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연말이 되니 이런 저런 모임에서 오랜만에 얼굴을 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하는 일도 일이거니와 그 간 열심히 의견을 피력해 온 때문인지 근황토크를 하다 보면 각자 자신의 직장에서 겪는 고충에 대해 털어놓는 경우가 많다. L 역시 얼마 전 사무실에서 있었던 불편한 순간에 대한 이야기를 공유해 주었다.
밀려있는 연차휴가를 사용해 연말에 홍콩 여행을 가려고 계획 중이던 여직원에게 부사장이 부적절한 말을 한 것이다. 웬만하면 이제 여기까지만 읽어도 그가 뱉은 말이 무엇일지 충분히 예상이 가능할 것이다.
“홍콩 가면 좋지, 그런데 홍콩은 혼자 가면 안 되는데, 혼자 갈 수도 없고”
아무도 웃지 않는 썰렁한 발언.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듣는 이에 따라서는 불쾌함을 느끼고 눈살을 찌푸릴 법한 성적 의미가 담긴 농담. 여기까지만 했으면 좋으련만 이런 사람들은 결코 멈추는 법을 모른다. 누구도 대꾸하지 않고 분위기가 싸해지자 부사장은 사무실 내의 유일한 기혼여성인 L까지 끌어들여 한술 더 떴다.
“그래도 L은 잘 알지 않나? 홍콩 같이 가면 좋은 거?”
이제 사무실의 온도는 영하권에 접어들었다. 안 그래도 최근 난방비 폭등과 영업실적 급감으로 경비를 절감한다며 난방 사용시간을 하루 2회로 제한하고 있던 중이었다고 한다. 내향적이고 조용한 성격의 L이었기에 예전 같았으면 그냥 넘어갈 수도 있었겠지만, 아무도 입을 열지 않고 문제 삼지 않은 채 ‘그냥 참고 넘어가는’ 분위기를 더 이상 견디기 힘들었다고 했다.
지금 그 말씀은 수위가 높은 것 같으니 언행을 조심해 주셨으면 한다고 정중하게 건의한 것이다. 하지만 부사장은 왜 괜히 오바하고 그러냐, 여행을 가니 엄청 기분 좋겠다는 의미로 말한 건데 이상하게 생각하는 거라며 도리어 L에게 화살을 돌렸던 모양이다. 이 일을 겪으며 L이 가장 화가 났던 부분은 사무실의 그 누구도, 심지어 인사노무를 담당하는 경영지원팀장이 한 공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곁에서 함께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이다.
“안타깝지만 그게 현실이에요. 성희롱을 단속하고, 직원을 보호하고, 신고가 들어오면 조사할 의무를 갖고 있는 그런 사람들이 성희롱을 하죠. 문제의식이 전혀 없어요. 개선이 시급한, 규모가 작은 사업장일수록 더욱 그래요.”
L은 대기업에서 10여 년간간 근무하다 건강상의 이유로 일을 그만두었다. 얼마간의 휴식을 가진 후 예전에 비하면 규모가 한없이 작은 지금의 회사로 이직했는데 면접 때부터 결혼했는데 아이는 왜 없냐, 아이 생기면 그만두는 거 아니냐는 질문을 공공연하게 받았다고 한다. 예전 회사였다면 상상하기 어려운 일들이 중소 규모의 오너 회사를 다니다 보니 숨 쉬듯 자연스러운 일상이 돼버려서 가끔은 나 혼자 이상한 건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며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그 간 현장에서 다양한 직원들을 만나고 성희롱, 성추행, 괴롭힘 사건 등을 처리하면서 그래도 직장 문화가 조금씩은 변하고 있다며 자기 위안을 삼아왔다. 하지만 이런 생각 또한 종사자 수가 수천 명인 조직에 있는 사람이나 뱉을 수 있는 속 편한 소리란 것도 사실은 알고 있다. 매번 글을 쓰면서도 지극히 안정적인 자리에 서서 매우 안일한 관점으로 바라본 핑크빛 이야기만 하는 것은 아닐까 불안했는데 이를 L이 적나라하게 깨우쳐 주었다.
L은 이후에 별도로 경영지원팀장을 찾아갔다. 이번에는 말만 하고 넘어갔으나 다음에도 비슷한 일이 반복된다면 경영지원팀에서 제대로 대응해 주길 바란다고 정식으로 고충을 전달하고 이를 본인의 업무수첩에도 잘 메모해 두었다고 전해 왔다.
‘홍콩 간다’ 처럼 성적 함의가 담긴 말을 가볍게 던지는 농담으로 치부해 버리면 안 된다는 사실, 불편함과 수치심, 모욕감을 느꼈다면 상대에게 ‘불편하다’고 용기 있게 말해야 한다는 사실, 이런 행위가 모두 직장 내 성희롱이며 이에 대해 끊임없이 말하고, 저항하고, 요구해야 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여기에 다시 한번 기록하는 이유는 필요할 때 언제든 L과 같은 일을 겪고 힘들어하고 있을 누군가와 계속해서 연대하기 위함이다.
세 사람만 모여도 우리는 하나의 집단이 된다. 집단은 한 사람의 힘을 넘어서 완전히 새로운 힘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그 일을 겪은 L과 직장동료들, 그 이야기를 전달 받은 나, 그리고 이 글을 읽고 있을 당신. 우리 셋은 비록 한 공간에서 일하는 사이는 아닐지라도 직장 곳곳에 사회 모든 곳에 당연한 듯 널려있던 불편한 문화를 바꾸고 새롭게 나아가고 싶어 한다는 점에서 하나의 집단을 구성하는 동료들이다. 부디 2024년에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집단에서 함께 목소리 낼 수 있길. 그리고 2023년 한 해 동안 무사히 살아남은 모든 일하는 사람들이 마지막 남은 날까지 그저 건강히 잘 존재해 주길 기원한다.
김진 HR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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