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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쓸인잡]직장 내 성희롱② 누가 약자의 편에 서줄 것인가

조직 내 긍정적 이미지 가진 상급자의 은밀한 희롱…약자일수록 연대 및 외부 조력이 절실

2024.01.05(금) 14:00:30

[비즈한국]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다양한 얼굴과 역할을 갖고 살아간다. 어떤 남자는 건실한 회사의 부장님이면서 누군가의 아들이자 아버지, 한 여성의 남편이다. 또한 꽤 큰 교회의 성가대원이고 교회 뿐 아니라 회사 내의 자원봉사 동아리 활동도 활발히 하고 있다. 그때 그때 그는 경력 n년차 직장인, 아버지와 남편 역할을 연기하고 주말이면 교회에서 노래를 하거나 자원봉사를 하는 상냥한 아저씨가 된다. 이 가운데 어느 것이 진짜 그 사람이 가진 고유의 정체성이라고 답을 내리기란 매우 어렵다. 모든 사람은 이토록 입체적인 모습을 하고 있으며 자기 앞의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즉 관계의 성격에 따라 가면을 바꿔쓰기 마련이다. 때문에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직장 내 성희롱은 약자 입장에서 문제 제기를 하기가 애매한 경우가 훨씬 많다. 특히 사회 경험이 적은 신입사원일수록 더욱 그렇다. 사진=생성형 AI

 

K는 위에서 언급한 다양한 역할을 연기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자기 부서 여직원들로부터 성희롱 및 성추행 가해자로 지목되었을 때 대다수의 주변인들, 특히 비슷한 또래의 남성들은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다”와 같은 반응을 보였다. 왜냐하면 K는 지난 십수 년간 좋은 남편, 아버지, 자원봉사자, 독실한 종교인과 같은 역할 연기를 통해 조직 내에서 긍정적인 이미지를 쌓아왔기 때문이었다.

 

K가 회식자리에서 자신의 부부관계에 대해 말하고 성 경험이 있는지 물을 때, 외모나 몸매 평가를 할 때, 무릎에 손을 올리고 허리에 팔을 두르거나, 악수하면서 손바닥 한가운데를 손가락으로 긁는 행위를 할 때 그 대상은 주로 나이가 어린 비정규직 여직원이거나 정규직이라도 조직 내에서 힘도 없고 목소리 내기 어려운 나이 어린 평사원이나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신입사원이었다.

 

이런 사회초년생 여성의 경우, 불쾌하고 불편한 상황에 놓이더라도 최대한 티 내지 않고 계속 싹싹하게 행동해야만 ‘배려심 있고 둥글둥글한 성격, 호감 가는 직원’으로서 괜찮은 평가를 받을 것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경우가 많다. 어렸을 때부터 가정이나 학교, 주변 사람으로부터 그렇게 교육을 받으며 자랐을 것이고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간혹 상대의 말에 그 자리에서 바로 반박하거나 대들면 ‘여자가 나댄다’고 하거나, ‘까칠해서 같이 있기(일하기) 거북하다’ 같은 피드백을 받기 일쑤다. 더 나아가 과장된 소문과 뒷담화가 되어 돌아온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적당히 모른 척 넘어가거나, 마지못해 가짜웃음을 짓거나, 못 알아듣겠다는 티를 내는 정도로 에둘러 거부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최선이다. 무지하기 이를 데 없는 상대방이 그걸 ‘암묵적인 동의나 용인’으로 받아들일 거라는 사실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채.

 

그런 힘 없고 어린 직원들이 하나의 집단으로 뭉쳐 힘을 모으고, 신고서를 제출하고 문제를 제기하도록 방아쇠를 당긴 이는 부서에서 가장 나이가 많으나 적절한 직급 호칭이 없어 ‘여사님’ 소리를 듣던 행정지원 직원이었다. 부장의 식성에 맞춰 점심 메뉴와 회식 장소를 찾아보고, 사용처가 모호한 각종 법인카드 영수증과 부서 경비를 정산하고, 휴게실의 커피와 간식같은 소모품이나 사무실 비품이 떨어지지 않도록 재고를 관리하고, 내방객이나 손님에게 차를 내 오는 등 소위 ‘서무’ 업무를 오랜 기간 해왔던 이. 부서의 살림을 도맡아 하는, 가정으로 따지면 엄마 같은 역할을 해온 직원이었다. 그 역시 그런 일을 수도 없이 겪으며 긴 세월을 참아왔기 때문에 K가 스스로 완벽하다고 생각하고 연기했을 ‘훌륭한 가장, 인격적인 부장님’ 역할에서 허점을 발견하고, 그에 대해 피해 직원 편에 서서 증언할 수 있었을 것이다. 직장 내 성희롱에 있어서 만큼은 여성의 적은 절대로 여성이 아니다.

 

K는 그렇게 회사의 첫 성희롱 징계 해고자가 되었고, 이 일은 무려 7년 전인 2017년에 있었던 일이다. 하지만 지난 직장 내 성희롱 1편에서 등장한 ‘홍콩 간다’와 같은 일은 아직도 반복되며, 특히 소규모 사업장일수록 부사장, 사장, 대표, 회장 등 직원에 대한 실제 인사권을 갖고 있는 본인이 가해자인 경우가 많다. 게다가 작은 사업장일수록 그 안의 구성원들이 서로 맺고 있는 관계가 여러 갈래로 얽히고설켜 있기 때문에 그 누구라도 약자(보통 근속기간이 짧은 사회초년생)의 편에 서서 가해자의 또 다른 가면을 폭로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렵다.

 

근로자 30인 미만의 소규모 사업장은 서울시 전체사업장의 97.8%를 차지한다. 이런 30인 미만 사업장에서 발생한 성희롱 사건에 대한 무료 조사를 지원하던 ‘위드유 서울직장 성희롱성 폭력센터’ 는 지난해 8월 갑작스레 사업을 종료하고 문을 닫았으며, 서울시 성평등 활동 지원센터 또한 올 6월까지만 운영된 뒤 다른 기관에 통폐합된다. 이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나는 그저 이 자리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오랜 기간’ 존재하고 버틸 수 있을지를 고민하게 된다. K의 오래되고 견고한 가면을 벗겼던 그 직원처럼 말이다.​

 

필자 ​김진은? 정규직, 비정규직, 파견직을 합쳐 3000명에 달하는 기업의 인사팀장을 맡고 있다. 6년간 각종 인사 실무를 수행하면서 얻은 깨달음과 비법을 ‘알아두면 쓸데있는 인사 잡학사전’​을 통해 직장인들에게 알려주고자 한다.

김진 HR 칼럼니스트 writer@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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