕ 형광펜 제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